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나 혼자 현대인@20도 1-169 完
1화
***
"저 새끼는 왜 또 저러는 거야?"
"그냥 지랄하는 거지 무슨 이유가 있겠어요?"
우리 소장님은 오늘도 깨지고 있다.
"김 반장님. 어때요? 오늘 안에 끝낼 수 있어요?"
"저렇게 지랄을 하는데 어떻게 끝내? 오늘도 공쳤어."
"아- 그럼 안 되는데."
내일부터 6라인 작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오늘도 발주사 갑질에 막혀서 공사가 더뎌지고 있다.
오죽하면 현장에 나오지도 않는 우리 소장님까지 나와서 저러고 있을까?
소장님이 직접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데도 빌어먹을 안전과장은 공사에 필요한 승인을 안 내주고 있다.
"아이고. 소장님 뚜껑 열리네."
결국, 우리 소장님이 참지 못하시겠는지 안전과장의 멱살을 잡았다.
"소장님!"
"야. 빨리 떨어트려."
나는 재빨리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려는 소장님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만약 한 대라도 쳤다가는 폭행으로 오늘뿐 아니라 이번 주 공사가 날아갈 뻔했다.
"이 새끼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어어~ 지금 때리려고 한 겁니까? 현장에서 폭력을 써요? 미쳤어요?"
"그래 미쳤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삐걱
"아- 소장님 이거 놓으시고 얘기해요."
"야! 이현수. 이거 안 놔!"
-삐걱
"소장님. 진짜 치면 안 된다니까요."
"내가 저 새끼 한 대 안치면 화병 나서 죽겠다."
"이 새끼 저 새끼. 입에 걸레를 물었나. 협력사 소장이면 소장답게 말 좀 가려서 하세요!"
-삐걱
"뭐라고? 캬악~ 퉤!"
"윽!"
'에이. 더럽게.'
소장님이 뱉은 침이 나한테 다 튀었다.
-삐걱
그래도 한차례 침을 뱉고 나니 조금 화가 가라앉았는지 안전과장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소장님이 참으세요."
"참긴 뭘 참아!"
그래도 한번 떨어트려 놓았더니 다시 달려들지는 않는다.
'아으- 팔 아파. 무슨 50대 아저씨가 이렇게 힘이 좋아.'
그렇게 나는 화를 가라앉히는 소장님의 모습에 안심하며 가설 난간에 팔을 얹었다.
-삐걱
그리고 기분 나쁜 소음을 들으며 나는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
"아으- 겁나게 아프네."
머리가 아프다. 그것도 매우 많이 겁나게 아프다.
통증에 머리를 만져 봤지만, 다행히 피는 안 나는 것 같았다.
가설 난간에서 미끄러져서 떨어졌는데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뭐야? 여기 어디야?"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내가 영주라는 것 같다.
"영주님. 괜찮으십니까?"
내 안색을 살피는 금발 남자의 말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영주님.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는 외국인이라고는 감비아 출신 삽질왕 오마르가 다인데,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 알겠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영주님께서 머리를 심하게 다치신 것 같다."
"머리를 다치기는 했지. 엇?"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에 나 역시도 엄청나게 놀랐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하는 말도 바로바로 이해가 되는 걸 보니 이 언어를 나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영주님. 왜 그러십니까?"
"내 이름이?"
"영주님의 이름이요? 혹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남자의 말에 나는 눈치를 보며 머리를 붙잡았다.
"아으- 머리야! 아무래도 조금 더 자야겠다."
"아, 알겠습니다. 영주님께서 안정을 취하실 수 있게 나가자."
남자의 말에 내 방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나갔다.
전부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확인했다.
초록빛 가득한 숲과 산, 그리고 농지를 보며 생각했다.
"진짜 이세계?"
학창시절 판타지나 무협, 그리고 웹소설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세계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당연히 나도 해봤다.
칼 밥을 먹는 용병이 되어볼까? 생각해 본 적도 있고, 현대 수학을 바탕으로 마법을 배워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막상 이세계에 오고 나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아-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내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게 먼저겠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지나다니는 메이드를 붙잡아 금발 남자를 다시 불러올 것을 명령했다.
"혼자서 오라고 해."
혼자 오라는 지시에 금발 남자는 정말로 혼자 내 방으로 왔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나는 손짓으로 남자를 가까이 부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영주님?"
"당신이 나랑 아주 가까운 사람인 것 같아서 말하는데, 아무래도 내 기억이 다 날아간 것 같아."
"이런!"
"그러니까 내 기억이 돌아올 수 있도록 당신이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영주님.“
다행히 남자는 아주 충성스러운 수하였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럼 내 이름부터 들어볼까?"
아렌달. 베르겐 왕국 구석탱이에 붙어있는 변경 영지 이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아렌달의 영주인 데우스 아렌달이라고 한다.
백작이지만 망나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재수가 없었는지 데굴데굴 구르다가 절벽에서 미끄러졌단다.
따라나선 기사들이 깜짝 놀라 나를 구했을 때는 이미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 했다.
"기억이 날아가신 게 그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그 데우스라는 녀석은 죽었을 거야.'
기억이 날아간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나 이현수가 데우스 아렌달의 몸을 차지한 것이다.
'그럼 이현수도 죽은 건가? 설마 데우스가 내 몸을 차지한 건 아니겠지?'
그럼 어떡하나? 하는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에휴~"
"왜 그러십니까? 영주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계속 이야기 해줘."
나는 베르겐 왕국의 먼 방계 왕족이며 안타깝게도 가족은 없는 것 같았다.
나이는 이제 막 스물.
'10살이나 어려졌네. 이건 좋아.'
금발 남자 헤돈을 포함해 충성스러운 8명의 기사가 있고, 2천여 명의 영지민을 가진 영주란다.
'겨우 2천? 우리 현장 작업자도 그것보다는 많았는데.'
공사판 인부의 숫자보다 못한 영지민이라니. 심지어 나는 변경백이 아니던가? 변경을 지켜야 하는 병력까지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인구였다.
"기사는 그렇다 치고, 그럼 마법사는?"
"마법사는 없습니다."
'이세계답게 마법은 있네. 그래도 영지에 마법사가 없다는 건 아쉬운데.'
영지에 기사는 있는데 마법사가 없는 것을 보니 역시 마법사가 기사보다 더 고급인력인 듯하다.
"영지의 경제력은 어떻게 되지?"
"아렌달은 적은 농지에서 주로 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냥으로 얻어지는 부산물을 파는 정도입니다."
역시 예상대로 이세계는 농업기반의 문명인 듯했다. 그런데 농지가 적다면 세금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세금은? 왕국에 세금은 어떻게 내지?"
"아렌달은 바깥과 영지를 맞대고 있는 변경이라 왕국에 세금은 내지 않습니다."
'변경백이라고 세금도 면제해주는 건가? 이것도 좋네.'
하지만 헤돈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면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만약 세금까지 내게 되면 아마 영지민들은 다 굶어 죽을지도 모릅니다."
"뭐? 설마 농지가 그렇게 적어?"
"영지민들이 겨우 굶주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겨우 굶주리지 않는다는 말에 순간 머리가 확 돌았다.
'이왕 영주를 시켜줄 거면 제대로 된 영지를 줄 것이지. 이따위 영지를 줘?'
"자원은? 영지에 따로 자원은 없어? 광산이나 뭐 특산품으로 삼을 만한 것들은 있을 거 아냐?"
"그게··· 하나도 없습니다."
헤돈의 고갯짓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점점 이세계로 불러들인 누군가에게 욕이라도 날리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에라이. X발.'
헤돈에게 나와 영지에 대한 정보를 얻은 후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영지를 시찰하는 일이었다.
"말은 안 타 십니까?"
'말을 탈 줄 알아야 타지.'
"아직 떨어진 기억 때문에 말은 조금 불편하군."
"앗! 알겠습니다.“
적당한 변명을 둘러대고 헤돈의 안내를 받아 영주성을 나서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윽!"
"영주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계속 가지."
여기저기 뿌려져 있는 오물이나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고인 물을 보니 역시 위생 상태 역시 중세 농경사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농사를 짓는 영지민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땅에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어색하게 바라보며 영지 시찰을 계속했다.
"여기서 더 가면 바깥으로 나가는 황무지입니다."
"바깥이 정확하게 뭐지?"
"바깥은 몬스터의 땅을 말합니다. 영주님. 아직 인간이 개척하지 못한 땅이지요."
"그럼 우리 영지는 다른 왕국과 접경지를 맞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렌달은 동대륙에서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변경 영지입니다."
몬스터의 땅이라는 말에 흥미가 생겼다.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몬스터까지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이 아니던가?
"몬스터가 들어오면 영지군이 막는 건가?"
"영지군은 없습니다."
"변경백인데 영지군도 없어? 그럼 몬스터는 어떻게 막아?"
"몬스터가 출몰할 때마다 자경단을 만들어 방비하고 있습니다."
몬스터의 위협을 받는 영지가 정규군도 없단다.
'진짜 기본에 기본도 안된 영지네.'
나는 한숨과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더 이상 볼 것도 없겠네. 이만 돌아가자."
"자 그럼 종합해보자.
작위는 백작. 영지의 면적은 제법 크지만, 인구는 겨우 2천여 명.
몬스터의 위협을 받을 수는 있지만, 정규군은 없다.
고급인력이라고는 기사 8명과 행정업무를 할 수 있는 행정관 2명.
광산 자원 없고, 특산품도 없다.
에라이. X발."
문명게임하듯 스타팅포인트를 리셋할 수도 없다.
게임도 이렇게 만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욕하고 접는다. 긴급으로 밸런스 패치가 시급한 정도였다.
이따위 난이도로 이세계에 왔는데 특전을 준 것도 딱 하나밖에 없다.
"언어 패치 말고는 아무것도 없네. 씁!"
말도 안 통했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래도 마냥 포기하기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지. 암, 그렇고말고."
나에게도 무기는 있다.
이세계에서 현대인은 천재라고 했던가?
"그럼 현대인 천재론을 한번 증명해볼까?"
"여기부터 싹 다 밀어버려."
"영주님? 진심이 십니까?"
"그럼? 농지가 없다면서 그럼 농지부터 만들어야지. 안 그래?"
내 명령에 헤돈은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충성스러운 기사가 아닐 수 없었다.
"영주님의 명령이다. 나무를 전부 베어라!"
헤돈의 지시에 영지민들이 도끼를 들고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퉁퉁 도끼가 나무를 때리는 소리가 리듬을 만들며 내 기분을 조금 업 시켜주었다.
'역시 나는 공사장 체질이라니까.'
오랜만에 현장의 냄새를 맡으며 살아나는 기분을 느낀 나는 내 곁을 지키고 있는 헤돈에게 말했다.
"도끼 하나만 가지고 와."
"네?"
"도끼. 가지고 오라고."
-퉁 퉁
도끼에서 전해지는 반발력에 근육이 움찔거렸다.
'아으- 데우스라는 놈은 운동이라고는 하나도 안 한 놈인가 보네.'
도끼질 몇 번에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보며 나는 헤돈에게 물었다.
"헤돈. 혹시 내가 운동을 싫어했나?"
"좋아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검술 수련도 자주 도망치셨고요."
"아아~"
어쩐지 팔에 힘이 안 들어가더니.
나는 어쩔 수 없이 헤돈에게 도끼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도끼를 내려놓으려는 헤돈에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기사님들의 도끼질 구경 좀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