29화
"미리아!"
에일렌과 친분이 있다고 했던 젊은 마법사였다.
"저도 에일렌처럼 아렌달 영지에서 지원을 받으며 마법 연구를 하고 싶어요."
"마법 연구는 마탑에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 아니면 아렌달이 아닌 다른 귀족 가문을 찾아 지원을 받아도 된다."
"아니요. 아렌달로 갈 거예요."
"왜 굳이 아렌달이어야만 하는 것이냐."
"다른 곳, 그 어디에서도 아렌달 백작님만큼 지원해주시지 않을 테니까요.
마탑주님도 제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마법 재능이 떨어지는 건 아시잖아요?
저는 다른 곳에서는 아렌달 백작님이 제안해주신 만큼 받을 자신이 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아렌달 백작님과 동등한 지원을 해주세요. 그럼 아렌달 영지가 아닌 마탑에 남을게요."
미리아의 말에 다른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렌달 백작님께서는 높은 녹봉과 함께 마나석도 무상으로 제공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 말을 믿고 아렌달로 갈 겁니다."
왕국의 지원과 기부로 유지되고 있는 마탑이 감당할 수 없는 지원이라는 것은 마탑주가 제일 확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아렌달로 가겠다는 미리아의 말에 마탑주는 그저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국왕의 허락이 떨어졌다. 돈도 빌려주고, 백성들도 보내주기로 했다.
벨파스트 후작이 매우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덴프린스 공작과 파티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젊은 귀족 대신들의 발언에 국왕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중간에 마법사들이 다수 아렌달 영지로 이동한다는 말도 나왔다고 했지만, 아렌달로 가는 마법사들이 궁정 마법사도 아니라서 그런지 크게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아렌달처럼 큰 공사를 계속해서 하는 영지는 없었기에 마법사에 대한 귀족들의 관심이 조금 떨어져 있는 상태였던 게 주요했다.
"그럼 뒤는 랄프에게 맡기지."
"최대한 빠르게 자재를 확보해서 아렌달로 보내겠습니다."
"다른 상단과 연계하면 자재를 구하는데 어렵지 않을 거야.
이미 바깥 개발에 관심을 가지는 귀족들이 많은 만큼, 그 귀족들과 관계가 있는 상단에서도 물건을 준비할 테니까 말이야."
국왕이 내어주기로 한 백성들도 순차적으로 아렌달로 이동을 할 것이다.
이번에는 백성들을 동시에 옮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아렌달의 향하는 상단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았다.
왕도 성문을 나서는 내게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언제 봐도 호화로운 마차, 스톨 백작의 마차였다.
"허허허- 아렌달 백작도 영지로 돌아가는 건가?"
"스톨 백작님. 혹시 저를 미행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미행이라니? 내게 그런 취미는 없다네."
"노, 농담입니다."
"아렌달 백작이 농담도 할 줄 알았던가? 허허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쁜 스톨 백작이었으니 나를 미행하거나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에게 많은 관심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다른 귀족들을 대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영지로 돌아가는 여정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아렌달 일행만 있었다면 영지로 귀환하는 속도를 위해 노숙도 감행했겠지만, 스톨 백작의 일행도 함께였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스톨 백작과 함께하는 덕분에 여러 가지 좋은 점도 있었다.
그동안 아렌달로 돌아갈 때마다 지나오는 영주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던 것도 스톨 백작만 있으면 하이패스로 지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최고급 숙소와 식사를 유지하는 스톨 백작이었기에 나 역시 그와 같은 편의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다른 영지와도 좋은 관계를 만들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
앞으로도 계속 왕도에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오늘은 스톨 영지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어떻겠나?"
"스톨 영지에서 말입니까?"
스톨 영지에 들어서자마자 스톨 백작은 나를 초대했다. 그 말에 처음 스톨 백작의 초대를 받았을 때 야반도주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샤를로트의 말만 믿고 그냥 아렌달로 도망쳤었지.'
이번 바깥 개발의 최대 투자자가 스톨 백작이라는 것과 함께, 과거 야반도주의 미안함이 더해 나는 그의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백작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스톨 영지에서 하루를 보내겠습니다."
"허허허- 호의랄게 있겠나? 그저 내 이야기 상대가 되어달라는 부탁이네."
스톨 백작을 마중 나오는 스톨 영지의 사람들을 보며 나는 볼튼에게 말했다.
"마법사들과 친위대는 먼저 아렌달로 보내고, 볼튼만 나와 함께 스톨 영지에서 하루를 보내도록 하지."
"친위대를 모두 말입니까?"
"스톨 백작이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잖아?"
내 지시에 볼튼을 제외한 일행이 먼저 아렌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스톨 백작이 빙긋 웃었다.
내가 스톨 백작을 위험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을 그 역시 확인한 것이다.
"와-"
왕도에서 있었던 파티보다 더 호화로운 식탁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준비한 식사가 아렌달 백작님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라이언의 말에 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는 처음이라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손님을 초대하는 데 있어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라이언의 말이 맞네. 손님을 초대해 놓고 변변찮은 것을 내놓는 것은 스톨의 예의가 아니지."
그때 식당 안으로 샤를로트가 들어왔다.
샤를로트는 식당 안으로 들어오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멀뚱히 멈춰 섰다.
표정을 보아하니 스톨 백작이 나를 초대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왜 그러느냐? 샤를로트."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랜만에 뵈어요. 아렌달 백작님."
아렌달을 찾아올 때와 사뭇 다른 샤를로트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샤를로트양."
"영지로 돌아오는 길에 아렌달 백작을 만나서 같이 돌아왔단다.
아렌달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우리 영지로 초대했지. 허허허-"
"하아-"
스톨 백작의 웃는 모습에 샤를로트는 한숨을 쉬고는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다른 자리도 많은데 왜 여기에 앉는 거냐?'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샤를로트는 자리에 앉고는 내 시선을 피했다.
"허허허- 그래서 이번에 크게 투자를 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도 동생들이 걱정이었는데 한시름 덜었습니다."
들어보니 스톨 백작이 바깥 개발에 투자한 이유는 아들들 때문이었다.
어차피 스톨 영지는 큰아들인 라이언에게 물려준다고 치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한자리 씩 물려주기에 내가 한 제안만큼 좋은 건수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아들 중 이미 자리를 잡은 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스톨 백작은 여유가 있는 만큼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한 것이다.
'자식들이 많아서 가정사가 복잡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스톨 백작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사람이다. 가만히 보면 자식들 간의 사이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진 재산이 많을수록 서로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던 자식들의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게 얼마나 많았던가?
대부분의 재벌가에서 상속 문제로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것을 떠 올려보면 스톨 가문의 이런 모습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잡생각을 하는 나를 라이언이 불렀다.
"아렌달 백작님?"
"아- 뭐라고 하셨죠?"
"제가 영지의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다른 영지의 모습에 관심이 생겼는데 아렌달 영지만큼 발전해 나가는 영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다 아렌달 백작님께서 주도하시는 공사들 때문인 것 같더군요.
우리 스톨 영지에도 아렌달과 같은 도로나 시설을 만들고 싶은데 도움을 요청해도 괜찮겠습니까?"
라이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톨 영지에서 도로를 연결시킬 수 있게 해주시겠다면 얼마든지요."
아렌달에서 왕도로 가기 위해서는 스톨 영지를 지나야 했다. 엔나 영지쪽으로의 길도 있었지만, 차차 구스강을 통한 물길도 생각해 봤을 때 엔나 영지보다는 스톨 영지로 길을 내는 것이 더 나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도로의 연결이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백작님께서 허가만 해주신다면 당장 우리 영지의 일꾼들을 아렌달쪽으로 보내 도로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라이언의 제안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톨 백작이 말했다.
"라이언. 영지의 일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식사 자리에서까지 무거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
"앗-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렌달 백작도 말이야. 너무 일에만 치우쳐서 사는 것 아닌가?"
"영주로서 책임을 다할 뿐이죠."
"영주로서 백성들을 이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무 일만 하고 살다가는 재미없을 거네.
사람에게는 일뿐만 아니라 가족도 중요한 법이거든."
스톨 백작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에서의 삶도 언제나 일에 치여서 살지 않았던가?
공사판의 삶이란 게 대부분 그렇지만, 큰 공사가 시작하게 되면 끝날 때까지는 일 말고 다른 것은 신경 쓰기 어려웠다.
새벽부터 출근해서 저녁에나 퇴근해야 했고, 공사장 인부들 공수 맞춰준다고 관리자인 나까지도 야근을 해야만 했다.
원래 내 성격부터가 살갑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상황상 다른 가족들을 챙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이세계로 온 이후로 가족 생각은 하지도 않았구나.'
확실하게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남은 가족들 생각을 어쩜 이렇게 하나도 하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불효자도 이런 불효자가 없었다.
침묵하는 내 모습에 스톨 백작이 말했다.
"그리고 영주라면 후계자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렌달 백작의 나이에 나는 이미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었다네."
"······"
"백작이 말만 한다면 내가 얼마든지 중매를 서 줄 수 있으니 말만 하게나."
"···감사합니다."
내 대답에 스톨 백작이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에 라이언이 나에게 말했다.
"백작님. 짝을 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네?"
라이언의 말에 그를 바라보자 그 역시 스톨 백작과 비슷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틱
그 순간 샤를로트가 스푼을 내려놓은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소리가 왜 이렇게 잘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순간 샤를로트와 눈이 마주쳤다.
"······"
"······"
잠시의 침묵이 나와 샤를로트 사이를 지나가자 샤를로트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피곤해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샤를로트. 손님이 계시는데···"
"죄송해요. 오라버니. 조금 피곤해서요. 아렌달 백작님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그렇죠?"
샤를로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로트의 눈빛이 당장 그렇다고 대답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돌아서는 샤를로트의 뒷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족이라···'
샤를로트의 살랑이는 머리카락 사이로 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