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20화 (20/169)

20화

"정치라는 것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것. 내가 아렌달 백작을 도와주면, 백작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아! 마나석은 거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걸 먼저 말해두지. 내 영지에서도 마나석이 나오거든."

국왕에게만 알렸던 마나석의 존재도 알고 있다.

국왕 주변에 덴프린스 공작의 인물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준 것이다.

덴프린스 공작은 이미 정치적으로 베르겐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내가 정치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사실상 없다.

덴프린스 영지는 인구가 30만 명도 넘는 대 영지. 자원도 풍부하니 경제적으로도 풍족할 것이다. 심지어 아렌달의 비밀 자원인 마나석 광산도 가지고 있다.

그럼 에도 덴프린스 공작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덴프린스가 가지지 못한 게 무엇이지? 그런 게 있나?'

공작을 찾아오기 전에 공부했던 그의 신상을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그 안에 한가지 그의 흥미를 돋울 수 있는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공작의 취미는 사냥. 그리고 전리품을 수집하고 남들에게 과시하는 것을 즐긴다.'

"바깥의 몬스터."

내 말에 덴프린스는 미소를 그렸다.

"국왕 폐하께 바깥을 개발한다고 했다지? 바깥에서 잡게 되는 몬스터를 내게 보내 줘. 내 박물관에 전시 할 수 있도록 말이야."

"보내 달라니 바깥으로 사냥을 가지는 않는 겁니까?"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바깥에 있는 몬스터를 전리품으로 갖고 싶지만, 스스로 사냥에 나가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위험하니까.

'미친···'

어디서 이런 엿 같은 취미를 가지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 나에게도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새로운 몬스터가 잡힐 때마다 빠짐없이 보내도록 해. 생포해서 보내면 더 좋고."

'몬스터에게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는데 생포를 하라고?'

싱글벙글 웃는 덴프린스의 얼굴을 한 대 갈겨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이는군."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죠.

그리고 어차피 바깥을 개발하다 보면 몬스터는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 시체로 1천 명의 영지민을 얻을 수 있다면 저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 '필요한 사람이 행동을 한다.'는 말인가?"

덴프린스 공작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던 아렌달이 3년 만에 엄청나게 변했다던데. 앞으로 더 얼마나 변할지 멀리서 지켜보지."

가장 변경의 변화마저 놓치지 않는 공작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도 감시의 눈을 멈추지 않겠다는 공작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참! 같은 방계 왕족이자 같은 나이의 귀족으로서 한 가지 조언을 해주지."

"······"

"목이 마르면 물을 가져오라고 시키는 게 귀족의 할 일이지, 우물을 파는 건 귀족이 할 일이 아니야. 잘 알아두라고."

며칠 만에 다시 국왕의 이야기가 달라졌다. 처음 내가 요청했던 대로 왕도 남쪽 빈민가의 1천 명만 데려가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벨파스트 후작이 왕도 밖의 빈민들도 다 떠넘겨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러다가는 귀찮은 짐을 하나도 덜지 못한다는 덴프린스 공작의 말에 국왕이 말을 바꾼 것이다.

"국왕이 또 말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돌아가야겠어. 아직 이주민들에게 줄 수레가 부족한가?"

"한 번에 1천 명이 쓸 수레를 모으기가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아무리 짐이 없다고 해도, 빈민가답게 노약자도 많아서요."

노약자의 숫자가 많아서 아렌달까지 걸어가라고 하다가는 가는 길에 죽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급하다고 해서 서두르다가 더 큰 문제를 만들 수는 없었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더 없나?"

"다른 상단을 수소문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국왕 폐하나 다른 귀족 가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뿐입니다."

"괜히 빚을 만들고 싶지는 않은데."

그나마 부탁할만한 인물이라면 덴프린스 공작밖에 없는데 그 사람은 또 만나기 싫었다.

이미 빚을 지고 있는데 더 빚을 졌다가는 덴프린스 공작에게 완전히 먹혀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왕도에 있었다.

'아니, 이 사람은 베르겐 어디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인가?'

인싸 중에 핵인싸. 스톨 백작이 왕도에 있었던 것이다.

"허허허- 아렌달 백작이 왕도에 있는 줄 알았으면 샤를로트도 데리고 올 것 그랬네."

"스톨 백작님. 왕도에는 또 무슨 일로···"

"셋째 딸인 실비아가 아들을 낳아서 축하해 주기 위해 왕도에 왔다네.

아- 실비아는 문관 대신인 팔룬 남작과 결혼을 했지. 다른 딸들은 아무도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실비아만 벌써 둘째 아들이네.

영주 부인은 아니지만, 왕도 생활에 만족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네. 허허허-"

셋째 딸 자랑은 그만하고 왕도의 귀족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여섯째 딸도 신경 좀 써주는 게 어떨까 싶다.

'내가 샤를로트를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지. 스톨 백작이라면 부족한 수레를 모아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왕궁이나 다른 귀족 가문을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핵인싸 스톨 백작에게 부탁하면 알아서 수레를 모아 줄지도 몰랐다.

"스톨 백작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아렌달 백작의 부탁이라면 들어줘야지. 허허허-"

"이번엔 왕도에서 아렌달로 이주민을 받을 생각인데 그들을 옮길 수레가 부족합니다. 백작님께서 도움을 주시면 다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수레가 필요하다는 말이군. 알겠네. 다른 귀족 가문에 수소문해서 금방 구해주지."

"와-"

빈민가에 늘어선 수레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돈 많은 핵인싸 스톨 백작은 너무나 쉽게 수레를 모아준 것이다.

"이건 조금 과한데? 다음에 어떤 보답을 해줘야 하는 거지?"

"영주님께서 샤를로트 아가씨와 결···"

"쓰읍!"

볼튼의 헛소리에 나는 눈을 흘기고는 나인에게 말했다.

"이주민에 대한 조사는 어느 정도 되었지?"

"네. 총 980명이며, 남성이 520명, 여성이 460명, 그중 어린아이가 170명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따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조사를 해봐야겠지만, 기술이 없다고 해도 젊은 사람의 숫자도 제법 되어서 영지의 공사 현장에 투입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바깥을 개발하기 시작하면 공사가 더 많아질 텐데, 젊은 사람이 많다면 좋지."

거기에 어린아이도 170명이나 된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많다는 것은 미래를 생각했을 때 매우 좋은 일이었다.

노인들보다 아이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더 잘하고, 가르치기도 훨씬 쉽다.

본격적으로 교육을 하는 아렌달에서 아이들은 원석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은?"

"오늘 아침에 영지로 돌아갔습니다."

"스톨 백작이 이렇게 빨리 수레를 모아줄 줄 알았으면 나도 마법사들과 같이 돌아갈 걸 그랬네."

"뒤는 저와 랄프 상단주가 맡겠습니다. 영주님께서도 먼저 영지로 출발하시지요."

"음- 좋아. 그렇게 하지. 그럼 뒤를 부탁해."

"나는 가지 않겠다!"

나인에게 일을 맡기고 돌아가려는 내 귀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방 영지에 가면 먹을 것과 일터를 준다고? 그걸 믿으라는 말이야?"

"기란. 그러면 자네는 떠나지 않겠다는 건가?

이건 왕명이야. 이주하지 않으면 왕명을 어긴 죄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왕명이고 나발이고 개 같은 소리 말라고 해!"

"기란!"

기란이라는 남자의 거친 말에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거기다가 몬스터의 땅과 붙어있는 곳이라며?

그런 곳으로 우리 같은 빈민들을 데리고 가는 이유가 뭐겠어?

다 몬스터의 밥으로 던져 주려고 그러는 거겠지."

"말조심해. 기란!"

"내가 틀린 말 한 줄 알아? 내가 이 팔이 날아가기 전에 용병으로 굴렀던 곳이 바로 몬스터들의 땅이야.

귀족님들의 사냥놀이에 미끼가 되는 게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어차피 죽을 거면 왕도에서 죽었지 몬스터 밥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남자의 말에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점점 동요하는 게 느껴졌다.

몬스터의 땅에서 용병 생활을 했던 기란의 말이었으니 몬스터에 대한 공포가 옮겨간 것이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저 기란의 입에서 전파된 공포가 이주민 전체에게 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영주님. 처리할까요?"

"뭘 처리해?"

"저 이야기가 더 퍼지기 전에 저자의 입을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볼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몬스터라는 공포에 잠식되려는 이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이주민들은 기사를 이끌고 나타난 내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땅에 머리를 숙였다.

"방금 한 이야기에 흥미가 있어서 말이야."

혹여나 내가 기란의 말을 들은 게 아닐까 눈치를 보던 이주민들은 그 말에 놀라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귀족님."

목소리를 올리던 기란도 부들부들 떠는 모습을 보니 방금 한 말이 얼마나 위험한 이야기였는지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했다.

"용병 기란. 방금 한 이야기를 계속해봐."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하나밖에 없는 팔로 비는 기란에게 말했다.

"조금 전에 들으니 몬스터의 땅에서 용병 일을 했다고 하던데."

"포오네 영지에서 카스 산맥을 넘나들며 용병 일을 했습니다."

"얼마나?"

"10년이 조금 넘게···"

"그 팔도 그때 잃은 건가?"

"귀, 귀족님들의 사냥 대회에서 몬스터 몰이를 하다가 잃었습니다."

조금 전 기란이 한 말 대로 귀족들의 사냥 대회에 종종 용병들이 몰이꾼으로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몬스터를 사냥하는 대회도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긴. 덴프린스도 몬스터를 전리품으로 갖고 싶어 했으니.'

헐렁이는 기란의 왼팔을 보니 더욱 씁쓸한 기분이었다.

당장에 목이 날아갈 줄 알았던 기란은 자꾸 질문을 던지는 내 모습에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 모습에 내가 피식 웃자 다시 머리를 땅에 찧으며 말했다.

"다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기란이 다시 목숨을 구걸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기란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없는 데서는 나랏님 욕도 할 수 있지. 하물며 내 욕도 아니지 않은가?

나도 이번에 안으로 밖으로 국왕 욕을 얼마나 했는데.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기란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유가 있었다.

"몬스터의 땅에서 10년을 굴렀으면 몬스터의 생리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예?"

"나한테는 그 지식이 필요한데 말이야.

아렌달로 가지 않겠다면 귀족 모독죄로 처벌하고, 아렌달로 오면 그 지식을 내가 써주겠다."

"······"

"몬스터를 잘 아는 동료가 있다면 다 데리고 와. 내가 써주지. 용병 기란. 그래도 왕도에 남을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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