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이근휘 회장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함께 태범의 의견을 지지하는 말까지 더하니, 아들 이재호 부회장은 얼떨떨했다.
“아버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미 전자 쪽이랑 이야기가 된 거라…….”
“그건 내가 다시 이야기하고 왔으니 신경 쓰지 마. 이미 강태범 대표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
“재호야, 자세한 이야기는 있다가 하고……. 일단 강태범 대표의 의견을 따르지.”
순간 회의에 참여한 인원은 두 부자의 대화에 집중하게 됐다.
서로 엇갈린 주장, 하지만 이근휘 회장의 생각은 그 누구보다 확고해 보였다. 게다가 언론에서 들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도 건강한 모습에 다들 놀라워했다.
“그럼 샘성까지 모두 승낙을 하시는 겁니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근휘 회장이 확고한 결정을 한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했다.
태범은 이근휘에게 다시 한번 의사를 물었다.
“네. 저희 샘성은 태범 대표님의 모든 제안을 지지합니다.”
그렇고 이재호 부회장의 결정은 철회됐고, 이근휘 회장의 결정이 받아들여졌다.
난항을 겪을 것 같던 회의는 생각보다 쉽게 진행됐다.
“그래도 이재호 부회장님, 이번 샘성 스마트폰 10시리즈를 지휘하신 분이라 의견을 그냥 넘기기는 좀 그런데, 여전히 같은 생각이십니까?”
이재호 부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 혹여나 예의 없게 행동한 건 아닌지, 다시 한번 여쭤 물었다.
“제가 더 이상 말해봤자 뭐하겠습니까. 회장님이 지시가 곧 샘성의 뜻인데요.”
이렇게 회의는 결론이 났다.
딥멀티의 소스는 곧 세상에 공개될 것이다.
* * *
“아버지가 이곳에 오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제 건강도 찾았고, 나도 슬슬 경영에 복귀해야지.”
이근휘 회장의 복귀선언에 이재호의 동공이 확장됐다.
“아! 이제 회사에 나오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이 멀쩡한 몸을 가지고 노는 건 회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앞으로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이근휘 회장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건강이 악화되며 경영권은 물론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옆에 있는 이재호 부회장보다 펄펄할 지경이다.
전성기 시절의 이근휘 회장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 갑자기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겁니까? 그리고 회의 내용은 어찌 아시고…….”
“허허. 아직도 이 아비를 모르더냐? 내가 이래 봬도 샘성의 모든 걸 꿰뚫고 있다고. 재호야. 아직 배울 게 많구나.”
“아…….”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이재호에게 남은 여생만을 이야기하던 이근휘는, 다시 충고를 건넬 만큼이나 혈기가 좋아졌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이재호는 옛일이 떠오르며 감회가 새로웠다.
“재호야, 기억나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귀인.”
사업과 관련한 이야기가 끝나고 침묵이 잠시 차 안을 감돌 때, 이근휘 회장은 조용히 새로운 대화거리를 꺼냈다.
“물론 기억하고 있죠.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가 시간만 나면 말씀해 주셨던 이야기 아닙니까.”
이재호의 할아버지이자, 샘성 그룹의 선대 회장인 이명춘은 손자에게 본인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사업가가 가져야 할 자세, 사내로서의 기세, 미래를 보는 혜안 등 이야기를 통해 머리맡 교육을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이재호가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동화와 같은 하나의 이야기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귀인이 언젠가는 본인들을 만나러 온다는 옛이야기.
이야기의 출처는 어디인지 모르나, 이재호는 할아버지인 이명춘에게 이 이야기를 밤마다 들었다.
만병을 치료하는 의술가이자, 저 높이 먼 세상까지 날 수 있는 탐험가, 깨달음을 전해주는 교육자, 세상을 뒤엎는 혁명가.
마치 영화 속 영웅과 같이 온갖 수식이 붙은 사람이 주인공인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주인공이 실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그저 손주를 재밌게 해주기 위해 꾸며낸 할아버지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암, 잘 알고 있겠지. 그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질문 하나 하지.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귀인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할아버지가 저희보고 본받으라며 만든 가상의 영웅 아닙니까?”
“하하하. 그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군.”
“만들어낸 이야기 아닙니까? 저는 어디서 전해져 온 옛이야기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걸요.”
이재호의 말에 이근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한 미소였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귀인이 바로 강태범 대표가 아닌가 싶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이재호에게는 정말 뜬금없이 들리는 말이었다.
강태범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귀인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이때 문뜩,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어떻게 되신 건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재호야, 넌 아직 모르는 게 많아.”
“그럼 설마 그것 때문에 이번 강태범 대표의 제안을 받아들이신 겁니까? 귀인이 찾아오면 항상 환대해 주라는 할아버지의 말씀 때문에?”
“그렇지! 귀인은 무슨 일이 있든 환대하고 받아줘야 해. 그게 우리가 할 임무이고…….”
“아니,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강태범 대표는 그저 세상을 놀라게 한 천재일 뿐이지, 할아버지가 이야기한 그런 사람은 아닐 겁니다.”
일단 대화조차 말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미친 사람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 이재호는 최대한 아버지의 말에 맞춰주기 위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가정했다. 그러고는 반박할 수 있는 근거를 대며 아버지를 이해시키려 했다.
“강태범 대표가 날 이렇게 병원에서 나오게 만들어 주지 않았나? 이것은 곧 만병을 치료하는 의술가지. 그리고 노벨상과 함께 의학 혁명을 일으키고 세상을 바꿨지. 게다가 인공지능까지, 이게 바로 귀인이 아니면 무엇이겠어?”
말이 안 통하자 결국 이재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버지, 그건 그냥 허구의 이야기잖아요.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하시는 겁니까?”
“허구? 그게 정말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 그럼 그게 실제 이야기라도 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했던 이재호는 결국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사업가는 논리적 사고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지금 아버지인 이근휘 회장은 그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호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근휘 회장은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목소리를 내리깔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모든 걸 알릴 때가 온 것 같군.”
“뭘 말이죠?”
“우리 샘성가의 비밀.”
“비밀이요? 도대체 그게 무슨…….”
“가보면 알아. 김 기사! 용인으로 가지.”
* * *
‘과연 무엇부터 변화할까?’
회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태범은 곰곰이 생각했다.
앞으로 딥멀티의 소스 공개는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 예상했다.
마치 21세기 인터넷 시대가 열려 인류의 큰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처음 군사 목적으로 개발한 인터넷이 이제는 생활에 빠질 수 없는 필수품이 된 것처럼, 태범이 만든 딥멀티 또한 예측을 넘어서 세상의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 생각했다.
세상과 함께 사람을 바꾼다는 것은 흥분되는 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스캐너의 힘을 빌린 것이지만, 어쨌든 실질적으로 태범의 손에서 시작됐다.
이 손에서 나온 능력은 세상을 뒤흔들고 재정립할 만큼 새롭게 바꾸고 있었다.
태범은 그 어느 때보다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병원에 누워있던 환자가 일어서고, 사람들은 더 편리한 문명을 겪으며 편한 삶을 누리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믿고 따라주고 심지어 찬양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보고 있자니, 태범은 인간으로서의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가치를 경험하고 있었다.
태범은 물질의 추구를 넘어선 가치를 찾은 셈이었다.
왜 그렇게 성인군자들이 깨달음을 추구하려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마치 빛 하나 없던 암흑의 속에서 불을 밝힌 기분이었다.
앞으로 변화될 세상을 상상만 해도 좋았다.
태범은 혼자 방에 틀어박히고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태범 씨, 자?”
“아! 깜짝이야.”
캐서린이 문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혼자 낄낄 웃다가 갑작스러운 캐서린의 등장에 태범은 화들짝 놀랐다.
“미안. 놀랐어?”
“아니야. 괜찮아. 이 정도 놀랄 거 가지고 뭐.”
“지금 뭐 하고 있어? 일 하고 있는 거야?”
“아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태범 씨. 잠깐 앉아서 이야기 좀 나눠도 될까?”
캐서린이 갑자기 분위기를 한껏 잡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응. 그래. 앉아.”
말하기 끝나기 무섭게 캐서린은 책상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태범 씨, 우리 결혼하자.”
“응?”
“결혼하자고, 언제까지 남으로 지낼 수는 없잖아? 나 태범 씨랑 같이 살고 싶어.”
갑작스러운 캐서린의 프러포즈, 캐서린이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태범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분명 ‘결혼’이라는 단어가 귓속에 박혔다.
“아…… 결혼! 결혼이야 나도 좋지. 근데 프러포즈를 내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미안해지네.”
태범도 결혼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영국과 한국, 단지 서로 먼 거리에 떨어져 일하다 보니 결혼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뿐.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 태범이었지만, 어느새 세월이 훌쩍 지나는 걸 보면 결혼을 기다리는 것보다 빨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프러포즈를 누가 하든 뭐가 중요해. 서로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래! 그럼 우리 결혼하자.”
그날, 방구석에서 태범과 캐서린의 결혼 약속이 이뤄졌다.
* * *
며칠 후, 딥멀티의 소스 공개를 알리는 공개회가 TB 금융 투자 본사 강당에서 열렸다.
공개회에는 많은 지식인들과 함께 이를 취재할 수 있는 많은 취재진들을 초청했다.
아직 아무도 태범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으니 사람들은 폭탄급 발언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호기심 반, 기대심 반으로 TB 금융 투자에 모였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을 알린다는 건 흥분되는 일이었다.
대기실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차는 걸 보며, 그들의 반응이 머릿속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드디어 약속한 시간이 되고, 비장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섰다.
초청한 인원 100% 참석.
단 한 명도 빠진 사람 없이 모두가 태범의 말을 듣고자 이곳 자리를 채워줬다.
그만큼 오늘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라는 걸 의미했다.
태범은 강단 위에 섰고, 모두에게 선언했다.
“비밀에 싸여 있던 딥멀티의 소스가 오늘 공개됩니다. 앞으로 딥멀티는 한 단계 더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올 겁니다.”
태범은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딥멀티의 소스 공개를 알리자, 관중들은 일제히 환호와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곳에 모인 관중들은 대부분 IT 종사자 및 전문가들로 이번 태범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일반 개발자 여러분들도 인공지능의 일부인 딥러닝 시스템, 즉 딥멀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될 겁니다. 이를 가지고 여러분들의 세계를 펼치는 건 자유입니다. 모든 소스는 오늘 이후로 오픈되며 여러분들의 컴퓨터 안으로 손쉽게 들어갈 겁니다. 마음껏 즐기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동참해 주세요!”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실감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커다란 역사의 현장에 보고 있다는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