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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26화 (26/169)

26화

랄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대장장이들이 만들었던 농기구나 마법사들과 세공사들이 만든 마법 용품들은 이미 왕도에서는 인정을 받기 시작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랄프를 통해 왕도에 선보인 아이스크림과 디저트들 역시 왕도의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핫한 아이템들이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감이 있다면 아렌달 산 물건들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울드 상단은 그중에서 가장 신상품을 들이는데 익숙한 상단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신상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움직인 것이다.

"리비아 상단과 울드 상단에게 환영하니까 언제라도 아렌달로 들어오라고 해. 어떤 자원이든 아렌달에서 사줄 테니까 양손 가득히 채워서 말이야."

랄프가 외부에서 가지고 온 물건들이 아렌달에서 공정을 마치고 새 상품으로 변해 다시 왕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나는 그중에 가장 뒤에 있는 네모난 마차를 보며 생각했다.

'저건 그냥 냉동 탑차인데?'

마차에 담겨져 있는 아이스박스에는 신상 아이스크림이 잔뜩 들어있었으니 냉동탑차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정말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잘 팔려?"

"네. 지금 왕도에서는 아이스크림만큼 인기 있는 디저트가 없습니다.

특히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다과회에 아이스크림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모임의 수준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여름도 다 지났는데 아직도 아이스크림을 찾는다고?"

"영주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유행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유행에 뒤처지는 건 귀부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귀부인이 아닌 나로서는 영원히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그래. 아무튼, 돈이 되면 상관없지. 잘 불려오도록 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헤돈과 영지군이 바깥에서 돌아온 것은 계절이 지나 봄이 시작되고 나서였다.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봄이 되어서야 돌아왔으니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걸린 것이다.

바깥으로의 원정이 쉽지 않았는지 영지군 모두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만들어 온 결과에 당당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단 한 명의 손실도 없이 돌아왔으니 나로서도 영지군이 자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사령관 헤돈이 탐사에 대한 결과를 보고했다.

"바다가 멀지 않습니다."

"아렌달은 예상했던 대로 구스강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가 뭐야?"

"생각보다 몬스터의 군락이 많았습니다. 구스강 유역에 존재하던 고블린이나 오크 군락을 정리하면서 진격을 하느라 시간의 소모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몬스터 때문이었다면 절대 죄송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지금처럼 영지군의 손실 없이 돌아올 수 있었으니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헤돈은 바깥 원정에서 그려온 지도를 보이며 말했다.

"여기서 구스강은 급격하게 꺾이며, 이후에는 바다까지 곧게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 구스강이 꺾이는 지점에 몬스터가 특히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이곳만 지나가면 구스강의 하류로 이어지며 드넓은 평야가 보입니다."

"강의 하류에 평야인가? 농사를 짓기에는 좋겠네."

평야의 크기만 해도 아렌달 영지보다 크다. 여기를 차지하면 앞으로 배고플 걱정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평야 서쪽으로는 낮은 구릉이 넓게 퍼져있습니다. 그 외의 눈에 띄는 특별한 지형은 없었습니다."

60명의 영지군이 바다를 확인하고 돌아오는 데만 반년의 시간이 걸렸다.

탐색에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면 점령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왕도에 갔다 온다."

부족한 시간을 메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돈과 사람을 때려 붓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둘 다 부족하니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왕도에 가야 했다.

"그런데 국왕 폐하께서 돈을 빌려주실까요?"

리오의 걱정은 당연했다. 처음 공사 자금을 빌리러 갈 때 와는 규모가 다른 사업이다.

하지만 충분히 국왕에게 돈을 뜯어낼 방법은 있었다.

"내가 제시하는 카드를 보면 국왕도 주머니를 열 수밖에 없겠지."

자금을 얻어낼 방법이 국왕에게 빌리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돈보다는 인력을 얼마나 끌어 올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었다.

"돈보다는 얼마나 왕도의 백성을 더 뜯어 올 수 있는지가 관건이야."

조금씩 늘어난 이주민을 합치더라도 아렌달의 인구는 이제 4천 명. 처음 2천 명을 겨우 넘던 인구를 생각하면 2배나 늘어난 인구였지만, 다른 영지들과 비교해보면 아직 한참이나 부족한 숫자였다.

그리고 앞으로 바깥으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면 인력이 더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에 이번 왕도행에서도 국왕에게 빈민들의 이주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이러다가 왕도의 빈민은 다 아렌달로 이주할지도 모르겠네.'

"이번 왕도행은 조금 오래 걸릴지도 몰라."

"영주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바깥으로의 진출 준비를 마쳐놓겠습니다."

헤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헤돈이 바깥으로 원정을 나갔을 때 영지에서도 영지군을 늘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빌레오는 새로운 마법 무기의 개발을 완성했고, 대장간에서도 언제든지 영지군을 늘릴 수 있도록 여분의 무기를 만들었다.

"그럼. 다시 한번 왕도로 출발해 볼까."

세 번째 왕도행.

또 다시 아렌달에 필요한 것들을 주워올 시간이었다.

"오랜만의 왕도라서 그런지 적응이 잘 안 되네."

"그렇습니다. 영주님. 아렌달과 비교하면 왕도가 얼마나 지저분한 도시인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왕도는 역시 왕도였다. 왕도에 들어서자마자 도시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제는 위생개념이 확실하게 들어서기 시작한 아렌달과 비교했을 때 왕도의 위생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아렌달 상단의 거점에 도착했을 때는 왕도의 공기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여관에서 묵었는데 이렇게 숙소가 마련되어 있는 건 좋네."

"손님을 맞기에도 훨씬 괜찮을 것 같습니다."

볼튼의 말대로였다. 이번 왕도행은 지금까지처럼 국왕만 만나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었다.

다른 귀족 가문들과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필요했기에 손님을 맞을 공간이 필요했다.

"국왕과 이야기가 잘 되면 귀족들이 알아서 나를 찾아오겠지. 그래도 덴프린스 공작은 따로 찾아가 봐야 하겠지만."

덴프린스 공작의 도움을 받으면 국왕과 딜을 하기에도 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 일단 덴프린스부터 만나볼까?"

덴프린스 공작은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겨주었다.

그동안 아렌달에서 보내온 각종 몬스터 전리품이 효과가 있었는지 나를 반기는 덴프린스의 표정도 밝았다.

"왕도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바로 찾아올 줄은 몰랐군. 아렌달 백작."

덴프린스 공작의 환영에 그의 저택으로 들어가자 박제된 몬스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 이유가 다 저것들 때문이라는 거지?'

박제된 몬스터의 시체를 보는 게 어떤 즐거움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래도 그의 기분이 좋다는 것은 나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왕궁보다 나를 먼저 찾아오다니. 이유가 있겠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르게 말을 돌리지 않는 덴프린스 공작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지."

"아렌달 백작님 안으로 드시지요."

왕궁 시종의 목소리에 접견실로 들어가자 국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 아렌달 백작.

바깥의 개발은 잘 진행되고 있나?"

"아직 바깥에 대한 탐사만 겨우 마친 상태입니다."

겨우 탐사를 마쳤다는 말에 국왕의 얼굴에 아쉬움이 드러났다.

"탐사라고 하면 어디까지의 이야기인가?

특별히 보고할 만한 성과는 없는 것인가? 아렌달 백작."

"유의미한 성과는 분명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바다를 확인했습니다."

내 말에 국왕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내륙 국가인 베르겐으로서는 바다가 없는 것이 항상 아쉬움이었기에 바다를 확인했다는 말은 국왕을 흥분시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바다를 확인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렌달 백작."

"그렇습니다. 분명 구스강의 끝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아렌달은 구스강의 중간에 위치했으며, 바깥의 몬스터 군락지를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렇군. 우리 베르겐 왕국도 드디어 바다를 가질 수 있겠군."

당연하게 바다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뻐하는 국왕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바다를 가져오기에는 아렌달의 역량이 부족합니다."

내 말에 국왕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아렌달 백작은 왕도에 올 때마다 이러는군.

처음에는 돈을 빌려 가질 않나. 그다음에는 왕도의 백성을 달라고 하질 않나.

하아- 이번에는 또 무엇을 달라는 것인가?"

국왕의 푸념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돈을 빌린 것도 이자를 더해서 돌려줬고, 빈민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인두세까지 지불하고 데려갔는데 참 불만도 많아.'

하지만 부탁하는 건 이번에도 나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국왕 폐하. 이번에는 둘 다입니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 아렌달 백작."

"셀링도 빌려주시고, 빈민들도 주십시오."

사람이 황당한 일을 겪으면 말이 없어진다. 국왕이 지금 딱 그랬다.

"······"

국왕의 침묵에 나 역시 아무런 말 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하아--"

국왕의 긴 한숨에 내가 말했다.

"이번에도 그냥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이번에는 또 무슨 대가를 치를 것인가? 이번에도 이자와 인두세를 지불할 생각인가?"

"그건 당연히 치를 값이지요."

내 말에 국왕이 흥미를 보였다. 이자와 인두세에 더해 다른 대가를 치를 만한 게 아렌달에는 없는 것을 국왕 역시 모르지 않았으니까.

"아렌달은 앞으로 세금을 내겠습니다."

"변경백이 세금을 내겠다고?"

"그렇습니다. 아렌달 변경백은 앞으로 다른 영지와 마찬가지로 왕국에 세금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바다를 가지게 되면 아렌달은 베르겐 왕국의 유일한 항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점을 가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귀족 가문에서는 아렌달을 견제하기 시작할 것이다.

돈을 쓸어 담으면서 세금도 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변경백의 지위까지 빼앗아 자치권 역시 빼앗으려 할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는 내가 먼저 국왕에게 세금을 내겠다고 하면서 그 외의 자치권을 유지하는 게 나았다.

세금이 아까웠지만, 항구만 가지게 되면 그깟 세금 얼마든지 내줄 수 있다.

"음- 이건 나 혼자 고민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군."

"국왕 폐하. 그리고 국왕 폐하께서 얻으시는 것은 세금뿐만이 아닙니다."

"무슨 소리인가?"

"생각해보십시오. 바깥을 개발하며 얻게 될 영토 역시 베르겐 왕국의 영토입니다.

아렌달 역시 국왕 폐하의 신하이며, 베르겐의 귀족 가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호오-"

"아렌달에서는 국왕 폐하께 드넓은 영토와 그 안의 각종 자원, 그리고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넓어질 영토를 생각했는지, 국왕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이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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