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태범과 캐서린의 결혼식 날.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강태범다웠다.
언론은 매 시각 태범의 결혼 소식을 실시간으로 전했고,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며 뜨거운 이슈로 통했다.
하지만 이번 결혼식은 사람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간소하게 치러질 예정이었다.
결혼식 장소는 서해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었고,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주변인들만 불러서 옹기종기 결혼만을 축하할 수 있도록 했다.
괜히 스케일을 키워봤자 축하 자리가 아닌 쇼(Show)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결혼 축하합니다. 이렇게 행복한 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먼 길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첸 씨.”
태범에게 첫 투자의 길을 열어 준 왕첸, 결혼 소식을 듣고 대만에서 한국까지 단번에 날라 왔다.
그는 단순 펀드매니저를 넘어, 펀드사를 따로 설립해 운영하는 번듯한 사장님이 돼 있었다.
“밍밍이가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더군요. 태범 씨가 결혼한다니까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대표님도 눈치채셨을 거예요. 제 딸이 대표님을 좋아했던 거.”
“네……. 알고 있긴 했죠. 뭐, 어쨌든 밍밍 씨 보면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그래도 처음에 절 믿고 누구보다 도와줬던 게 밍밍 씨였으니까요.”
“하하!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났던 첫날을 생각해 보면, 오늘 같은 날이 올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왕첸의 말에 태범은 과거를 떠올렸다.
회계사 새내기 시절, 왕첸과의 첫 만남에서 생겼던 일들, 지금이야 서로가 누구보다 잘났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경계했는지 감회가 새로웠다.
“강태범 대표! 결혼 정말 축하해요.”
태범과 굵직한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결혼식에 찾아와줬다.
이근휘 회장, 이희현 명예회장 그리고 각종 사회 분야의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
결혼식 초청자들만 봐도 어마어마한 거물급 인사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모두 강태범 신랑과 캐서린 신부의 결혼을 축하해 주세요!”
결혼식 진행은 유명 연예인 유재성 씨가 맡아주었다.
유재성과 태범은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으나, 그가 태범의 세포재생기술 덕에 부모님의 건강을 되찾았다며 보답 차원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자발적으로 진행을 맡게 된 것이다.
행진 음악과 함께 태범과 캐서린이 하얀 카펫 위를 걸으며 나타났다.
하늘에서는 드론이 꽃가루를 뿌리며, 딥멀티를 통해 컴퓨터가 작곡한 결혼 행진곡이 조그만 섬을 뒤덮었다.
그리고 모두 힘찬 박수와 함께 둘의 결혼을 축하해 줬다.
* * *
2박 3일, 인도양에 위치한 천국의 섬이라고 불리는 세이셜로 짧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태범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캐서린이 사업적인 일정이 있어 영국으로 가는 바람에 여행 일정은 짧게 끝났다.
태범 역시 아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신사업 진행에 한창 열을 올렸다.
우주산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사업이 출범하지는 않았지만, 데론 머스크와 물밑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특히 TB 금융 투자 내부에서는 우주산업에 투자하기로 합의된 만큼, 앞으로 큰 기대가 됐다.
사업적으로도 완벽했고, 기술에 관한 태범 개인적인 학습도 문제없이 진행됐다.
특히 스캐너를 통해 얻은 스티븐 호킹의 지식은 우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의 천체물리학이 100% 스캔되는 날이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100%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다른 감정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적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없는 게 바로 인간이었다.
마치 어릴 적 충치를 치료하기 위해 치과에 가는 기분, 스캐너로 향한 내 발걸음이 그러했다.
컴퓨터 앞에 앉은 태범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천체물리학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99%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100% 진행되었습니다.]
스캐너는 불빛을 내뿜으며 인물의 능력을 태범에게 스캔했다.
이 불빛이 방사선이라는 걸 알고부터 좀 찝찝하긴 하나, 인생을 바꿔준 스캐너인 만큼 사용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99%에서 100%로 진행되는 순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몸은 강한 전율과 함께 고통을 받았다.
살을 뚫고 뼈를 뒤틀리게 하는 이 고통.
태범은 몇 차례 느껴지는 고통을 겨우 이겨내고 나서야,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방공호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강철로 된 방공호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삐-
고막을 때리는 강력한 환청이 들려왔다.
이번엔 장난이 아니었다.
기절할 것 같은 수준의 강한 소음이었고, 태범은 귀를 강하게 부여 막고는 몸이 저절로 웅크러졌다.
“으…….”
통증을 겨우 이겨내고, 나가려는데 또 다시 통증이라니.
연이은 통증에 태범은 정말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귀를 강하게 붙잡고는 몸을 겨우 이끌고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닫는 순간, 귀를 괴롭혔던 소음이 다시 사라졌다.
“후…….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방공호를 나가자니 미쳐버릴 것 같은 환청이 들려오고, 그렇다고 이 안에만 있을 수도 없다.
태범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방공호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긴장과 함께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방공호 밖으로 발을 옮겼다.
“으!”
여전히 고통이 느껴졌다.
커다란 벌레가 귓속에 들어간 기분이다.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갈까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그러하지 않았다.
태범은 힘겹게 발걸음을 하나씩 옮기며 집안의 침실로 이동했다.
의지가 고통을 이겨낸 것인가, 거실을 지날 때쯤 고통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이 아닌, 희미하고, 알 수 없던 환청이 들렸다. 그것도 완벽한 언어로 말이다.
한국어도, 영어도, 중국어도 아니다.
세상 그 어디서도 듣지 못한 언어였지만, 머릿속으로 이해가 되더니 귀로 들려왔다.
‘내가 정말 미친 건가?’
태범은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곳으로 오라고? 거기가 어딘데!’
* * *
[인공지능을 통한 커플 매칭]
[강아지 언어 번역기]
[인공지능과 대화]
[딥멀티를 통한 무인자동차 설계]
딥멀티 소스로 만들어진 새로운 프로그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생산성 측면에서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태범도 차마 생각하지 못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담긴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뽐내느라 바빴다.
그리고 오늘, 샘성 스마트폰과 연계해 딥멀티 프로그램의 마켓을 개설할 예정이었다.
이는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이었다.
딥멀티의 소스를 공개한 대신에, 이를 통해 만들어진 프로그램은 특정 마켓에서만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건을 만드는 건 자유이지만, 거래는 수수료를 내며 이용하라는 취지였다.
이는 태범의 계획했던 그대로였다.
수익성과 생산성, 둘 모두를 잡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방법.
“이근휘 회장님, 앞으로 딥멀티 기반의 프로그램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마켓의 시장은 더욱 커질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태범 대표가 소스공개를 진행한 게 아니겠습니까? 전 태범 대표가 생각 없이 일을 진행시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이근휘 회장은 태범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있었다.
그런 그의 믿음 덕분에 회의는 순조롭게 끝났고, 앞으로 사업은 계획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태범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던 찰나였다.
이근휘 회장에 제안 하나를 건넸다.
“저기 혹시 개인적으로 시간 좀 있습니까? 바쁘시지 않으면 제가 모시고 갈 때가 있어서요.”
“아니요. 크게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음, 무슨 일이라면 무슨 일일 수도 있고, 아니라면 아닐 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보면 꽤 놀라실 겁니다.”
이근휘 회장의 의미심장은 이야기에 태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근휘 회장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빈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좋습니다. 가도록 하죠.”
태범은 이근휘 회장의 제안을 승낙하고, 회의가 끝내는 즉시 그를 따라 경기도 용인 어디론가 이동했다.
* * *
“어, 저건 제가 그런 그림 아닙니까?”
“맞아요. 제가 모은 강태범 대표 작품만 벌써 6점은 됩니다. 지금도 계속 수집하고 있죠.”
이근휘에 부탁에 찾아온 작품 보관실 안이었다.
한눈에 봐도 진귀한 물건들이 즐비해 있었고, 특히나 눈에 띄는 건 태범이 그린 그림이었다.
통유리로 된 공간 안에 태범의 그림이 보관돼 있던 것이다. 마치 박물관에 전시해 준 것처럼 말이다.
“제 그림이 어디로 갔나 했는데, 다 여기 있었군요. 하하.”
“요즘 태범 대표님 작품 찾는 사람이 여럿입니다. 재테크 수단으로도 적당하고, 가치도 무궁무진한 게 그보다 좋은 작품이 없죠.”
이근휘 회장은 정말 태범에 대한 모든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태범의 광팬을 자처하고 있었다.
“따라오시죠. 더 신기한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근휘 회장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귀한 물건들을 모두 제치고, 단 한 곳을 향해 태범을 안내했다.
보관실 안에서도 정말 깊은 안쪽에 위치한 곳에 달해서야 발걸음을 멈췄다.
태범이 스캐너를 특별한 장소에 보관하듯, 이곳 또한 같은 보관실임에도 특별한 장소였다.
몇 번의 보안문을 통과하고, 지하로 은밀하게 들어가서야 나온 이곳.
“제가 보여드리려고 하는 건 바로 이겁니다. 우리 샘성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죠.”
이곳에는 단단한 강철로 만들어진 보관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강철로 된 보관함이 열리자, 이상한 돌덩이 하나가 나타났다.
평평하고 직각 진 돌이었다.
“이게 뭐죠?”
“석판입니다. 돌을 자세히 보시죠.”
이근휘 회장의 말에 태범은 돌을 자세히 내려다봤다.
“어! 정말 뭐가 쓰여 있네요.”
마치 고대의 문자를 보는 듯, 알 수 없는 문양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적혀 있었다.
근데 이걸 왜 본인에게 보여주는지, 태범은 의아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범은 그저 고대문명의 오래된 유물쯤으로 생각했다.
“태범 대표님, 여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 줄 아십니까?”
“처음 보는 문자입니다. 상형문자인 것 같기도 하고, 이거 어디서 온 물건입니까?”
태범의 눈에는 그저 꼬부랑 문자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집트나 마야의 상형문자는 아닌 것 같고, 어디서도 보지 못한 문자였다.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네. 처음 보는 겁니다.”
“흠…… 저는 대표님이 아실 줄 알았는데.”
이근휘 회장이 코로 숨을 크게 내뱉으며 아쉬워했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태범은 알쏭달쏭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석판에 대한 모든 걸 말씀해드리죠.”
이근휘 회장은 셔츠 주머니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고는 석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석판은 오래전 저희 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물건입니다. 거의 샘성의 역사와 같이할 정도로 항상 저희와 같이 있었죠. 사실 이 석판의 내용은 저도 모두 알지는 못합니다. 단지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조금의 의미만 알고 있을 뿐이죠.”
“아버지라면 샘성 선대회장인 이명춘 회장님 말씀 말입니까?”
“맞습니다. 샘성을 세운 저희 아버지죠.”
“아……. 그럼 이게 선대회장님인 이명춘 회장님과 무슨 관련이라도?”
“네! 아주 깊은 관련이 있죠. 생각해보세요. 샘성이 어떻게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게 그냥 노력으로만 이뤄졌다고 생각하셨다면 오산입니다.”
“그럼…… 설마 이 석판의 도움이라도 받았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이근휘 회장의 말을 듣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석판이 샘성에게 큰 도움이 된 무언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범은 설마 하며 이근휘 회장을 바라봤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이 석판은 미래의 기술이 담겨있는 석판입니다. 샘성이 가진 기술의 원천이기도 하죠.”
“아니! 이게 도대체 뭐 길래..”
태범은 놀라워했다.
스캐너에 이어 또 다른 비현실적인 물건이 앞에 있으니 말이다.
수천, 수만 년은 돼 보이는 이 석판에 기술이 담겨있다니 차마 믿기 힘들었다.
“당연히 놀라실 겁니다. 하지만 더 놀랄 일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