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재판을 연다."
"재판입니까?"
이세계에서 귀족, 그것도 영지의 주인인 영주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당연히 영주인 내가 마음먹기 따라서는 영지민의 목숨도 쉽게 빼앗을 수 있었다.
영지의 모든 것이 내 재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영지에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이고 반란인 것이다.
그럼 에도 나는 재판을 열기로 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귀찮은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렌달의 영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해야만 했다.
양손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상태로 바쿠가 끌려왔다. 얼굴빛이 시커멓게 변한 것을 보면 상처를 치료하지 않아 몸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바쿠뿐 아니라 같이 도망치던 세 명의 용병 역시 두려움에 떨며 끌려왔다.
그 모습을 몬스터 도감을 만들던 기란과 나머지 용병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혹여나 자신들에게도 책임을 물을까 걱정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내 앞으로 끌려온 용병들은 포박당한 채로 무릎이 꿇려지자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쳤다.
"영주님. 잘 못 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제 양손이 제구실할 수 없는 바쿠 역시 목숨을 붙잡기 위해 땅을 기며 빌었다.
이세계에서 눈을 뜨고 내가 데우스 아렌달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아렌달에는 단 한 번도 큰 범죄가 일어나지 않았다.
영지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단순히 운이 좋아서, 아니면 나를 이세계로 데리고 온 누군가의 특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범죄에 대한 처벌을 내린 적이 없다. 당연히 누군가를 상처입힌 적도 목숨을 빼앗은 적도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외부에서 이주민은 계속 올 것이고, 그로 인한 사건과 사고가 없을 수는 없으니까.
결국,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저 이세계를 여행하는 방문객 이현수로 살아갈지.
아니면 이세계에 적응하고 아렌달의 영주 데우스 아렌달로 살아갈지.
"용병 바쿠와 그 일행은 영주의 재산인 영지군의 무기를 훔쳤으며, 이를 외부로 유출까지 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영주의 권위에 도전하였을 뿐 아니라 영주를 모욕하고, 위협까지 했음을 많은 이들의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 말에 영지민들이 바쿠를 경악과 분노의 눈으로 바라봤다. 나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영지민들이었으니 그들로서는 용병들의 행태는 가만히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일 듯 노려보는 영지민들의 눈빛에 용병들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주범인 바쿠는 공포로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숙였다.
"자, 자, 잘 못 했습니다. 제, 제발···"
"나는 너에게 발언을 허가하지 않았다."
"제, 제발···"
차갑게 내려보는 내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쿠는 연신 머리를 땅에 숙이며 제발 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용병 바쿠와 그 일행이 저지른 범죄와 영주인 나에 대한 도전을 그냥 용서한다면 아렌달은 권위도 근본도 없는 무가치의 영지임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
"하여, 용병 바쿠와 그 일행에 처벌을 내리겠다."
내 말에 기사들이 숙이고 있던 네 명의 머리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
공포로 파랗게 질린 얼굴과 떨리는 눈동자로 내 입술만 지켜보는 그들에게 나는 잠시 침묵하며 영지민들을 바라봤다.
내 시선이 움직임에 따라 영지민들의 고개 역시 자연스럽게 숙여졌다.
나는 이제 이현수가 아니다.
아렌달의 영주 데우스 아렌달이다.
"용병 바쿠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우엑!"
참아왔던 구토감이 결국에는 넘쳐서 구역질로 튀어나왔다. 빈속이라 더러운 꼴을 보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우엑!"
몇 번의 구역질 끝에 나는 쓰러지듯 바닥에 앉을 수 있었다.
재갈이 물리고 머리에 두건을 씌워지면서도 용병들은 살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발버둥이 무색하게도 그들의 몸과 머리는 분리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게임이나 소설 속의 상황이 아니다. 현실이다.'
내 말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오갈 수 있다는 걸을 피부로 느끼며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
"안색이 안 좋으셔서···"
"아무렇지 않은데?"
"그, 그렇군요."
볼튼의 걱정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괜찮을 리가 없는 일이다.
'실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봤는데 괜찮을 리가 없잖아?'
지금도 눈을 감으면 몸통에서 떨어져 나가는 바쿠의 머리가 생각났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괜찮은 척을 해야 했다.
그게 내가 아렌달의 영주로서 보여줘야 하는 모습이다.
"자. 그럼 오늘도 활기차게 가볼까?"
***
"이제는 아렌달 백작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아버지."
"그럼 바로 청혼서를 보내도 괜찮을까?"
스톨 백작의 물음에 라이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조급하실 필요 있나요? 이미 왕도의 귀족들에게는 아렌달 백작님과 샤를로트가 결혼할 것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지 않습니까?"
"그건 네가 퍼트린 소문이지 진짜는 아니잖아."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이니 거짓 소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
"음-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렇군."
라이언의 말에 스톨 백작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자신의 딸이 아렌달의 영주 부인이 될 거라는 기대에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아렌달 백작은 보면 볼수록 참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
"저 역시 아버지와 같은 생각입니다. 아렌달 백작은 정말 천재이지 않습니까?
저는 아렌달에서 구매한 호미와 조선낫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런 효율적인 농기구가 있는지.
그걸 아렌달 백작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농사의 신이라도 강림한 줄 알았습니다."
스톨 영지에서도 이미 호미와 조선낫은 영지민들의 사랑을 받는 농기구였다. 스톨 백작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는 라이언 역시 그 효율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또 아렌달의 도로 사정은 어떻습니까? 저는 왕도에서도 그렇게 훌륭한 도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확실히 아렌달의 도로는 마차를 달리기에도 아주 좋지. 흔들림이 없어서 아주 편해."
"그렇습니다. 그런데 도로뿐만이 아닙니다. 아렌달에 새로 생긴 마을을 보면 매우 규칙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작위로 건물을 지은 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계획 마을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모두 아렌달 백작의 생각이었다고 하니, 정말 천재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라이언의 말에 스톨 백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렌달은 몇 년 사이에 확실히 좋아지는 것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아렌달을 가장 많이 왔다 갔다 한 샤를로트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아렌달 백작은 그런 지식을 어떻게 쌓았을까? 아렌달은 변경 중에 변경 아니던가?
그렇다고 아렌달 백작이 왕도나 다른 영지로 유학을 갔다 오지도 않았을 텐데."
"어쩌면 아렌달에서 잃어버린 고대의 지식을 얻은 것일 수도 있지요. 바깥에는 아직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호오- 말이 되는구나."
"물론 그 고대의 지식을 익혔다고 해도,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지식을 활용하는 것도 무리였을 겁니다.
그런데 아렌달 백작은 훌륭하게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과연 샤를로트의 남편감으로 아렌달 백작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는 것 같군."
"그렇습니다. 아버지. 어떻게 해서든 아렌달 백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와 혈연관계로 묶는 것 이상으로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 네가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거라. 이제 스톨 영지는 네가 관리하고 있지 않느냐. 허허허-"
"저만 믿으십시오. 아버지."
***
"언니. 이번에도 아렌달에 갔다 왔어요?"
"누가 그래?"
"에이스 오라버니께서 왕도로 돌아가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칫-"
샤를로트는 자신을 감시하는 에이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이스가 왕도에서 잘나가는 기사라는 건 알겠지만, 에이스는 동생들에게 너무 관심이 많았다.
"왕도의 기사들은 휴가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그리고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자기 일이나 잘하라고 해. 내가 아렌달에 가든 말든 자기가 무슨 상관이야."
샤를로트의 신경질에 로즈마리가 말했다.
"혹시 아렌달 백작님을 좋아하세요?"
"누가? 내가? 무, 무, 무슨 소리니 그게?"
"그게 아니면 혼자서 아렌달에 갈 이유가 없잖아요."
로즈마리는 당황하는 샤를로트를 지긋이 바라봤다. 그 시선에 샤를로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도시로 시집을 갈 거야. 아무리 아렌달 백작님이 나한테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바뀌지 않아.
그리고 아렌달에 가는 이유는··· 그래. 아렌달에는 맛있는 디저트가 있기 때문이야.
그뿐 아니라 아렌달은 물도 깨끗하고 공기도 맑아서 개운 해지는걸. 왕도처럼 냄새도 안 나고 말이야."
"정말이에요?"
"그래. 진짜라니까. 그리고 마차를 타고 아렌달의 도로를 달리면 얼마나 시원한데. 답답한 가슴이 뻥 뚤린 다고. 너도 한번 가보면 알게 될걸?"
"······"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아렌달이 그렇게 좋아요."
"응. 좋아.
잠깐. 이건 아렌달 백작님이 아니라 아렌달 영지가 좋다는 말이야."
"네~ 알겠어요."
***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아렌달 확장 3개년 운동을 시작한다."
내 말에 리오가 아렌달 확장 3개년 운동의 개요를 펼쳤다.
"아렌달 확장을 위해 가장 먼저 끝내야 할 것은 바깥의 탐사다. 헤돈경."
"예. 영주님."
내 부름에 헤돈이 앞으로 나왔다.
"현재 구스강을 따라서 영지군이 탐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아렌달 영지가 구스강의 중간쯤에 위치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그러면 생각보다 바다가 멀지는 않겠네?"
"예. 하지만 구스강을 따라가다 보면 몬스터 군락이 종종 보이기 때문에 현재의 영지군 병력으로는 몬스터를 전부 청소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총으로 원거리에서 공격해도 어렵나?"
"아직은 화력이 조금 부족한 듯합니다."
화력이 부족하다는 말에 자하에게 말했다.
"신형 무기의 연구는?"
"알비레오의 말로는 A3 기관총 연구는 막바지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제 연발 마나석의 결합만 조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막바지면 바깥으로 영토 확장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할 수 있다는 건가?"
"그건···"
"완성할 수 있는 거지?"
"알비레오에게 전해두겠습니다."
"그래. 자하가 열심히 도와주라고."
나는 궁시렁대는 자하를 무시하며 말했다.
"이번엔 1천 명이었지만, 다음번에는 2천 명, 아니 3천 명을 받아오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게 최대한 빨리 확장하고 이전을 준비한다.
언제까지나 이 좁은 아렌달에 있을 수만은 없잖아? 우리는 더 큰 곳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