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내 말에 국왕의 눈이 반짝였다.
"바로 명예입니다."
"명예?"
"그렇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베르겐 역사상 처음으로 바다를 가지게 되는 국왕이 되시는 겁니다.
영원히 이어질 베르겐 역사에 바다를 얻어 낸 최초의 국왕으로 남으시는 겁니다."
국왕이 눈까지 감으며 표정을 숨기려 했지만,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감추지 못했다.
'됐다. 국왕은 넘어왔다. 이제 남은 것은 덴프린스가 해결해 줄 일이다.'
국왕만 설득한다면 덴프린스 공작이 힘을 실어줄 것이다. 이미 덴프린스와 이야기는 끝나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중요한 사안을 나 혼자 결정하는 건 아닌 것 같군. 대신들과 이야기를 해서 결론을 내리도록 하지."
"베르겐 왕국에 바다를 가지고 올 수 있도록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국왕 폐하."
"국왕 폐하께서는 아렌달 백작에게 관심이 아주 많으신 것 같던데."
"그렇습니까?"
"벨파스트 후작이 극렬히 반대하고 있지만, 그래도 국왕 폐하의 뜻이 강경하니 아렌달 백작의 청을 들어주기는 할 거야."
"다행이군요."
"벨파스트 후작이 소리치던걸 아렌달 백작도 봤어야 했는데."
덴프린스 공작은 즐겁다는 듯 웃고는 내게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지?"
"지난번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공작님께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덴프린스 영지에서 버려지는 마나석은 모두 아렌달에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 말에 덴프린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기가 작은 4등급 마나석은 마법을 사용하는 데 보조용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렌달에서도 자크가 돋보기로 마나석을 세공하기 전까지는 마법사들의 마력 보조용으로나 쓰였던 물건이었다.
아렌달에서는 마법사들이 아닌 세공사들이 마나석을 다루기 때문에 4등급 마나석도 좋은 자원이었지만, 다른 영지는 아니었다.
덴프린스 공작도 내가 남는 쓰레기를 대신 처분해 준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4등급 마나석을 세공하는 법을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넘겨주진 않았겠지.'
"그리고 두 번째로 바깥을 개발하며 나오는 광물 자원 중 절반의 지분을 공작님께 양도하겠습니다."
"바깥의 영토가 아닌 광물 자원이라···"
"덴프린스 공작님께서는 바깥의 영토에 관심이 없지 않습니까?
중앙의 정치에 들이는 시간도 부족하시니 영토보다는 자원에 대한 지분을 가지기는 게 중앙에서의 활동에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자원의 탐색이나 개발은 아렌달에서 책임지겠습니다."
덴프린스 공작에게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오히려 뒤로 주머니를 차기에는 새 영지를 가지는 것보다는 자원의 권리만으로 이득을 챙기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었다.
"나쁘지 않군."
"물론 바깥에서 사냥하는 몬스터 역시 지금처럼 공작님께 드리겠습니다."
내가 보내주는 몬스터들로 인해 덴프린 공작의 박물관은 과거보다 훨씬 화려해졌을 것이다.
자신의 저택에도 박제를 전시해 둘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 제안에 나쁠 게 하나도 없었으니 덴프린스 공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한가지 궁금한 게 있단 말이지."
"무엇입니까?"
"아렌달 백작은 그 넓은 영토를 얻어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번에 왕도의 빈민들을 데리고 간다고 해도 아렌달의 인구는 겨우 몇천에 불과하잖아?
아렌달이 그 땅을 독식하기에는 너무 넓지 않아?"
덴프린스 공작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 헤돈과 영지군이 확인한 지역만 해도 아렌달 영지의 몇 배나 되는 영토였으니, 내가 혼자서 그 땅을 독식하려다가는 배가 터져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정도 크기의 영지를 가지게 되면 다른 귀족들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중앙의 정치에 몸을 담고 있는 덴프린스 공작이라면 누구보다 그런 마음을 잘 알 것이다.
"그래서 덴프린스 공작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귀족들의 파티에 참여하려니 조금 어색했다.
나는 파티장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귀족들을 관찰했다.
몇몇 나이가 보이는 귀족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30이 되지 않아 보일 정도로 젊은 귀족들이었다.
그때 내 눈에 파티장으로 익숙한 한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헉! 저 사람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체구를 가진 남자.
스톨 백작이 덴프린스 공작이 주최한 파티에 모습을 보인 것이다.
파티장에 나타난 스톨백작은 자신이 왜 핵인싸인지 증명이라도 하는 듯 모든 귀족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귀족들 한 명, 한 명 모르는 사람이 없는 듯한 스톨 백작의 모습에 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어떻게 또 왕도에 있는 거야? 설마 나를 따라온 건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스톨 백작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이게 누구인가? 아렌달 백작이 아닌가?"
"오, 오랜만입니다. 스톨 백작님. 이번에도 왕도에 계시는군요.
왕도에는 또 무슨 일이십니까? 설마 따님이 또, 출산을 한 건 아니겠죠?"
"허허허- 아니라네. 이번에는 내 아들 에이스가 기사단의 중역을 맡게 되어서 축하를 해주기 위해 왕도에 온 것이네."
"에이스라면 백작님의 둘째 아들이었죠?"
"기억하고 있었군. 이번에 왕국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 임명을 받았지.
내 아들이라 자랑하기 뭐하지만, 왕국에서는 새로운 소드마스터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기사라네. 허허허-"
"그,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스톨 백작의 모습을 보면 도저히 그의 아들이 기사라는 것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특히 왕국에서 소드마스터로 성장하기를 기대하는 기사라니, 정말 스톨 백작과 매치하기 어려운 단어였다.
"그럼 나는 아직 인사가 끝나지 않아서 가보겠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친목하고 있는 스톨 백작의 모습에 속으로 감탄했다.
'실제로 보니까 진짜 인싸 중에 핵인싸구나. 저렇게 친화력이 좋아서 자식들도 그렇게 많은 건가?'
스톨 백작은 아싸 중에 핵아싸인 나와는 정말 다른 사람이었다.
스톨 백작과 인사를 나누고 잠시 후 덴프린스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덴프린스 공작 역시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 아렌달 백작."
"파티를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사실, 이 파티는 내가 덴프린스 공작에게 요청해서 열린 파티였다.
인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나였기에 덴프린스의 도움을 받아 왕도의 귀족들을 모은 것이다.
덴프린스가 내 곁으로 와 인사를 하자 귀족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流冗關??처음 보는 인물이 덴프린스 공작과 인사를 나누고 있으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중, 한 귀족이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는지 우리에게 다가와 말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덴프린스 공작님."
"체스터 남작. 와줘서 고맙네.
인사하지. 여기는 아렌달 백작이네."
"아- 아렌달 백작님이셨군요. 왕궁에서 문관으로 일하는 체스터 남작입니다.
북부의 영지인 체스터 가문의 둘째 아들입니다."
"아렌달 백작입니다."
체스터 영지라면 베르겐 북부에서는 제법 큰 영지였다. 비옥한 땅만큼이 인구도 많은 영지로 알려져 있었다.
역시 부유한 영지 출신답게 체스터 남작도 말끔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체스터 남작을 시작으로 덴프린스 공작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귀족들이 모였다.
"아렌달 변경백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근래에 들어 많은 투자로 영지가 많이 발전했다지요?"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단이 아렌달 백작님의 소유 상단이었군요.
제 와이프가 요즘 아렌달에서 오는 디저트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 영지에 호미와 조선낫을 도입한 후 밭농사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며 파티에 내가 익숙해질 때쯤 덴프린스 공작이 말했다.
"오늘 이렇게 파티를 준비한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 여기 아렌달 백작이네."
"호오- 그렇습니까?"
"네. 제가 덴프린스 공작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내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나에게 모였다. 나는 질투와 호기심으로 뒤섞인 시선을 느끼며 앞으로 나왔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파티에 초대한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함입니다."
"제안이요?"
"그렇습니다. 아렌달에서는 이번에 바깥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바깥의 영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까 합니다."
파티장에 모인 귀족들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바깥의 영토라면···"
"곧 다들 아시겠지만, 아렌달 영지에서는 이번에 바깥을 탐색하며 바다를 확인했습니다."
"바다!"
아무리 내륙 국가의 귀족이라 바다를 본 적 없다고 해도 바다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렌달로부터 구스강을 따라 바다가 있는 곳까지 왕국의 영토를 넓혀나갈 생각입니다.
새로 정복한 영토에 대한 권리는 점령한 영주에게 우선권이 있음을 다들 아실 겁니다.
그리고 국왕 폐하께서는 제게 바깥의 개발에 대한 지시와 함께 권리를 확실히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아렌달 백작님."
"물론입니다. 체스터 남작. 이 사실은 여기 계신 덴프린스 공작님도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 말에 덴프린스 공작이 고개를 끄덕여 발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바깥을 개발하는 데는 많은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투자를 조금 받을까 합니다.
물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대, 대가라면···"
"바깥의 영토를 아렌달 혼자 관리하기에는 조금 크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파티장 안의 귀족들이 눈을 부릅떴다.
국왕에게 셀링을 빌리는 것 외에 따로 셀링을 끌어올 방법이 필요했다.
바깥을 개발하는 것은 일정 부분까지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최대한 많은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자금을 끌어올 방법이라고는 마법 용품과 농기구,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것이 다였다.
당연히 이것으로는 자금을 충당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깥 영토의 분양이었다.
'귀족들에게 바깥 영토에 대한 권리를 약속하며 투자를 받는다.'
지금 파티장에 모여있는 젊은 귀족들은 대부분이 단승 귀족들이었다. 영주의 후계자가 아닌, 영지를 물려받지 못하는 귀족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이름을 이어갈 영지였다.
"아렌달이 바깥을 개발하는 데 투자해준다면, 차후에 아렌달이 개발하는 바깥 영토에 대한 권리를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투자를 많이 하면 많이 할수록 분배될 영토의 권리 역시 커질 것입니다."
내 말에 귀족들이 눈동자를 굴렸다.
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하려는 귀족들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얼마나 투자할 수 있는지 셈을 하는 귀족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중앙에서 너무 먼 곳 아닙니까? 그곳의 형편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투자하기에는···"
한 귀족의 말에 다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도의 귀족들에게 아렌달은 변방 중에 변방이었으니 같은 땅이라도 메리트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때 나를 도와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렌달은 생각보다 훨씬 발전된 영지라네. 도로의 형편도 괜찮고, 영지민들의 생활 역시 나쁘지 않지."
"스톨 백작님. 정말입니까?"
"물론이네. 내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지."
스톨 백작에게 눈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나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아렌달의 역량을 확인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아렌달에 와도 좋습니다."
내 말에 체스터 남작이 확신을 내리고 싶은지 덴프린스 공작에게 말했다.
"덴프린스 공작님. 아렌달 백작님이 하신 말씀이 정말 사실입니까?"
그 말에 덴프린스 공작이 귀족들을 둘러보며 씨익 웃었다.
"이왕이면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그 권리를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덴프린스 공작의 보증이다. 더 이상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와 동시에 한 귀족이 손을 들었다.
"나도 투자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