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다른 의미가 있는 말입니까?"
볼튼이 내 고갯짓에 물었다.
"겨우 2천 명을 넘는 지금은 이 정도의 영지로도 충분하겠지.
하지만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면? 2천 명이 아니라 2만 명, 그것을 넘어 20만 명의 인구가 아렌달에 생기면 어떻게 하지?"
"영주님. 큰 뜻을 품고 계시는 것입니까?"
내 곁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서인지 볼튼도 제법 눈치가 생기긴 한 것 같았다.
"큰 뜻이라기 보다는 언젠가 아렌달 영지가 작게 느껴질 것을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사 볼튼. 영주님께서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든 영주님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건 참 안심이 되는 말이네."
볼튼의 말에 나는 씨-익 미소를 그려주었다.
물론, 이제 겨우 100여 명의 인구가 늘어났을 뿐이니 아직은 시기상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루하루 변해가는 아렌달의 모습을 생각해봤을 때 슬슬 나 나름의 준비도 해야 할 것은 틀림없는 이야기였다.
"공사는 얼마나 진행되었지?"
"죄송합니다. 영주님.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뭐가 문젠데?"
도로 공사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공사 현장을 찾았더니 발더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영주성에서 엔나 영지로 이어지는 대로 공사를 여름 안에 마무리하길 희망했는데, 아무래도 기간을 맞추기 어려운 듯했다.
"아무래도 이번 여름이 특히 더워서인지 공사에 투입된 영지민들이 금방 지치고 있습니다. 이쪽의 대로 공사에는 구스강과도 떨어져 있어서인지 물을 가지고 오기도 쉽지 않아 작업에 더 어렵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엔나 영지는 스톨 영지과 마찬가지로 아렌달과 이웃 영지였다. 구스강을 접하고 있는 스톨 영지보다는 육로를 만들기 좋을 것으로 생각해 엔나 영지 쪽 방향을 우선해서 대로 공사를 시작했는데, 예상외의 더위로 공사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다른 문제는 없어?"
"그, 그것이···"
"더 있네."
"···네. 일부 자재가 부족한 문제도 있습니다."
"자재가 부족하면 리오에게 보충을 해달라고 하면 되잖아? 부족한 부분은 외부 영지에서 구해서라도 투입하라고 지시를 내렸는데?"
"리오님께서 외부에서 물건을 들여오기가 쉽지 않다고 하셔서··· 그렇다고 우리 영지에서 자재를 구하기에는 거기에 투입할 인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떤 자재?"
"맨 밑에 깔릴 큰 골재가 제일 시급합니다."
"큰 골재가 없다고? 그럼 시작도 못 한다는 말 아니야?"
"죄송합니다."
"아니- 발더가 죄송할 건 아니지."
사람도 부족하고, 공사에 필요한 자재도 부족하다. 공사를 진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에일렌이라도 공사에 붙여줄까?"
"마법사님 말입니까?"
"그래. 자하와 알비레오는 각자 다른 연구를 진행 중이라 시간이 없지만, 에일렌은 그래도 조금 여유가 있는데."
"마법사님께서 도와주시면 공사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삽 줘봐."
삽을 달라는 내 말에 발더가 삽을 하나 가져왔다. 나는 삽을 들고 도로가 만들어질 곳에 라인을 쭉 그렸다.
그리고 반대편도 마찬가지로 라인을 그리고는 에일렌에게 말했다.
"이 선 안쪽에 있는 땅을 다 뒤집을 수 있겠어?"
"잠시만요."
내 지시에 에일렌은 품속에 넣어온 마나석을 꺼내고는 주문을 외웠다.
"···흔들려라! 어스퀘이크!"
에일렌의 주문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솟아라! 샌드월!"
그리고 이어지는 주문에 흔들리던 벽으로 지면이 튀어 올랐다.
"후아-"
연속된 마법에 에일렌이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며 발더에게 말했다.
"골재 챙겨."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영지민들이 달라붙어 돌과 자갈을 줍기 시작했다. 금방 수레 하나가 가득 차는 모습에 나는 에일렌에게 말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쓸 수 있어?"
"마나석을 챙겨와서 아직 여유 있어요."
"그럼 조금만 더 도와줘."
이전부터 지켜봐 왔지만, 완전 포크레인이 따로 없었다.
어느새 땅 뒤집기는 완전 익숙해졌는지 내가 대충 위치를 지정해주면 에일렌은 망설임 없이 마법을 사용해 지반을 뒤집어 주었다.
한번 뒤집힌 지반은 가벼운 삽질에도 쉽게 파였기 때문에 도로 공사도 한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일렌의 능력은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에일렌은 대지 마법의 전문가가 아니라 원소 마법을 전부 수준급으로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에일렌! 바람!"
바람을 일으켜 달라면 바람을 일으켜 먼지를 날려줌과 동시에 땀도 식혀주었고,
"에일렌! 물!"
물을 달라고 하면 마법으로 물도 끌어와서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도로에 물을 뿌려주며 평탄화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내 옆에서 신나게 삽질을 하는 볼튼을 보며 발더에게 말했다.
"기사의 삽질이 필요하면 기사도 빌려줄게."
"아, 아닙니다. 영주님. 어떻게 기사님들을···"
"내가 생각하기에 쟤들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급해지면 영주성에 날 부르러 와. 어차피 내가 공사장에 오면 쟤들도 삽을 들어야 해."
"아, 알겠습니다."
"에일렌!"
"영주님. 저 오늘은 더 이상 못 하겠어요."
"아. 그래?"
한쪽 그늘에 누워있던 에일렌이 내 부름에 울상을 지었다. 마나석의 도움을 받아도 마법을 쓰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요즘 매일같이 공사장에 끌려 나왔던 에일렌이었기에 저렇게 뻗어있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오늘은 저기까지만 다지고 끝내."
삽을 내려놓고 걸어가는 내게 발더가 말했다.
"저기까지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는데요?"
"그냥 저기까지만 하고 오늘은 좀 쉬라고 해. 가끔씩 이런 날도 있어야 삽질할 맛이 있지."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발더가 영지민들에게 달려가 내 지시를 전달했다. 그러자 영지민들의 삽질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게 보였다.
"영주님. 저들이 힘을 아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지를 위한 일에 저렇게 힘을 아끼고 있었다니 한번 단단히 주의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삽질에 속도가 붙는 모습에 볼튼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하지만 저건 힘을 아꼈다기보다는 없는 힘도 끌어다 쓰는 것이다.
그 모습에 지구의 공사판이나 이세계의 공사판이나 똑같다는 걸 느끼며 나는 볼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됐고, 가서 에일렌이나 챙겨줘. 영주성으로 돌아간다."
경작지의 이삭이 제 머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시기에 대로의 공사도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누가 온다고?"
"엔나 남작이 영지에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갑자기 왜?"
"아무래도 엔나 영지로 이어지는 도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면식이 없던 이웃 영지의 주인이 갑작스럽게 방문을 요청했다.
"거절할 명분은 없는 거지?"
내 물음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억지를 부린다면 거절할 명분을 만들지 못할 이유도 없었지만, 굳이 이웃의 방문을 거절하기에도 부담이 있었다.
"일단 마법 연구소에 있는 마나석부터 숨기고, 감자밭도 봉쇄해놔. 그리고 대장간에도 말해서 총도 숨기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아직은 아렌달의 힘을 알리기에는 적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아렌달 개발 3개년 계획은 마무리되고, 그 이후에 조금씩 아렌달의 능력을 보여주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아직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아렌달을 지키기에는 힘이 부족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최소한 총의 개발이 끝나면 그때는 아렌달도 외부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럼 손님맞이를 한 번 해볼까?"
"아렌달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렌달 백작님."
"바로 이웃 영지인데 무슨 허락이 필요하겠습니까. 어서 오세요. 엔나 남작."
엔나 남작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었다. 허리춤에 찬 검을 보니 검술에 제법 조예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영지를 지나다니는 상단을 통해 아렌달이 발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달라졌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선대 변경백께서도 이렇게 발전된 아렌달을 보면 백작님을 아주 자랑스러워할 겁니다."
"칭찬이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그저 영지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엔나 남작은 아렌달에 관심이 많은지 연신 눈을 돌리며 관찰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아렌달에 방문한 기억이 있는지 달라진 아렌달에 조금 놀라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엔나 남작의 눈길을 끈 것은 마법 연구소였다.
"마법 연구소입니다. 이번에 우리 영지에 마법사를 영입하면서 만든 것이지요."
"마법 연구소라고요. 흐음~"
마법 연구소라는 말에 엔나 남작이 눈에 실망이 어렸다. 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나 기사들을 잔뜩 대동하고 온 것을 보면 엔나 남작은 마법사에 별로 호의적인 인물은 아닌듯했다.
하지만 엔나 남작을 따라온 한 노인이 흥분하며 내게 말했다.
"왕도나 마탑에서도 저런 건 본 적이 없습니다. 마법 연구소가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누구?"
"앗. 죄송합니다. 엔나 남작님을 모시고 있는 마법사 겐드리라고 합니다."
자신의 무례를 사과하는 겐드리에 엔나 남작이 말했다.
"큼- 저희 마법사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마법사라면 마법 연구소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테니 이해합니다."
"제 마법사의 무례를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그럼 오늘 제가 아렌달을 찾게 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일단 영주성으로 들어오시지요.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영지를 지나는 상인들에게 들으니 아렌달이 많이 변했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예. 아까 지나온 도로만 해도 잘 만들어진 것이 말을 달리기에 아주 좋더군요."
도로 공사를 한 이유가 바로 수레와 마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단이 조금이라도 빠르게 영지로 들어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도로를 만들어 놓으면 그쪽 길을 이용하기 때문에 외부의 유입을 관리하기도 훨씬 편했다.
비밀이 많은 아렌달이었으니 외부의 유입은 철저히 관리해야 하니까 말이다.
"차후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달려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제 영지에서 새로운 도로 공사를 하게 되면 아렌달에서 공사법을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렌달의 도로와 연결을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외부 영지와 도로가 연결된다면 타 영지나 왕도로의 이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길이 있다면 상인들도 더 많이 아렌달을 찾을 테니 도로 기술쯤이야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아렌달에는 기사가 무척 적어 보입니다."
엔나 남작을 호위하기 위해 온 기사만 10명이었다. 그에 비하면 8명밖에 안 되는 아렌달은 분명 기사의 숫자가 부족한 편이었다.
아렌달이 변경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병력이 부족한 것은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기사를 영입하기가 쉽지 않아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아직 영지에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기사의 숫자도 늘려갈 계획입니다."
"하하- 기사가 부족한 것은 단순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군요. 저는 혹시나 아렌달 백작께서 기사의 중요성을 모르고 마법사만 대우해 주는 줄 알았습니다."
엔나 남작 본인이 기사여서일까. 그의 말투에는 은연중 마법사를 깔보거나 기사의 뛰어남을 이야기하는 게 많았다.
"사실 저는 앞으로 기사단을 만들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