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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현대인-4화 (4/169)

4화

"그대가 날려버린 건물과 그대의 목숨을 구하는데 내가 돈을 조금 사용했지."

"네? 도, 돈이요?"

"그래. 만약 그때 내가 그대를 구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렇게 나와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을 거야."

"가, 감사합니다."

자하는 자신의 목숨을 내가 구해줬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당황하며 말했다.

"그, 그렇지요. 영주님께서 저의 생명의 은인이셨지요. 생명의 은인께 부담을 드릴 수는 없는 법.

저는 300셀링이 아닌 2, 250셀링으로 충분합니다. 하핫!

그리고 영주님께서 저를 대신해 사용하신 자금 역시 열심히 일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호오~ 방금 그 말이 정말이야?"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하에 나는 손뼉을 쳐주었다.

내 손뼉에 자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내게 물었다.

"그, 그런데 저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이렇게 훌륭한 마법사를 구했는데 얼마가 중요한가? 그대의 몸값에 어울리는 만큼 사용했지."

"제 몸값이요?"

이걸 좋아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자하에 내가 대답해 주었다.

"내가 생각한 그대의 몸값은 1만 셀링이야."

"크엌!! 1만 셀링이라니요!!"

주점 주인에게 준 금액에 딱 백배만 뻥튀기했다.

나는 입에 거품을 무는 자하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나는 그대가 1만셀링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대가 말했듯이 열심히 일해서 꼭 갚도록 해."

"크- 크억! 말도 안 됩니다. 어찌 제 몸값이 1만 셀링이나 한단 말입니까?"

"고대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인데 1만 셀링도 부족하지."

다시 한번 거품을 무는 자하에 나는 국왕에게 돈을 빌렸던 사실을 말했다.

"이것 보라고. 국왕에게 5만셀링의 돈을 빌렸는데 4만셀링 밖에 없잖아?"

"그, 그럴 수가."

"믿기 어려우면 왕성에 가서 국왕에게 물어보라고. 아렌달 백작이 얼마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지."

"······"

거짓이 아니다. 분명 나는 5만셀링의 돈을 빌려달라고 말했다. 실제로 받은 돈이 5만셀링이 아닐 뿐이지.

"3, 300셀링씩 1만 셀링을 갚으려면···"

"잠깐만, 조금 전에 250셀링만 받는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러면 1년에 1천 셀링. 나를 위해 딱 10년 동안만 일해주면 될 거야."

"그럼 돌아가 볼까?"

"모시겠습니다. 영주님."

내 말에 헤돈이 앞으로 나서 말을 이끌었다.

10년간 무급으로 일해야 한다는 말에 자하는 도망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헤돈의 감시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결국, 내 뒤에서 말을 따라오고 있었다.

"헤돈경. 돌아가는 길은 조금 더 빠르게 갈 수 있어? 왕도로 오는 길은 너무 빙빙 돌아서 조금 시간 낭비를 많이 했잖아? 이번에는 가지고 있는 셀링도 많아서, 빨리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

"그럼 다른 영지를 가로질러서 아렌달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른 귀족들에게는 조금 양해를 구해서라도 빨리 돌아가자고."

헤돈은 내 지시에 새로운 영지에 들어설 때마다 앞서가며 영주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영주님. 스톨 백작님께서 영주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는 스톨 영지에서 하루 묶고 가시는 게 어떻냐고요."

"아이씨. 시간 아까운데. 영주의 초대를 거절하면 문제가 생기겠지?"

"아무래도 이웃 영지와 마찰을 빚어서 좋을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빠르게 달리면 오늘 밤에는 아렌달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바로 이웃 영지인 스톨에서 내 발목을 붙잡았다.

"영주님. 그래도 사흘이나 야영을 하셨으니 하루는 스톨 백작님의 호의를 받는 게 어떻습니까? 스톨 영지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깨끗이 씻은 후에 영지로 돌아가는 게 영지민들에게 보이기도 더 낫지 않겠습니까?"

"자하는 영지로 빨리 돌아가는 것보다 맛있는 식사와 휴식이 더 중요한가 보네?"

"아. 아닙니다! 저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오직 영주님을 위해···"

"됐어. 어차피 이웃 영지와 마찰을 빚을 생각도 없으니 스톨 백작의 초대에 응하지."

초대에 응하겠다는 내 말에 자하가 궁시렁거렸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좀 씻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아무리 이세계의 위생개념이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기회가 있을 때는 항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세계의 위생상태는 언제 무슨 병에 걸려서 객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으니까.

"바로 이웃 영지인데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군."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톨 백작님."

"허허허. 초대에 응해줘서 내가 다 고맙네. 아렌달 백작."

스톨 백작은 지금까지 만난 누구보다 든든한 풍채를 가진 귀족이었다. 즉, 내가 만난 이세계 사람 중 가장 뚱뚱하다는 말이다.

'이 사람이야말로 귀족다운 사람일지도···'

"차린 것은 별로 없지만, 많이 들게나."

"감사합니다. 백작님."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새끼 돼지 구이에 닭으로 보이는 삶은 고기. 거기에 딱 보기에도 부드러워 보이는 빵에 은은한 과일 향이 나는 스프까지.

왕도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진수성찬이었다.

나는 이 진수성찬을 보고 옆에 앉은 헤돈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

"헤돈경. 혹시 스톨 영지는 부유한 영지인가?"

"스톨 영지에는 금광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웃 영지에 금광이 있었다고? 내 영지에는 철광산 하나도 없는데? 에라이. X발.'

금광은커녕 철광산 하나만 있었어도 왕도까지 가서 돈을 빌려오지 않았겠다.

나를 이세계에 떨어트린 누군가가 스타팅포인트를 잡아줘도 진짜 개떡 같은 장소를 잡아준 것이다.

"그래. 아렌달 백작은 아직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형편이 되지 않아서···"

"허허허- 변경백이 형편이 되지 않는다니? 젊은 백작께서 지나치게 겸손을 떠는구먼."

'인구 2천짜리 영지가 무슨 형편이 있어? 설마 나를 멕이는 건가?'

당장에 돈이 없어 왕도까지 빌리러 갔다 온 상황에 형편을 따질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내 침묵에 스톨 백작은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흠- 그렇다면 내가 백작에게 어울리는 귀족 아가씨를 소개해줄까?"

"네?"

"아렌달에는 후계자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백작이 잘 못 되면 변경백에 큰일이 생기는 게 아닌가?"

그 말에 내가 침묵하자 스톨 백작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해하지는 말게나. 나는 그저 아렌달 백작과 친분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것이니.

그리고 아렌달 영지는 우리 스톨 영지에도 아주 중요한 곳이지 않은가? 아렌달에 위험이 생기면 우리 스톨도 위험해질 거네."

'아하- 아렌달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이냐?'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몬스터의 침입으로부터 스톨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렌달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웃 영지 간의 친분이 중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백작님께서 이렇게 염려를 해주시니 걱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식사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흠- 맛있게 먹었다니 다행이네."

나는 대충 식사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톨 백작은 아직 한참 부족한 듯 돼지 다리를 뜯으며 내게 말했다.

"혹시 짝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게. 좋은 짝을 소개해 줄 테니 말이야."

"스톨 백작께서 영주님을 좋게 보신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방금 그 말이 날 좋게 본 말이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영주님께 어울리는 짝을 찾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영주님과 좋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냥 우리 아렌달이라는 방벽이 필요한 것 아니야?"

아무래도 헤돈은 스톨 백작의 말을 나와 다르게 해석한 듯하다.

"나는 그냥 안부를 묻는 인사 정도로 생각했는데."

"영주님. 귀족이 중매를 서는 것은 자신의 명예도 걸려있는 일이기에 아무에게나 중매를 서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명예보다는 실리가 중요한 삶을 살아서인지 귀족으로서의 명예라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건가? 그럼 스톨 영지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군."

"그렇습니다. 영주님. 앞으로 종종 스톨 영지에 인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헤돈의 조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아렌달의 영주인가요?"

스톨 백작이 내준 방으로 가는 내 앞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뭐지? 이 당돌한 꼬맹이는?"

"꼬맹이라니! 숙녀에 대한 예의가 없군요."

나는 눈앞에 꼬맹이의 말에 헤돈에게 말했다.

"혹시 스톨 백작에게 딸이 있었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자식이 10명이 넘을 텐데요."

"와우!"

금광을 가진 영주님은 참 능력도 좋구나.

"다시 한번 묻겠어요. 당신이 아렌달의 영주인가요?"

"그래. 내가 아렌달의 영주다. 그러는 너는 누구지?"

"칫. 역시 그렇구나."

'영주라는 내 신분을 듣자마자 혀를 차다니! 정말 당돌하기 짝이 없는 꼬맹이였다.'

"스톨 영지의 샤를로트가 아렌달 백작님을 뵙습니다. 스톨 백작의 여섯째 딸입니다."

뭔가 순서가 잘못된 것 같지만 예법에 따라 인사하는 샤를로트였다.

"그래서 스톨 백작의 딸이 홀로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지?"

"잠시 저에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니까 스톨 백작이 너를, 아니 샤를로트 양을 오늘 밤 내 방에 밀어 넣을 계획이다?"

"네."

샤를로트가 손톱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 딱 보기에도 싫은 티 가득한 얼굴이다.

"샤를로트 양이 지금 몇 살인데?"

"14살이요."

'이제 겨우 14살짜리 여자애를, 그것도 자기 딸을 성인 남성의 방에 밀어 넣는다고? 스톨 백작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아직 내 남녀관계에 대한 개념이 이세계에 물들지 않아 참으로 다행이었다.

"헤돈경. 아까 스톨 백작이 귀족아가씨를 소개해준다고 했던 게 자신의 딸인가 본데?"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이 경우도 나를 좋게 생각해서 그러는 건가?"

"······"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헤돈의 모습에 샤를로트가 대답했다.

"아버지는 저를 백작님께 보내서 아렌달 영지를 집어삼키고 싶어 하세요."

"!"

아까 헤돈의 조언으로 스톨 영지는 좋은 이웃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샤를로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 영지를 날름 삼키려는 최악의 이웃이었다.

"잠깐. 샤를로트양은 스톨 백작의 딸인데 왜 그 사실을 나에게 알려주는 거야?"

"그게···"

내 물음에 샤를로트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끌었다. 하지만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인지 눈을 똑바로 뜨고는 말했다.

"저는 시골 영지에 시집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뭐?"

"아렌달은 시골이잖아요. 그것도 베르겐 왕국에서 제일 변방에 있는 시골 중에서도 제일 시골 영지."

시골 중에 시골. 샤를로트의 말 그대로 아렌달은 깡촌이었다.

"저는 시골이 싫어요. 시집을 가야 한다면 무조건 도시로, 왕도로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백작님이 원하신다고 해도 저는 백작님의 신부가 될 순 없어요."

이 당돌한 꼬맹이 좀 봐라. 영지의 주인인 나를 앞에 두고 내 영지를 있는 힘껏 까버렸다.

하지만 나도 14살짜리 꼬맹이랑 결혼할 생각은 없다.

14살이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 아닌가? 이건 아무리 이세계라고 해도 내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밖이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샤를로트에게 말했다.

"하아-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되지?"

"도망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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