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15화 (15/169)

15화

엔나 남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엔나 영지는 아렌달과 같은 변경백도 아니기에 나와 같은 강한 자치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강력한 군사 집단인 기사단을 만든다는 말은 쉽게 나올 만한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일면식도 없던 내게 그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아렌달 백작님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제 기사들이 아렌달 영지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엔나 영지에는 아렌달처럼 기사들을 훈련 시킬 수 있는 장소가 없습니다. 기사들이 바깥에서 훈련할 수 있도록 아렌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역시 나를 끌어들이려는 건가?'

바깥의 몬스터들을 대신 처리해준다면 나로서도 아쉬울 게 없는 제안이었다. 가뜩이나 아렌달은 군사적으로 약한 영지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단순히 몬스터를 상대로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해 기사단을 아렌달에 들이려는 게 아닐 것이다.

엔나 영지가 기사단 때문에 받게 될 압박을 나에게 덮어씌우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변경백으로서 자치권을 인정받는 아렌달은 엔나 영지보다는 압박을 덜 받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자신의 책임을 피할 명분을 만들기 좋을 것이다.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아렌달에 기사들을 맡기면 다른 귀족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미안하지만, 그 부탁은 들어주기 어렵군요."

내 말에 엔나 남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영지의 군사력이 약한 상황에 타 영지의 군사들을 영지에 들여주는 멍청한 짓을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아렌달에는 아직 숨겨야 하는 비밀도 많았다. 아직 제 궤도에 오르지도 못한 발전 계획과 마법 연구를 밖으로 소문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바깥에서 훈련하겠다고 해도, 그들의 식사와 휴식까지 모두 바깥에서 할 수는 없는 법.

영지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 텐데, 그들의 눈을 다 가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기사단의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비밀은 지켜주겠다는 내 말에 엔나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기사단을 만들겠다는 엔나 남작의 계획은 그를 압박하기 좋은 카드였을 것이다.

하지만 엔나 영지의 힘이 얼마나 되는지도 몰랐고, 비밀은 이쪽이 더 많았다. 지금은 조용하게 넘어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득이었다.

엔나 남작은 금방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다.

도로 공사에 대한 이야기 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던 분위기가 기사단의 이야기로 인해 확 가라앉으면서 엔나 남작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그로 인해 엔나 남작이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별문제 없이 조용히 아렌달을 떠났다.

엔나 남작이 마법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마법사 겐드리가 마법 연구소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물론 겐드리가 마법 연구소를 보고 싶다고 해도 그의 입장을 허가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그로 인해 내가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엔나 남작이 간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엔나 남작의 기사단을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몰랐다.

"볼튼. 헤돈에게 엔나 영지 쪽도 순찰하라고 전달해줘. 엔나 남작의 성격상 곱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우리 영지를 지나 바깥으로 기사를 보낼지도 몰라."

"헤돈경에게는 바로 연락을 하겠습니다."

바깥을 감시하기에도 부족한 군사가 이제는 이웃 영지까지 감시해야 할 판이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병력을 늘리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새로운 병력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서 오게. 랄프 부 단주."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렌달 백작님."

"엔나 영지를 통해서 왔다고 하던데. 오는 길은 어땠나?"

"놀랍더군요. 왕도의 도로보다 더 훌륭한 도로였습니다.

언제 이렇게 훌륭한 도로를 만드셨는지, 아렌달을 찾을 때마다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실제로 도로를 이용할 상단의 평가를 들으니 나 역시도 만족스러웠다.

"그쪽의 공사를 마무리 하는데로 스톨 영지 방면으로도 도로 공사를 시작할 생각이네."

"스톨 영지와도 도로를 연결할 생각이 십니까?"

"당연하지. 아렌달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단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아렌달에서 다른 영지로 나가는 도로를 깔끔하게 정비하면 상단에서도 더 많은 물건을 더 빨리 아렌달로 가져와 주겠지."

"······그렇군요."

"좋은 거래를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비아 상단이 항상 좋은 물건을 가져와 주는 덕분이지."

"아닙니다. 저희 상단과 거래해주신 호미와 조선낫 덕분에 큰 이문을 남길 수 있어서 상단주도 아렌달 백작님께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리비아 상단은 어느덧 아렌달의 가장 큰 고객이 되었다. 리비아 상단이 왕도에 가져간 농기구가 큰 반향을 일으켜 좋은 결과를 만들어서인지 또 새로운 상품이 만들어진다면 먼저 물건을 차지하기 위해 아렌달을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리비아상단이 가지고 오는 상품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언제나 환영해주고 있었다.

특히 리비아 상단은 아렌달을 찾을 때마다 이주민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상단이었다.

"이번에는 새로운 상품은 없지만, 올해 농사가 잘되어서 남는 작물이 조금 있네."

"몇몇 영지에서는 더운 날씨 때문에 농사에 실패했다고 하던데 아렌달은 아니었나 보군요."

농사에 실패한 영지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에는 덥고 비도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수지에 충분한 물을 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렌달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준비가 되어있지 않던 영지에서는 피해가 생긴 것이다.

랄프의 말에 나는 남는 작물을 그냥 저장할까 생각도 했지만, 이미 충분한 식량을 보관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존의 생각대로 리비아 상단에게 넘기기로 했다.

"하하- 아렌달에 오면 항상 큰 이문을 남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자주 찾아주게. 우리도 리비아 상단이 가져와 주는 상품이 정말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리비아 상단에게 남는 작물을 넘기게 되면서 아렌달은 처음으로 흑자의 상황이 만들어졌다.

'국왕에게 돈을 빌리고 1년 반 만에 처음으로 흑자인 건가?'

물론 지금도 새로운 도로 공사 때문에 돈이 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영지의 경제 상황이 흑자로 전환 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주님. 이대로 가다가는 국왕 폐하께 빌린 셀링을 갚지 못할뻔하지 않았습니까?"

리오가 흑자를 맞은 영지 상황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부터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팔면 기간을 충분히 맞출 수 있겠지."

이뿐 아니라 영지를 보호할 힘만 생긴다면 마나석과 마법 용품의 거래도 시작할 생각이다.

알비레오와 마무가 총의 개발 연구에 힘쓰고 있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니던가.

알비레오는 이미 작은 폭발이 일어나는 마나석을 완성 시켰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격발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매일 같이 자하와 연구에 시간을 들이고 있었다.

마무가 만들고 있는 총기의 틀 역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마법의 방향을 잡아줄 총열부터 손잡이와 개머리판까지 내가 그려준 그림을 토대로 만들어 냈다.

다만 아직 마나석이 들어갈 마나석 결합부가 불 완전하기에 조정을 하고 있었다.

"리오. 이번 겨울에는 영지군을 조금 늘려볼까 하는데 괜찮을까?"

"영지군을요?"

"그래. 올해 이주민이 거의 200명가량 늘어났잖아? 영지군을 조금 늘려도 농지와 공사 현장은 충분히 돌아갈 수 있지 않겠어?"

"얼마나 늘리실 생각이 십니까?"

"20명."

한 번에 영지군의 규모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이지만, 지금 있는 20명으로는 바깥과 엔나 영지를 감시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엔나 영지뿐 아니라 스톨이나 다른 영지에서도 아렌달에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근래에 리비아 상단을 비롯한 상단들이 아렌달을 오가면서 인근 영지에는 아렌달이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을 것이다.

그동안에는 자원도 없었으니 탐을 내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겠지만, 점점 아렌달에 관심을 보내게 될 것이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병력을 늘리시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와 같은 상황이라면 많은 병력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아무래도 내 예상으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쭉 이어질 것 같지가 않아서."

"음-"

내 말에 리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한 번에 두 배로 늘어나는 영지군에 영지 운영비가 쉽게 계산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영주님. 외부에서 기사를 영입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엔나 영지처럼 기사단을 만드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볼튼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기사의 전투력이 영지군 병사보다 월등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사들의 녹봉을 생각하면 리오의 고민이 해결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볼튼과 다른 기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기사라는 사람들에 큰 의미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 마법 무기로 무장할 영지군이 기사들에게 밀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을 아무리 잘 쓴다고 해도 다가오기 전에 총을 갈겨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초 근거리의 상태가 아니라면 무조건 총이 전투에서 유리한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에일렌!"

"넵!"

내 부름에 에일렌이 후다닥 뛰어왔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나 맨들거리는 얼굴을 보니 제대로 씻지도 않은 것 같았다.

"어제 안 잤어?"

"그, 그게 마법 연구에 심취하는 바람에···"

"오늘 분명 대로 공사에 지원 간다고 말했을 텐데?"

"죄,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에일렌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마법은 사용할 수 있겠어?"

"하, 할 수 있어요. 마나석도 가져 왔어요."

주머니에서 한 줌의 마나석을 꺼내는 에일렌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오늘은 한 다섯 번만 뒤집어 주고 먼저 돌아와."

"다, 다섯 번이요?"

"뭐야? 다섯 번도 안 돼?"

"아, 아니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내 물음에 에일렌이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스톨 영지로 이어지는 대로 공사 현장으로 에일렌을 끌고 왔다.

이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현장은 나와 에일렌의 등장에 잠시 손을 멈추었다. 에일렌이 마법을 사용하는 시간이 영지민들에게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에일렌. 부탁해."

"하아- 네."

피곤한 얼굴로 숨을 고른 에일렌은 마나석을 하나 꺼내서 손에 들고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일렌의 주문은 끝까지 완성되지 못하고 멈추었다.

시야 끝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