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태범은 입국한 날, 곧장 집이 아닌 부모님 집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태범을 기다리는 친인척들이 모여 있었다.
명절이 아닌데도 이렇게 친척 모두가 모인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 경사도 아닌, 대경사가 터졌으니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참가한 축하의 장이었다.
“이게 그, 노벨상 메달이라는 거니?”
태범이 부모님에 앞에 노벨상 메달을 놓자, 부모님은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엄마, 아빠 한 번씩 만져 봐.”
“이 귀한 걸 어떻게 만지니. 그러다가 때라도 타면 어쩌려고.”
차마 손으로 만지기 어려울 만큼, 귀하고 귀한 물건이었다.
노벨의 얼굴이 새겨져 반짝거리는 금빛의 메달, TV나 교과서 같은 곳에나 볼만한 것이니 당연히 신기하고 귀하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차마 만지기 꺼리는 부모님을 위해, 태범은 거침없이 메달을 케이스에서 꺼내 아버지 손에 쥐여 주었다.
‘참…… 이 귀한 걸 내가 만져보는 날도 있네.’
메달은 아버지 손에 올려졌으나, 혹시나 닳을까 걱정하는 건지 아버지는 차마 손가락을 굽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고선 어머니와 함께 감탄사를 뱉으며 감상했다.
“수고 많았다.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아버지는 다시 메달을 케이스에 넣고,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니 역시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성공이 계속되면 성과에 대한 행복이 무뎌질 만도 하지만, 부모님은 항상 태범의 성과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허허. 이건 우리 가문의 가보야! 가보! 아마 수천, 수만 년 동안 전해져서 우리 강씨 가문을 드높일 거야.”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오셨는지, 술 냄새를 풍기며 할아버지가 태범 옆에 다가와 앉았다.
부모님 못지않게 잔뜩 들떠 있었고 태범에게 칭찬을 건넸다. 나이가 드신 분이다 보니, 유교적인 사상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가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계셨다.
평소에도 진주 강씨는 뼈대 있는 후손의 가문이니, 높은 서열에 위치했다니 하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으셨는데, 태범의 노벨상 수상은 가문의 정점을 찍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가야. 자식 교육하느라 참 수고 많았다. 이런 복덩이를 어떻게 키웠을까?”
“아버님도 참…… 아니에요. 그냥 알아서 잘 큰 거죠.”
“아니야. 뭐니 해도 사람의 인성과 지혜는 교육에서 나오는 법이지! 그러니 우리 며느리가 참 잘한 거야.”
할아버지의 칭찬이 낯선지 어머니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부끄러워했다.
“식사 준비됐으니까, 다들 오세요!”
한참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고조되던 때,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큰어머니의 호출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상다리가 휘어진다는 표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식탁 위에는 한 번씩 맛을 보기도 힘들 만큼 다양하고 많음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친척들이 모두 손을 거들고 나서 고생하며 준비한 음식이었다.
오직 태범만을 위한 진수성찬.
한눈에 봐도 맛깔스럽게 차려진 만찬으로 태범이 좋아한다는 음식을 위주로 차려졌다.
“자 앉아. 앉아!”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앉으셔야죠.”
“씁! 오늘의 주인공은 태범이 네가 아니더냐? 잔말하지 말고 편하게 앉아.“
예절을 중요시하던 할아버지가 태범에게 식탁 가운데 자리인 상석을 권했다. 태범은 괜찮다고 말을 하나, 할아버지의 계속되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상석을 차지했다.
“무슨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에이! 노벨상 수상자가 직접 드시는 음식인데, 이 정도는 약과지! 호호.”
큰어머니가 태범에게 존칭을 사용하며 장난을 쳤다.
그러자 모든 가족들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친척 간의 화기애애한 자리인가, 꼭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불만이 하나씩 나오기 마련인데, 지금은 세상 모든 걸 얻은 분위기였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태범은 일부로라도 정성껏 차려준 친인척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맛있게 식사를 했다.
“자, 이것도 먹어봐.”
멀리 놓여 있는 갈비찜을 할아버지는 허리를 굽히면서까지 태범 앞으로 끌고 왔다.
어미 새가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듯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태범의 식사 하나하나를 신경 쓰고 계셨다.
“윽!”
젓가락으로 갈비찜을 들어 올리던 그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환청이 들려왔다.
태범이 잠시 젓가락을 놓고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귀한 손주 어디 아픈 건 아닌지, 할아버지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요.”
순간 웃음이 가득한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싸해지는 걸 느낀 태범은 머리를 붙잡은 손을 내려놓고는, 억지로 미소를 내보였다.
“거!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자기 몸도 잘 돌봐! 지금은 젊으니까 아픈 것도 참을 만하겠지만, 나중에 늙어서 병으로 돌아오니까. 젊었을 때 신경 써야 해.”
“네, 그럴게요. 할아버지.”
온 가족의 걱정에 애써 괜찮은 척은 했지만, 태범의 마음 한 부분을 거대한 돌덩이가 누르고 있었다.
그건 풀리지 않은 답답함 때문이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귀에 들려왔다.
* * *
‘언어.’
언어는 상호 간의 합의된 패턴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 패턴을 이용해 서로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걸 말했다.
태범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등과 세계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모두 통달한 상황이었다.
한번 보면 잊지 않는 암기력과 패턴을 분석하는 언어이해력만 있다면,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는데 단 하루가 걸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더불어 컴퓨터가 사용하는 기계어, 명령어까지 단순에 이해할 만큼 언어 천재가 돼 있었다.
눈을 감고도 프로그래밍을 할 정도로 컴퓨터의 언어는 사람의 언어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란 언어는 모두 통달할 수 있을 것 같은 태범이었다.
하지만 최근 태범을 괴롭히는 언어가 생겼다.
태범은 요즘 이 언어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잠에 빠질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이 음소의 조합은 중간마다 반복돼서 들리는 걸 보니, 언어의 조사와 비슷한 격인가?’
태범이 연구하는 건 바로 환청 속 의문의 언어였다.
처음에는 그저 고막을 때리는 듯한 소음으로 환청이 들렸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되어 들리고 있었다.
무의미한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순서를 지닌 낯선 이의 음성이었다.
일정한 규칙과 순서, 그리고 패턴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태범은 이를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캐너를 작동시킬 때는 물론, 화장실을 가거나 일을 하고, 심지어 꿈속에서까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도저히 모르겠어…….’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이미지나 뜻이라도 알아야 하지만, 주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웠다.
숫자를 모르는 아이에게 수학 문제를 주고 풀라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멈출 수는 없었다.
스캐너의 능력을 얻은 이후부터 태범에게 포기와 불가능은 없었다.
게다가 이 환청은 무언가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 같으니, 간단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태범은 풀리지 않는 문제를 붙잡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연구했다.
결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말이다.
* * *
“오느라 고생 많았어.”
“테범 씨 만나러 오는 건데 고생은 무슨!”
캐서린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태범의 대저택 정문이었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간 이후 첫 한국 방문, 한국에 있는 동안 태범의 집에 묵기로 하며 짐을 들고 이곳으로 왔다.
이번 한국 방문은 딥멀티와 관련해 사업차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딥멀티를 오픈소스화시키려는 태범의 계획을 관련자들과 대화를 나눌 예정 있었다.
물론 겸사겸사 태범을 만나 데이트를 할 목적도 있었다.
서로 바쁜 일정에 가지다 보니, 얼굴 한 번 보는 게 쉬운 게 아니었다.
“어때 오랜만에 한국에 온 기분이?”
“태범 씨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사실 그때가 가끔 그리웠거든.”
“그래. 그리웠겠지. 영국으로 돌아간 후 한 번도 안 왔으니.”
“응! 한국은 뭐랄까? 사람들에게 친근한 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오밀조밀하게 살아서 그런가? 사람들도 다 잘해줬어.”
캐서린은 한국에 대한 좋았던 인상을 이야기했다.
태범과 한국에서 있었던 추억을 하나씩 꺼내며,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캐서린, 이제 좀 쉬어야지.”
“응. 나 어디서 자면 돼?”
“내가 따로 방에 침대랑 이부자리 다 준비돼 있으니까, 그쪽에서 자면 돼.”
태범은 캐서린이 4층에 있는 커다란 침실로 안내했다.
대저택이다 보니 자칫하면 길을 잃을 정도라 안내가 꼭 필요했다.
괜히 집안에서 길 잃어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이면 안 되니 말이다.
“어때 괜찮지? 있을 거 있으니까, 혹시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자주는 아니겠지만, 혹시나 집에 묵을 손님이 생긴다면 대접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방 밖으로 나오면 개인 거실부터 화장실까지 모두 갖춰져 있고, 호텔과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나보고 여기서 자라고?”
분명 만족할 거라고 생각한 태범과는 다르게 캐서린의 표정이 좋지 않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왜? 뭐 불편한 거 있어?”
“태범 씨,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
“응. 그래. 뭐든 말해.”
“난 태범 씨가 필요해.”
“뭐?”
그날 밤 태범의 집은 뜨거웠다.
* * *
“딥멀티를 오픈소스화시키면, 저희가 가진 기술력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샘성 스마트폰 10시리즈를 찾는 것도, 딥멀티를 기반으로 한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인데, 그걸 어느 곳이든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저희 제품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지죠.”
딥멀티의 앞날을 정하는 자리, 이곳에서 치열한 논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딥멀티의 오픈소스화에 우려가 가장 심한 건 샘성 전자 측이었다.
이재호 부회장은 회의 내내 오픈소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기술에 대한 희소성은 떨어지는 건 분명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들을 망하라고 오픈소스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 이야기는 수익성과 생산성 두 가지 모두를 잡자는 이야기입니다.”
태범은 오픈소스화의 찬성 입장에 서서 이야기했다.
태범의 주장은 딥멀티의 소스를 대중 모두에게 공개해 프로그램의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오픈된 운영체제를 바탕으로 많은 어플리케이션 만들어지고 있다.
소수의 사람보다 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했을 때 생산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했고, 더불어 창의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저 역시 대표님과 같은 입장입니다. 물론 부하직원이라고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우려했으나, 충분히 오픈소스 이후에도 다른 통로로 수익을 낼 수 있고,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거라 생각합니다.”
영국에서 스낵피쳐와 공동 작업을 하고 있는 기술사업팀의 임호진 팀장도 이 회의에 참석했다.
그 역시 태범과 같은 입장에서, 오픈소스를 찬성하고 있었다.
캐서린과 런던대 측 역시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우려를 나타냈지만, 태범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꾼 사람들이었다.
이제 이재호 부회장의 부정적인 입장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만장일치인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저희는 오픈소스를…….”
이재호가 다시 입을 열며 샘성의 입장을 말하려던 차였다.
회의장의 문이 덜컥 열리더니,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어! 아버지?“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샘성그룹의 아버지 이근휘 회장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다.
그것도 아주 건강한 모습을 한 채 두 발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이근휘 회장은 빈자리에 앉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저희 샘성은 태범 대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