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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5화 (5/169)

5화

"백작님이 오늘 밤 스톨 영지를 떠나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저를 어떻게 해서든 백작님 방에 밀어 넣을 거예요.

다른 방법은 없어요. 무조건 오늘 스톨을 떠나주세요."

"흠- 이 문제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겠어."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내 말에 샤를로트가 고개를 저었다.

"진지하게 생각하실 문제가 아니라 당장 영지를 떠나야 한다니까요!"

"앞으로 스톨 백작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설마 제가 마음에 드신 건가요?"

갑작스러운 샤를로트의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잊었다. 그리고 싫은 티 역력한 샤를로트의 표정을 보며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 표정은 뭐야?"

그런데 당황하는 내 모습에 샤를로트는 더욱 내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역시. 남자라면 저같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죠. 백작님의 마음은 당연하게 생각해요."

"헤돈경. 이 꼬맹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미안하지만 저는 백작님의 청혼은 받아줄 수 없어요. 아까 말했듯이 저는 도시로 시집을 갈 생각이니까요."

샤를로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사과하는 얼굴로 고개까지 숙이니, 마치 내가 정말로 샤를로트에게 청혼이라도 한듯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백작님께서 꼭 제 마음을 알아주시길 바랄게요."

그리고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헤돈경.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겠어?"

"아무래도 영주님께서 까이신 것 같습··· 죄송합니다."

"그래서 스톨 백작이 아렌달을 집어삼키려는 이유는 변경백의 자치권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아렌달에는 특별히 자원이나 특산물도 없고, 인구도 적어 노동력도 스톨에 비해 부족합니다. 금광을 가진 스톨에 아렌달의 경제력이 더해져 봐야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도 되지 않고요."

"그렇긴 하지."

무엇하나 스톨 영지보다 나은 게 없는 아렌달이었다.

변경백이라는 특수성으로 아렌달이 가지고 있는 자치권을 빼면 정말 스톨에서 아렌달을 탐낼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영주님께서 스톨 백작에게 영지를 빼앗길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스톨 백작에게 기회를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영주님께서 샤를로트 양에게 마음이 있으시다면···"

"거기까지."

"크흠- 죄송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으시다면 샤를로트양의 말대로 오늘 스톨 영지를 떠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자하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 저는 정치는 잘 몰라서···"

"그래. 마법사가 정치를 알 필요는 없지."

정치에 대해서는 정말 하나도 모르는 자하는 무시하기로 하고, 나는 헤돈과 조금더 이야기를 나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톨 백작에게 인사는 남겨야겠지?"

"제가 남아서 인사를 전하겠습니다. 영주님께서는 먼저 영지로 돌아가십시오."

"그래도 되겠어?"

"저는 영주님의 기사입니다."

정말 충성스러운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헤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생처음으로 야반도주를 한 나는 동이 틀 때쯤이 되어서 아렌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스톨 백작이 조금 불쾌해했지만, 헤돈 역시 큰 문제 없이 아렌달로 돌아와 이웃 영지와 마찰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다.

'다음부터는 왕도에 가더라도 스톨 영지는 피해서 가야지.'

왕도에서 빌려온 4만셀링의 돈을 제일 먼저 투자한 곳은 바로 물이었다.

"농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흙과 빛, 그리고 물이지!"

지금 당장 농지를 더 개간해봤자 심을 농작물도 없다. 물길부터 터서 농지에 물을 대기 쉽게 공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영지민을 데리고 아렌달에 물을 공급해주는 구스강 유역에 서 있었다.

"리오. 구스강이 어디에서부터 흐른다고 했지?"

"가톤 영지에서부터 기르만, 스톨을 지나 아렌달으로 들어옵니다. 물론 아렌달에서 멈추지 않고 바깥까지 흘러가 그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길고 수량도 풍부한 강이라는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강의 폭이 넓지 않지만, 이렇게 길게 흘러가는 강은 절대 수량이 풍부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중간에 물길을 터서 조금 물을 빼도 강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볼튼경. 삽 가지고 와."

"예! 여기 있습니다."

볼튼에게 삽을 건네받은 나는 기다리고 있는 영지민들을 돌아봤다.

"그동안 강에서 물을 끌어 오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했다. 앞으로 농지를 개간하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쉽게 끌어올 수 있는 물이 필요해."

내 말에 나이가 있는 영지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뜨는 첫 삽은 단순히 흙을 뜨는 것이 아니다. 이건 앞으로 아렌달에 가져올 풍요로움을 위한 삽이다. 아렌달의 영지민들이여. 이제 우리도 배부르게 먹자."

내 연설에 영지민 일부가 눈물을 훔쳤다. 참으로 감동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차츰 그 감동이 끝나갈 때쯤 나는 손에 쥔 삽을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힘차게 땅에 꽂으며 외쳤다.

"공사 시작!"

"후! 하! 후! 하!"

힘찬 기합과 함께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영지민들이 땅을 파는 것이다.

"리오. 목재는 얼마나 남았지?"

"지난번 새 농지를 만들면서 쌓았던 목재는 거의 다 떨어졌습니다."

"벌써?"

"영주님 지시대로 물길을 만들면서 말뚝을 박는데 많은 양을 사용했습니다."

철심이 있다면 대충 코어 몇 개 박아넣어서 지반을 붙잡으면 되겠지만, 아쉽게도 철은 귀한 자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목재를 말뚝으로 때려 박았더니 이렇게 금방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무를 더 베어와야 하는 건가?"

"농사를 짓고 있는 영지민을 투입해서 나무를 베어오라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어차피 물길을 터서 저수지를 만드는 것도 농사를 위한 일인데 농사를 짓는 영지민을 빼 올 필요는 없지. 그렇게 급한 작업도 아니고."

"그럼?"

조심스레 묻는 리오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헤돈이랑 자하 불러와."

"영주님! 마법사에게 나무를 베라니요! 어찌 마법사에게 한낱 나무꾼의 일을 시키려는 겁니까?!"

리오에게 불려온 자하가 불평을 했다. 하지만 기사들은 이미 익숙한지 하나둘 자신의 손에 맞는 도끼를 찾아 들고 말했다.

"영주님. 싹 다 밀어버려도 괜찮겠습니까?"

"보, 볼튼경?"

"역시 볼튼이야. 내 마음을 잘 알아."

"하핫!"

내 칭찬에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달려나가는 볼튼에 자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아렌달의 기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럼 그냥 놀려고? 이럴 때 모범을 보여야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거다.

자하는 특별히 도끼를 들지 않아도 좋아. 대신 마법으로 기사들이 베어오는 나무들을 전부 저기 수레에 싣도록 해."

"크헉! 영주님 그게 더 힘든 일이지 않습니까?"

"마법은 배웠다가 어디에 쓰려고!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거 아니야?"

"아닙니다!"

소리를 빼-액 지르는 자하에 나무를 베던 기사들이 시선을 돌렸다. 충성스러운 기사들답게 감히 영주님께 반기를 드는 마법사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

결국, 이날 자하는 마력이 고갈되어 코피를 흘릴 때까지 나무를 수레에 옮겨야만 했다.

"말뚝을 왜 빼고 있어!"

내 목소리에 수로의 말뚝을 빼고 있던 영지민들이 화들짝 놀라며 수로에서 올라왔다.

"리오. 이쪽 공사 관리자 불러와."

내 지시에 리오가 수로 너머에서 떼를 붙이고 있던 스톤을 불러왔다.

황급히 달려온 스톤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그, 그것이··· 말뚝을 잘 못 박아서···"

"그래 말뚝을 저렇게 개판으로 박아넣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냐? 자칫하면 지반이 무너진다고 했지?"

"죄, 죄송합니다!"

단단히 욕먹는 스톤에 영지민들도 깜짝 놀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아- 저거 좀 하지 말라니까."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모습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는 내 탓이지.

"다른 말뚝 구해다가 비스듬하게 박아놓고, 그다음에 저기 잘 못 박은 거 뽑아."

"아, 알겠습니다."

내 명령에 스톤이 번쩍 일어나서 영지민들을 끌고 새 말뚝을 구하러 달려갔다.

그 모습에 리오가 내게 말했다.

"영지민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하게 챙겨주시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영주님."

'뭔 소리야?'

"행정관 리오! 앞으로 영주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나무를 베어오라면 도끼를 들고, 땅을 파라고 하면 삽을 들겠습니다."

방금 말뚝을 뽑으려는 영지민을 막아서 이러는 것 같은데, 사실은 공사 잘 못 해서 딜레이 될까 봐 막은 것이다. 공기가 길어지면 하루하루가 손해니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리오 혼자만은 아니었다.

"영주님께서 영지민 하나하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리오에게 실망인데?"

"볼튼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제야 영주님의 하늘과 같은 마음을 알아챈 제가 바보 같군요."

'이 자식들이 사람 부끄럽게 왜 이러는 거야?'

"그만 떠들고 따라와. 아직 봐야 할 곳 많으니까."

갑자기 내 자랑대회를 시작하는 볼튼에 가만히 놔두다가는 길어질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구스강 유역에 영지민들이 다시 모였다.

오늘은 농사를 짓던 영지민들도 다들 모여서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영지민들의 시선을 받으며 자하에게 손짓했다.

자하도 오늘만큼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우고 내 신호에 맞춰서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여 붉은빛으로 모두 태우리라. 익스플로젼!"

-쾅!

"와우!"

땅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자하의 폭발 마법이 수로를 막아 놓은 흙벽을 터트렸다. 그리고 마법으로 인해 튀어 오른 물기둥이 땅으로 떨어질 때 수로를 따라 강물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물! 물이 흐른다!"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른다! 저수지에 물이 들어온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영지민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수지로 흘러들어오는 강물에 환호했다.

"우리 마을에도 저수지가 생겼다."

"영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셨다!"

"영주님 만세! 영주님 만세!"

나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영지민에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 응답에 영지민들은 더 환호했고, 일부 노인들은 땅에 머리를 숙여 가며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이 맛에 권력을 가지려 하는 건가?'

나에게 토목공사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냥 굶어 죽지 않을 직업이라 생각해서 토목을 배웠고, 공사판에 들어갔으니까.

그런데 막상 이렇게 작은 공사 하나에 환호하며 기뻐하는 영지민을 보자 내가 가진 지식이 어쩌면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더 큰 공사가 하고 싶어졌다.

'그럼 다음에는 댐이라도 만들어볼까? 아니야. 상수원이랑 하수처리장이 먼저인가?'

"헤돈경. 그만 돌아갈까?"

"그러시겠습니까? 영주님."

"그래. 우리는 성으로 돌아가고 저수지의 첫날은 영지민들에게 양보해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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