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왕도는 역시 왕도였다.
아렌달이나 오는 길에 지나온 영지와 확연히 다른 도시의 냄새에 나는,
"우엑!"
도시의 냄새에 내 속이 뒤집어지고 말았다.
'이세계는 기본적인 위생의 개념이 없는 거냐?'
그래도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법.
이 악취에도 적응이 된 것인지 왕성에 도착할 때쯤 되니 숨을 쉬는 것도 제법 괜찮아졌다.
'다음에 왕도에 올 때는 마스크라도 만들어서 와야겠어.'
"멈춰라!"
경비병의 창 내 걸음을 잡았다.
"아렌달 변경백이시다. 창을 거둬라!"
"앗! 죄송합니다."
경비병은 내 신분을 확인하고는 급히 안쪽에 알리기 위해 들어갔다. 그리고 곧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나를 안내했다.
"아렌달 변경백께서 왕도에 오신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내 기억에는 경비대장이 없는데?"
"아- 제가 알고 계신 분은 아버님이신 선대 변경백이십니다. 5년 전 왕도에 오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경비대장의 말대로라면 아렌달 백작은 5년 만에 왕도에 온 것이다. 아무리 변경백이라지만, 5년이나 중앙에 오지 않았다니? 아렌달이 얼마나 중앙 정치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가 국왕에게 돈도 못 빌리는 거 아니야?'
세금도 안내는 변경 영주가 국왕에게 5년 동안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으니, 아렌달의 존재를 잊고 잊었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시종이 부르러 올 겁니다."
"고맙네."
경비대장이 안내해준 왕궁의 별실은 손님을 위한 장소인지 제법 관리가 잘된 곳이었다.
"그래도 베르겐은 가난한 왕국은 아닌 것 같네."
"베르겐이 군사적으로 조금 약하기는 하지만 동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드는 왕국입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몬스터 때문에 소모되는 자원만 없었다면 조금 더 강국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호오~"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왕국이라는데 아렌달 영지는 왜 그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때 경비대장의 말처럼 시종이 우리를 부르러 왔다.
"아렌달 백작님. 국왕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럼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나보다 높은 사람을 한번 만나볼까?'
"국왕 폐하. 아렌달 변경백입니다."
"들라 하라."
화려한 백색의 문이 열리자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온화함 속에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이 절대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다운 힘이 느껴졌다.
"아렌달의 데우스 아렌달이 국왕 폐하를 알현합니다."
헤돈에게 배운 귀족의 인사를 하며 접견실 안으로 들어가자 목소리만큼이나 인상적인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이 사람이 베르겐의 국왕인가?'
"가까이 오도록."
"감사합니다. 국왕 폐하."
보고서를 검토하던 국왕은 내가 한쪽에 마련된 소파에 앉자 펜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이거 완전 면접 보는 느낌인데.'
처음 회사에 들어갈 때 면접을 보던 게 생각난 나는 살짝 긴장하며 국왕의 말을 기다렸다.
"1년에 한 번 연락이 올까 말까 한 아렌달 백작이 직접 왕도까지 오다니. 도대체 이 왕도까지 무슨 일인가? 몬스터의 침입이라도 있었던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국왕 폐하."
"그러면 다른 영지와 분쟁에라도 휘말린 것인가?"
"그것도 아니옵니다."
아렌달은 변경백이라 자치권도 가지고 있고 세금도 안 내니, 몬스터의 침입이나 분쟁에 휘말린 게 아니면 이렇게 왕도에 올 일이 없다는 게 사실이다.
국왕이 내게 보이는 호기심은 특수한 일이라도 벌어졌는지 궁금한 것이다.
"국왕 폐하께 부탁이 있어 이렇게 왕도를 찾았습니다."
"부탁?"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돈을 빌리기 위해서입니다."
재미있는 보고라도 있을까 기대했는지 국왕의 얼굴에 실망이 드러났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라도 가지고 온 줄 알았더니 겨우 돈을 빌리기 위해서 왔다는 말인가?"
더 이상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툭 뱉은 국왕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렌달은 몬스터의 침입을 받는 변경백입니다. 그만큼 영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물론 세금을 면제받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어째서지?"
국왕의 말은 귀찮지만 들어준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반응 많이 봤지.'
공사판에서 흔하게 보는 표정이다. 공사 용품을 발주할 때마다 볼 수 있는 갑의 표정이 딱 이 표정이었으니까.
나는 그런 갑을 설득해서 물건을 받아와야만 했던 현장 관리자였고 말이다.
"먼저 아렌달은 현재 돈이 없어서 정규군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언제 몬스터가 침입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규군이 없다는 것은 영지의 방어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일부 영지민을 정규군으로 만들면 되지 않은가? 변경백에 자치권을 준 것은 그것을 위해서네."
"물론 그 말도 맞습니다만, 아렌달은 그 부분조차 쉽지 않습니다.
겨우 2천 명의 영지민으로는 농지를 꾸리는것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군사를 추려 농지의 일꾼을 줄인다면 당장 먹을 것이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내 이야기에 흥미가 생긴 것 같다.
"또한, 군사를 만들어도 그것을 유지할 비용이 없습니다.
국왕폐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아렌달에는 자원이라는 게 없습니다. 광산도 없고 특산품도 없으니 다른 영지에 팔아 영지의 창고를 채워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는 실정입니다."
아렌달에 정말 아무 자원도 없다는 건 몰랐던 눈치다.
"때문에 영지를 발전시키기 위해 투자를 하고 싶어도 투자할 돈이 없는 상황입니다."
국왕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지금이 쐐기를 박을 기회였다.
"만약 국왕 폐하께서 저에게 5만 셀링의 자금을 빌려주신다면 2년 안에 이자까지 붙여서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렌달 백작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방계이지만 베르겐의 왕족으로 국왕 폐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저를 믿고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역시 줄 중에 최고는 줄은 혈연이지."
며칠의 시간을 두었지만, 국왕은 아렌달에 돈을 빌려주기로 했다. 아쉽게도 내가 말했던 5만셀링이 아니라 4만셀링에 불과했지만, 처음부터 그 금액은 내가 크게 불렀던 금액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자금이었다.
"그럼 이번엔 영지에 필요한···"
-쾅!
순간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영주님 피하십시오!"
헤돈이 급히 나를 보호하며 앞을 막아섰다.
건물 한쪽이 그대로 날아갈 정도로 폭발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자, 잠시 후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멱살이 잡힌 채 끌려 나왔다.
"이 미치광이가 도대체 내 주점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치광이라니. 나는 진리를 탐구하는···"
"진리는 내 주먹이 진리다. 이 미치광이야!"
"크헉!"
주점 주인에게 신나게 얻어터지는 남자를 보며 헤돈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폭발을 일으킨 범인이라면 혹시 마법사일까?"
"영주님? 설마 저 미치광이 마법사를 아렌달에 영입하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영지에 마법사 한 명 정도는 있는 게 좋지 않겠어? 국왕에게 돈도 빌렸으니 영지에 필요한 일꾼도 구해야지."
"대낮에 주점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위험한 자입니다. 차라리 국왕 폐하께 필요한 일꾼을 내어 달라고 하시는 게···"
"그럼 그건 국왕의 사람이지 내 사람이 아니잖아?"
국왕에게 사람도 빌릴 거였으면 돈을 빌리면서 같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는 국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번 구해서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지금 구해주면 생명의 은인이라고 공짜로 영입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크헉! 살려주시오!"
여전히 얻어터지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말하자 헤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그를 구해주기 위해 다가갔다.
"너는 뭐야! 너도 이 미치광이랑 한패냐!"
주점 주인은 다가오는 헤돈에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헤돈은 마법사와 다르게 주점 주인의 주먹을 쉽게 피하고 말했다.
"나는 아렌달 변경백의 기사인 헤돈이다."
"어이쿠- 기사 나으리. 제가 몰라뵙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는 주점 주인에 헤돈이 말했다.
"내 주인이신 아렌달 백작께서 이 마법사에게 관심을 보이셔서 그러는데 내가 이 마법사를 데리고 가도 되겠는가?"
주점 주인은 귀족의 호출이라는 말에 당황하며 날아간 자신의 주점을 보며 울상을 지었다.
나는 그 모습에 다가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점 주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마법사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이 돈은 위로금으로 생각하게. 아니면 이 마법사의 목숨값으로 생각하던가."
"100셀링 밖에 안 되는데요?"
"미치광이의 목숨값으로 100셀링이면 과하지."
어차피 날아간 벽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귀족이 나서서 위로금까지 주는 상황에 주점 주인이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주점 주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100셀링에 기절한 마법사를 나에게 내어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만 일어나지?"
마법사가 전에 정신을 차린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아마 눈치껏 도망칠 타이밍을 찾고 있었겠지만, 마법사가 기사의 감시를 피해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있나?
"큼-"
슬며시 눈을 뜨며 목을 가다듬는 마법사에 내가 말했다.
"나는 아렌달 변경백의 주인 아렌달 백작이다."
귀족이라는 말에 마법사가 놀라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저 모습을 보니 마법사지만 귀족의 신분은 아닌 것 같다.
"고개를 들어도 좋아."
"배, 백작님께서 저를 어째서···"
"그대가 마법사로 보이기 때문이지."
내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눈을 빛냈다. 귀족이 마법사를 찾는다는 말은 곧 영입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빳빳이 든 마법사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옳게 보셨습니다. 백작님. 저는 마탑에서 수행한 마법사 자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하는 자신의 가치를 광고라도 하려는 듯 마탑에서의 수행과 자신이 어떤 마법들을 쓸 수 있는지 떠들기 시작했다.
"특히 저는 마법진에 대한 공부가 깊어 다양한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단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듯 내 앞까지 무릎으로 기어와 말했다.
"사실 백작님께만 말씀드리는 비밀이지만, 저는 마탑에서 고대 마법진도 공부를 해서 마나석만 충분하다면 고대 마법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고대 마법이라니? 우연히 주운 마법사치고는 능력이 있나 본데?'
"하핫! 하지만 제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저를 발견하신 백작님의 혜안에는 한참이나 부족할 겁니다."
자신의 자랑과 함께 나를 띄워주기까지 하는 자하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큼큼-그래서 저를 영입하시면 제게 얼마나 지원을···"
"내가 들으니 마법사들의 녹봉은 보통 200셀링 전후로 책정이 된다고 하던데."
"하아- 백작님 방금 말씀드렸지만, 저는 고대 마법진도···"
"그래.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에게 겨우 200셀링의 녹봉을 줄 수는 없지."
내 대답에 자하의 눈이 다시 한번 빛났다.
"역시 백작님이십니다. 이렇게 훌륭한 백작님을 만나게 해준 테이아 여신에게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여신의 이름까지 거론하는 자하의 모습에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대에게 100셀링을 더해 300셀링의 녹봉을 주도록 하지."
"허억! 300셀링이라니!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영주님."
기사도 아닌 마법사가 충성을 다하겠단다. 나는 그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마법사 자하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