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제가요?"
"그러면? 놀려고?"
내 물음에 헤돈이 다른 기사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도 기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다들 도끼 하나씩 잡아."
내 명령에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영주님. 어찌 기사가 검이 아닌 도끼를 들겠습니까?
그것도 주군을 지키는 것이 아닌 나무 베기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대의 이름이?"
"기사 볼튼입니다."
"그래 볼튼경. 그렇다면 그대는 기사로서 충성을 맹세한 주군의 명령을 거부하는 것인가?"
"그, 그것은···"
당황하는 볼튼에 나는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
"그대의 도끼질 한 번에 아렌달의 농지가 생기는 것이다. 빈궁한 아렌달에 그대의 손으로 풍요로움을 불러올 기회인데 그대는 기사가 되어서 영지의 어려움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생각인가!"
"아, 아닙니다!"
내 장황한 협박에 볼튼이 재빨리 도끼를 주워왔다.
"좋아. 그럼 더 하고 싶은 말 있는 사람은 없지?"
"······"
"침묵은 긍정이지. 기사들 투입!"
기사들은 역시 고급인력이었다.
일반 영지민들의 도끼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고 빠른 도끼질에 나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며 외쳤다.
"거기 다 밀었으면, 다음은 저쪽이다. 빨리빨리 밀어버려."
"화전을 일구실 생각이셨으면, 굳이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니었습니까?"
농지만 만들 거면 상관없지만, 나는 그냥 농지만 넓히기 위해 숲을 밀어 버린 게 아니다.
목재라는 자원을 얻기 위함도 있었다.
'목재는 공사에 필요한 자원인데 그냥 태워 버릴 수는 없지.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농지를 넓혀서 식량의 생산량을 늘린다고 영지가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농지뿐 아니라 위생이나 교통, 교육 등 최소한의 생활 기반이 이루어져야 사람이 살만한 영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가진 지식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한 기반이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현대 문명의 첨단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봐야 이곳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은 거의 없었다.
'기껏 해봐야 짧은 농업 지식이나 쓸 수 있겠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곳은 봉건사회였고, 나는 봉건사회의 지배자인 영주라는 것. 적어도 이 아렌달에서 만큼은 절대권력을 가지고 얼마든지 난장을 피워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헤돈경. 그대는 기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영주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주인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국왕 폐하와 베르겐 왕국을 위해 영지를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래 영지를 훌륭히 관리하는 것이지."
국왕이나 왕국은 모르겠지만, 영주라면 영지를 잘 관리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영지를 훌륭하게 관리하기 위해 영민을 배부르게 하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며, 새로운 문물을 도입해서 발전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
내 대답에 헤돈은 감격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께서 그렇게 훌륭하신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 몰랐습니다. 저는 영주님의 기사로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헤돈의 입에 발린 말을 들으며 나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당장 나가서 나무나 더 베어오게나."
"이야~ 잘 탄다."
타닥타닥 불길이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감자나 한 알 던져서 구워 먹고 싶어졌다.
'근데 이 거지 같은 영지는 어떻게 감자밭도 없냐?'
화전이 만들어지는 모습에 영민들도 기대하는 눈빛으로 숲이었던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빛에 볼튼에게 말했다.
"볼튼경. 어때? 그대가 열심히 나무를 베어준 덕분에 이런 농지가 생겼는데."
"영주님의 힘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저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 볼튼경 같이 충성스러운 기사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내가 던지는 치하의 말에 볼튼은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기사 볼튼. 영원히 영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아니- 죽어서도 영주님의 기사가 되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나에게는 충성스러운 기사 볼튼보다 감비아 삽질왕 오마르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충성 맹세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새로 만든 농지는 어때? 농사를 짓기에 불편한 점이라도 있나?"
내 물음에 마을 촌장이 땅에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불편한 점이라니요. 영주님의 은혜 덕분에 농사를 지을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농사에 성공해서 영주님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아- 그거 하지 말라는 데도···"
땅에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데도 바뀌지는 않는지 촌장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도 밀을 심은 거지?"
"그렇습니다. 영주님."
"그렇다면···"
나는 촌장의 대답에 농지로 걸어갔다. 멍하니 내 움직임을 바라보던 촌장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나는 밀밭을 달리기 시작했다.
"영주님!"
"으악!! 밀밭이! 영, 영주님을 막아!"
기사들은 갑자기 날뛰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는지 순간 멈춰 섰지만, 촌장과 영민들은 깜짝 놀라며 허둥지둥 당황하며 나를 쫓아왔다.
"헤돈경! 볼튼경! 빨리 들어와서 그대들도 밀밭을 뛰어다니도록!"
"여, 영주님. 기사님. 안됩니다!"
내 명령에 촌장이 기겁하며 기사들을 말리려 했지만, 기사를 막을 수는 없는 법.
결국, 기사들도 나에게 동참해 밀밭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충분히 밀밭을 뛰어다닌 후,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촌장에게 다가갔다.
"허- 허허- 밀밭이··· 새 농지가···"
"촌장.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예? 생각이요? 밭을 망치시려고 뛰어다니신 게 아닙니까?"
기껏 만든 밀밭을 내가 왜 망치겠는가?
눈동자의 초점이 돌아오는 촌장에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밀을 잘 키우기 위한 농법이라고."
"예?!"
이삭 밟기라는 농법이 있다. 답압이라고도 하는데, 군대에서 대민지원을 나갔다가 마을 아저씨한테 배운 짧은 농업 지식이었다.
"이삭 밟기라는 고도의 농업기술이지. 추수 때 기대해 보라고. 다른 농지와 이 농지에는 분명 차이가 보일 테니까. 하핫!"
내 설명에도 촌장은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다고 그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영주인 내 말을 믿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돈이 없다고?"
"그, 그렇습니다. 영주님."
"하아-"
내 한숨의 행정관 리오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어째서 돈이 벌써 다 떨어졌지?
분명 얼마 전까지 2천 셀링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그, 그것이 기사들의 녹봉과 사용인들의 급여, 그리고 영주님께서 진행하신 공사 도구를 구매하는 데 전부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영주님."
막상 들어보니 당연히 나가야 할 돈이었다.
영지를 개선하겠다고 확실한 계획도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사업을 벌였더니 벌써 사고가 터졌다. 영지를 발전시키기 전에 내가 굶어 죽게 생긴 것이다.
"그럼 어떡하지?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보물이나 뭐 다른 영지에 팔만한 것 없나?"
"어, 없습니다."
"하아- 그래. 여기는 아무것도 없지?"
있었으면 내가 먼저 찾아서 팔았을 것이다.
'공무과장한테 돈 다루는 일도 배워놨어야 하는 건데.'
나는 현장 관리만 할 줄 알았지 똑바로 돈 쓰는 법을 몰랐다.
"기사들의 녹봉이 다해서 얼마지?"
"다해서 1100셀링입니다."
"사용인들의 급여는?"
"50셀링 정도 됩니다."
"그럼 공사에 나머지 돈을 다 썼다는 말인가?"
어이없어하는 내게 리오가 조심스레 말했다.
"행정관인 저와 나인의 녹봉도 있습니다. 그리고 영주성의 운영비도 생각하셔야···"
"아- 그래. 내가 먹고사는 데도 돈이 들어갔겠지."
"그렇습니다. 영주님."
변경백이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렇게 가난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나가는 공사비용도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확실하게 계획부터 수립하고 영지 개선 작업을 시행해야겠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경제사에 여러 가지 경제 계획이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나 경제개발 5개년 같은 것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교과서에서 슬쩍 봤을 뿐 공대를 나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나에게 사회 경제 수업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충은 어떤 흐름으로 경제 계획을 수립하는지는 알고 있다.
일정한 경제적 목표를 수립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자금을 설정해서 이를 집행하는 것이다.
사실 목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농지를 늘려서 식량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새로운 자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농업을 기초로 한 1차 산업의 기반을 만드는 게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하지만 시간과 자금을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을 투입하고, 공사 도구들을 사 왔으니 결국 사업이 되려다가 말았다.
"리오. 이걸 봐봐."
"이게 무엇입니까?"
"아렌달 개발 3개년 계획."
장황하게 명칭을 붙였지만, 그냥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계획을 나름대로 짠 것이다.
"이걸 영주님 혼자서 만드신 겁니까?"
"그럼 누가 해?"
"영주님은 이런 고급 행정을 배우신적이 없지 않습니까?"
리오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을 보니 데우스라는 놈은 영지 운영에 대한 공부도 똑바로 안 한 것 같다.
검술 수업도 자주 도망쳤다고 하던데. 망나니만 아닐 뿐 영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이런 계획을 수립해 봤으니까 한번 검토해봐."
"네. 알겠습니다."
리오는 내 말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며 내 아렌달 개발 3개년 계획을 차근차근 읽기 시작했다.
"호오~? 어떻게 이런?! 이걸 영주님이?!"
뭔가 하나하나 감탄하는 목소리에 놀람보다는 의심이 더 많이 들어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황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리오였다.
"정말 영주님께서 이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이건 왕도의 행정가들도 수립하기 어려운 계획 같은데."
"당연히 내가 했지. 그래서 우리 영지에서 이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조금 변수가 많긴 해도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나에게 그 말은 계획을 진행 시키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개발 계획을 준비해야겠다."
"하지만 계획을 시작하기 전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실 계획이 십니까?"
리오의 걱정은 당연했다. 계획이 아무리 잘 수립되었다고 해도 자금이 없으면 계획이고 뭐고 시작도 못 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래서 나도 생각한 것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줄.
혈연, 지연, 학연으로 이루어진 단단한 끈. 그중 하나에 매달려볼 생각이다.
"나 방계지만 왕족이라면서? 국왕 폐하한테 빌려야지."
자동차를 몰았으면 몇 시간이면 도착했을 거리를 말을 몰고도 7일이나 걸려서 도착했다.
"빌어먹을. 영지 하나 지나는데 돌아가는 거리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거야!"
도로의 사정이 나쁜 건 둘째치고, 귀족이라도 남의 영지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빙빙 돌아서 왕도에 온 것이다.
"헤돈경. 설마 아렌달은 베르겐의 다른 영주들과 사이가 나쁜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다만?"
"아렌달이 가치 있는 영지는 아니라 무시를 받고 있으신 게 아닌지··· 죄송합니다. 영주님."
'에라이. X발.'
헤돈이 죄송할 게 무엇인가?
아렌달이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영지라는 게 문제지.
그래도 평원 너머로 회색빛의 성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