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누구지? 볼튼경. 오늘 누가 영지를 방문한다는 이야기가 있던가?"
"제 기억으로는 없었습니다."
기억을 되짚어봐도 오늘 영지에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그런데 먼지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는 분명 말과 마차의 모습이었다.
점점 다가오는 마차에 볼튼과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공사 현장의 영지민들도 검을 꺼내 드는 기사들의 모습에 각자 들고 있던 공사 장비를 들고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마차가 우리의 앞에서 멈추며 육중한 덩치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놀래주려고 했는데 여기 있었군."
"윽!"
내가 아는 이세계 사람 중 가장 뚱뚱한 남자. 바로 스톨 백작이었다.
"스톨 백작님. 아렌달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허허허- 지난봄에 아렌달을 찾아오겠다고 하지 않았나? 추수가 끝난 김에 그 약속을 지키려고 왔다네."
왕궁에서 스톨 백작을 만났을 때 그가 일방적으로 맺은 약속이었다. 심지어 나는 아렌달에는 볼 게 아무것도 없다고 사양했던 약속이었다.
그런데도 스톨 백작은 기어코 마차를 끌고 아렌달로 찾아온 것이다.
"오랜만에 뵈어요. 아렌달 백작님."
"오, 오랜만입니다. 샤를로트양."
그것도 샤를로트를 데리고 말이다.
억지웃음을 짓는 샤를로트에게 인사를 건네자 스톨 백작은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잠깐 봤는데도 샤를로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니. 아렌달 백작이 샤를로트를 눈여겨보고 있었군."
"으억! 무슨 그런 소리를!"
"허허허-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네. 사실 8명의 딸 중에서 샤를로트가 미모로는 제일이라네. 사내라면 누구나 샤를로트에게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지."
'딸이 8명이나 있다고? 아들도 10명 정도 있지 않았나? 이 사람 부인을 몇 명이나 두고 있는 거야?'
금광을 가진 영주님의 능력에 나는 굳어진 채 말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굳어지는 내 표정만큼 샤를로트의 얼굴도 차가워졌다.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편한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나? 마차도 오래 타려니 불편하군."
스톨과 아렌달은 이웃 영지. 마차를 오래 타봐야 얼마나 탄다고 저렇게 불편해하는지 모르겠다. 스톨 백작은 말은 못 탈 게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날려버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스톨 백작에게 잠시 기다려달라 양해를 구하고 나는 볼튼에게 말했다.
"영주성에 먼저 돌아가서 숨겨야 할 것들부터 숨겨."
"알겠습니다."
"그리고 스톨 백작이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그가 좋아하는 것··· 그래. 리오에게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라고 전달해.
영주성에 만찬을 준비해 놓으면 다른 곳에 관심을 주지 않겠지."
내 지시에 볼튼이 서둘러 영주성으로 출발했다.
"아렌달 백작. 아직 멀었는가?"
스톨 백작의 보채는 목소리에 나는 에일렌에게 말했다.
"에일렌. 이제 어디에 마법을 써야 하는지 알지? 마법 몇 번 써주고 너도 돌아가. 마법 연구소 정리하고 좀 자라."
"···네."
"발더. 뒤를 부탁한다."
"넵!"
에일렌과 발더에게 뒤를 부탁한 나는 스톨 백작의 요청으로 그의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좋은 마차라는 게 느껴졌다.
육중한 스톨 백작이 있음에도 여유가 있는 내부와 말 안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푹신한 의자까지. 이런 마차를 타고도 불편하다고 하는 스톨 백작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렌달 백작. 그 여자는 누구인가?"
"여자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마차에 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가 있었잖나. 돌아가서 자라고 잠자리까지 걱정해주는 것으로 보아 아주 친근한 관계인 것 같던데."
"에일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귀에는 살집이 없는지 용케도 그 말을 들었나 보다.
"영지의 마법사입니다. 도로 공사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저와 함께 있던 것이지요.
그리고 마법 연구로 밤을 샜다 하기에 걱정해준 것이지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허허허- 그렇군. 나는 잠자리까지 걱정해주길래 아렌달 백작과 특별한 관계인 줄 알았지 뭔가.
샤를로트. 들었느냐.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고 하는구나."
스톨 백작의 상상력에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고, 샤를로트는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렌달에는 처음 와보는데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영지로군. 도로도 잘 만들어졌고, 농지도 충분해 보여."
"그래도 스톨 영지보다 많이 부족하지요."
"허허허- 아렌달 백작. 겸손이 너무 과한 것 아닌가."
스톨 백작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샤를로트는 한 번도 웃지 않고 있었다.
만찬 시간 동안 스톨 백작의 손과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어떻게 저렇게 먹으면서 쉼 없이 떠들 수 있는지 경이로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기르만 남작과 사냥대회를 열 생각이네. 아렌달 백작도 함께하는 게 어떻겠나."
"제가 사냥에는 안 좋은 경험이 있어서··· 그리고 겨울에도 영지의 운영이 빠듯해서 사냥대회에는 참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가? 쩝. 그렇다면 내년 봄에 예정되어있는 카톤 백작과의 만찬은 어떤가? 봄철에 카톤 영지에서 만드는 딸기 파이는 정말 맛이 끝내준다네. 그리고 은어찜 역시 카톤 영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이지."
스톨 백작은 그 밖에도 플롬 남작의 결혼식, 아라스 영지의 사냥대회 등 올겨울부터 내년 여름까지 있을 각종 이벤트에 대해서 연신 떠들어 댔다.
그렇게 만찬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수다에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톨백작은 인싸다. 인싸 중에 핵인싸.'
어디서 정보를 모으는지 각종 이벤트나 지역의 먹거리를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을 정말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돈 많은 백수가 1년 내내 놀 거리, 먹을거리를 찾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아! 금광을 가지고 있으니 돈도 많겠지.'
영지 운영에 매일매일을 소진하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음- 너무 즐거워서 나도 모르게 떠들었군."
'드디어 수다를 멈추는 건가?'
통통하게 오른 배를 두드리며 스톨 백작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과식으로 부풀어 오른 배를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에 샤를로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식사는 즐거우셨습니까?"
"아주 좋았네. 샤를로트. 너도 충분히 즐기지 않았느냐?"
샤를로트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의 앞에 놓인 접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샤를로트는 그런 내색 하나도 없이 스톨 백작에게 말했다.
"네. 아버지. 저도 즐거웠답니다.
아렌달 백작님. 이런 만찬을 준비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 인사를 하는 샤를로트가 마음에 들었는지 스톨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나는 잠시 휴식이 필요할 것 같네."
"백작님과 샤를로트양을 게스트 룸으로 안내해 주도록 해."
그때 스톨 백작이 샤를로트에게 말했다.
"샤를로트. 너는 아렌달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니?"
"······"
"아렌달 백작. 샤를로트가 이래 봬도 제법 공부도 많이 한 아이라네.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면 아주 재미있을 거야."
그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스톨 백작은 나와 샤를로트를 남겨 놓고 게스트 룸으로 가버렸다.
스톨 백작이 사라지자마자 샤를로트는 감추고 있던 표정을 드러냈다.
"진짜 싫어! 내가 왜 이런 시골에 있어야 하는 거냐고!"
나를 째려보는 샤를로트에 나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도시로 시집을 간다고 하더니 잘 안됐나 보네?"
"이게 다 백작님 때문이잖아요! 왜 하필 그날 왕도에 있어서···"
내가 왕도에 있었던 게 무슨 상관이라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백작님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왕도에서 결혼 상대를 찾아주셨을 거라고요."
"그건 나한테 따질 게 아니라 스톨 백작에게 따져야 하는 것 아니야?"
"아- 몰라요!"
이제는 울상이 되어 칭얼거리는 샤를로트였다.
"이런 시골로 시집을 오려고 내가 그렇게 공부를 했는지 알아요? 왕도의 귀족들에게 무시 받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많이 공부했는데.
언니 오빠들도 못 하는 셈도 배우고, 시에! 악기에! 그림까지! 온갖 교양을 익히면서 살았는데.
결국, 아렌달 백작님 때문에 다- 망쳤어요."
샤를로트의 칭얼거림에 나는 속으로 살짝 놀랐다.
제대로 된 교육기관도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고서야 귀족가의 아가씨가 셈을 익힐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왠지 조금은 이렇게 칭얼대는 게 조금은 이해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거짓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스톨 백작이 너를 빌미로 아렌달을 집어삼키려고 한다는 말. 그거 거짓말이지?"
스톨 백작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절대 남의 영지를 탐낼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스톨 백작은 그냥 핵인싸일 뿐. 영지를 더 잘되게 하겠다는 마음이나 더 큰 영지를 차지하겠다는 마음보다는 그냥 다른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
자식들도 권력을 위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발을 넓히기 위한 이유로 결혼시킨 사람이다.
단순히 장남인 라이언 스톨을 왕도의 귀족가가 아닌 지방의, 그것도 권력과 거리가 먼 칼스타드 남작의 사위로 보낸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권력에 관심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내 물음에 샤를로트는 "칫."하고 혀를 한번 차고는 나를 노려봤다.
"그래도 백작님 방에 저를 보내려고 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닐걸요?
그리고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백작님과 결혼할 마음이 없었다고요. 지금도 그 마음을 변하지 않았고요.
백작님이 저에게 반하셨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저는 백작님과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누가 누구한테 반했다고?"
"백작님이. 저한테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샤를로트에 나는 살짝 내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나는 샤를로트에게 반하지 않았다.
내 이상형은 청순가련형의 미인이지 이런 당돌한 꼬맹이가 아니었다.
"내가 마차를 준비해 줄 테니까 넌 그냥 스톨로 돌아가는 게 어때? 영지로 돌아가서 일단 병부터 고쳐야 할 것 같아."
"병이라니요! 제가 몸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매일 운동도 한다고요.
만약 제가 병이라도 걸렸다는 이야기가 돌면 도시로 시집가는 게 더 물 건너가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아이고. 그러십니까?"
참으로 열심히 사는 샤를로트 양은 더 이상 말하기도 지쳤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영지로 돌아가려고?"
"그랬다가 아버지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요. 그냥 혼자 쉬고 싶어요.
아버지한테는 대충 백작님과 유행하는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자기 할 말만 쏙 하고 나가는 샤를로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돌아갔어?"
"영지를 빠져나가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하지 않으면 환영해주지 않겠다고 확실히 전했지."
"네. 스톨 백작도 이번에는 자신이 무례했다는 말을 했으니 다음에는 미리 연락하고 올 겁니다."
"후아!"
스톨 백작이 머물고 간 3일간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가 돌아갔다는 말만으로도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스톨 백작은 엔나 남작처럼 다른 뜻을 가지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스톨 영지쪽으로는 감시를 적게 해도 괜찮겠어. 스톨 영지로 돌던 순찰도 다른 쪽으로 돌리라고 헤돈에게 전해줘."
스톨 백작이 너무 인싸라 조금 피곤한 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본심을 알았으니 그쪽으로는 걱정을 줄일 수 있었다.
"마법 연구소는 어때?"
"스톨 백작이야 마법 연구소가 관심도 주지 않던데요. 샤를로트 아가씨가 조금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냥 신기해할 뿐 아가씨 역시 마법 연구소 가까이는 가지 않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아렌달에 왔던 사람들이 마법에 관심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마법에 아주 관심이 많다. 그래서 당장
-펑
하는 소리에 저절로 걸음이 옮겨질 정도였다. 물론 이 정도 소음이라면 누구나 소음의 진원지를 찾아가기 마련이지만.
"알비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