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논리적인 정보만 기재하는 사이언스지에서 확률을 들먹이고 있었다. 그것도 태범의 노벨 수상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도박사들처럼 숫자놀이를 하기 위해 이 확률을 기재한 것이 아니었다. 99.9%의 의미는 그만큼 과학계에서도 태범의 노벨상 수상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표님,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되실 겁니다.”
윤희성의 아부성 멘트에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은 박수가 더해졌다. 태범보다 직원들이 먼저 김칫국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해서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지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현 상황에 세포재생에 필요한 화학적 공식을 설계한 태범을 이길 기술은 없었으니 말이다.
태범도 나름 기대는 하지만, 애써 좋은 티를 내지 않았다.
“뭐, 벌써부터 김칫국 마시면 어쩌겠어요? 이 이야기는 그만하고 회의 시작하죠.”
태범은 잡지를 덮으며 말했다.
잡지를 덮으니 표지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본인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양복을 곱게 차려입은 채 잔뜩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 모습이다.
기자와 인터뷰 당시 찍었던 사진인데, 설마 여기서 쓰일 줄이야. 멋있는 척하는 본인의 모습에 손발이 오글거린다.
태범은 잡지를 치우고는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투자 규모를 지금보다 더욱 늘리기 위한 중요한 회의였다.
바로 우주 산업.
장기적인 안목이 없다면 투자하기 꺼려지는 분야였다.
절대적인 도전정신이 필요했고, 리스크가 큰 만큼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았다.
* * *
“회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허허! 강태범 대표 왔나요?”
이희현 명예회장은 태범을 명절에 찾아온 손주 반기듯 반갑게 맞이해줬다.
현재 삼에스 생명 공학에 투자하고 있는 주식의 향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찾은 것이었다.
태범이 거실로 들어서자, 이희현 명예회장은 휠체어의 바퀴를 힘껏 굴리며 태범 앞으로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는 태범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힘들게 여기까지 마중을 나오십니까. 들어가서 기다리시지.”
“괜찮아요. 괜찮아. 내 이래 봐도 아직 힘은 남아 있어요.”
누가 봐도 나뭇가지같이 얇은 팔뚝에 힘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지만, 이희현 명예회장은 자신의 팔뚝을 굽혀 보이며 근육을 자랑했다.
“어르신은 대표님이 오실 때마다 힘이 넘치시나 봐요. 평소에는 안 이러시는데, 대표님만 오시면 활기가 쌩쌩해지시네요.”
이 집의 가정부 아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차와 다과를 준비하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니겠나? 이렇게 내 은인이자 대단한 사람이 날 찾아와줬는데, 이 정도는 기뻐해 줘야지. 허허.”
이희현 명예회장은 한술 더 떠 태범을 치켜세웠다. 태범을 높게 사는데 전혀 망설임 없었고, 그는 태범에게 푹 빠져 있어 보였다.
“차 한 잔 듭시다. 뜨거우니 조심하고요.”
이희현의 손짓에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으나, 녹차와 비슷한 풀 향이 진득하게 나는 차였다.
“제가 선물 드렸던 그림 걸어놓으셨네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저 그림을 본답니다. 저 안개꽃을 보면 하루를 마음 편안하게 시작할 수 있죠.”
“좋아하시니 다행입니다. 취향에 맞으실지 고민 많이 하고 그린 그림이었거든요.”
“태범 대표의 감각이면 점을 하나 찍어도 만족했을 겁니다. 허허허.”
“나중에 또 좋은 작품으로 선물해드리겠습니다.”
“에헤이! 됐습니다. 안 그래도 바쁜 손 괴롭히면 안 되죠.”
이희현은 두 손을 저으며 성의를 애써 거절했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 태범을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희현은 주제를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대표님은 앞으로 투자계획은 어떻습니까?”
“회장님의 뜻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펀드로 보유하고 계신 삼에스 생명 공학 주식을 매도해서 현금화하길 원하시면 그렇게 해드립니다. 아니면 주식으로 보유하고 계셔도 괜찮고요. 어떤 식으로 하시든 회장님은 이미 큰 수익을 올리셨습니다.”
2,000억이나 되는 돈을 거리낌 없이 투자한 이희현 명예회장, 태범은 그에게 5배가 넘는 수익으로 보답해 줬다.
도롱뇽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삼에스 생명 공학의 주식이 폭등했고, 이는 곧 태범 고객들의 수익이 되었으니 말이다.
투자가 마무리되는 시점, 이제 남은 건 이희현 명예회장의 뜻에 달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요? 내 투자 목적은 수익이 아니라는 걸.”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수익보다는 남은 삶에 커다란 의미를 담고 싶으셨죠.”
“그렇소. 물론 돈이야 없는 것보단 낫겠지만, 평생 돈을 좇고 살다 보니 이제 실증이 난 상태요. 난 그저 남은 인생 재밌게 살다 가는 게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요.”
이희현은 여전히 돈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예도 아니다. 그저 남은 인생 새롭고 놀랄 만한 세상을 보는 것이 그가 가진 희망이었다.
“그럼 이번에 얻은 수익금도 이전처럼 투자하시길 원하시는 겁니까?”
“그렇게만 해주면 좋겠죠. 그렇다고 해서 부담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놀라운 결과를 봤으니 말이죠.”
해탈이라도 한 것일까.
이희현의 말투며 표정까지 여유가 잔뜩 넘쳤다.
보통 돈을 건다면 사람의 마음은 조급해지고 긴장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희현 명예회장에게는 긴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어린아이 소꿉놀이하듯 돈을 가지고 놀려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회장님이 놀랄 만한 투자 구상이 제게 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 그런가요? 이거 너무 기대되는군요. 참……. 좀만 더 젊었을 때 태범 대표를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펄펄 뛰어다닐 때 같이 일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죠. 남은 인생이라도 붙잡아서 태범 대표를 오래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허허”
노인이 젊음을 원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의 아쉬운 상상을 하는 건 이해가 됐다.
“그건 그렇고 세포재생기술은 언제 실질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겁니까?”
이희현 회장은 도롱뇽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슬쩍 세포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떠보더니, 본인도 기술의 도움을 받아보고 싶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회장님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그렇게 기대하시던 걸 마주하는 날이 곧 올 겁니다.”
* * *
슬쩍 벽에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어느새 1시간이 지나갔다. 계속되는 질문에 대답해 주는데 시간이 이렇게 간 줄은 몰랐다.
태범은 슬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준비를 했다.
“회장님,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 내가 말이 많았죠? 바쁜 사람 붙잡아 놓고 말이죠.”
“아닙니다, 회장님. 고객과 대화하는 건 제게 중요한 업무이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늙은이 비위 맞춰주느라 고마웠소. 그럼 얼른 일어나 보죠.”
“안 나오셔도 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도 귀한 손님인데 배웅은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허허.”
태범이 말렸지만 이희현 명예회장은 기어코 휠체어를 굴리며 태범이 나가는 길을 따라왔다. 차를 댄 주차장까지 따라오고는 인사를 건네려 하고 있다.
“또 뵙겠습니다. 몸 건강히 계십시오.”
고객이자 어르신에 대한 예의였다. 태범은 허리를 굽히고는 인사를 했다.
“그래요……. 또…… 봬…….”
이희현 회장이 미소와 함께 태범의 인사를 받아주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그의 말끝이 흐려지더니,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심장을 부여잡고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태범은 화들짝 놀라며 이희현의 상체를 붙잡았다.
자칫하면 이희현의 상체가 휠체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온몸에 힘이 빠졌는지 축 늘어진 미역처럼 휠체어 위에 늘어졌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아주머니 119에 전화해 주세요.”
태범은 바로 이희현을 휠체어에서 들어 올려 바닥에 눕혔다.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졌다는 건 심정지가 왔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나이가 들면 혈관이나 심장계통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호흡이 멈췄네요. 심폐소생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역시나였다.
코에 손을 가져다 대니 날숨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범은 바로 이희현의 셔츠를 풀어헤치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심폐소생술은 지겹도록 배웠고 듣고 해봤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틈만 나면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았고, 예비군 훈련 때마다 실습을 했으니 말이다.
퉁 퉁 퉁-
직각으로 세워진 태범의 팔은 이희현 명예회장의 가슴을 계속 펌프질해댔다.
갑자기 쓰러진 이희현에 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호원들은 구둣발로 이곳저곳을 오가며 다급한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일단 응급 차량이 올 때까지 심폐소생술을 멈추면 안 된다. 태범은 쉬지 않고 이희현의 심장을 눌렀다.
“심장재세동기입니다. 이거 쓰시죠.”
“펼쳐주세요.”
경호원이 집안 어딘가에서 가져온 재세동기를 펼치곤 이희현의 가슴에 부착했다. 몸에서 떨어지라는 기계음과 함께 기계는 이희현의 가슴에 고전압의 전기적 자극을 보내기 시작했다.
자극이 보내질 때마다 이희현의 상체가 쿵 하며 들썩거렸다.
몇 번이나 자극이 가해지고, 재세동기가 멈췄을 때는 다시 손으로 직접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절대 쉴 틈을 주지 않고 심장에 펌프질을 가했다.
그 결과.
“호흡이 돌아왔습니다!”
이희현의 코에서 옅은 숨이 느껴졌다. 다행히도 심장이 다시 뛴 것이다.
“회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으…….”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신음을 내뱉는 걸 보아 정신은 돌아온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여전히 바닥에 누워 온전한 정신을 못 차리고 있기에 끝까지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위잉위잉-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곧이어 구급대원들은 들것을 가지고 별장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
“환자분 어디 있습니까? 어!”
집안에 들어온 구급대원들은 태범의 얼굴을 보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희현을 들것에 실어 구급차로 이송시켰다. 태범도 보호자가 되어 구급차에 같이 올랐다.
“평소 심장과 관련해 앓던 병이 있었습니까?”
“고혈압이 조금 있긴 하셨는데…….”
구급대원의 질문에 같이 차에 오른 가정부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일단 숨은 돌아오셔서 다행이긴 한데, 아직도 심장박동이 불안전하거든요. 일단은 혈관을 넓히는 약은 투여했는데, 자세히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당연하죠. 그렇게 해주세요.”
멎었던 숨은 돌아왔기에 한결 안심할 수 있었으나, 여전히 위험은 존재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집으로 가야 할 태범은 얼떨떨하게 병원으로 향하게 됐다.
* * *
“평소 협심증이 있으셨네요. 고혈압약도 먹고 계셨죠?“
“네. 약을 꾸준히 챙겨 드시고, 건강검진도 매해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병원 내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혈관이 막히는 협심증 때문에 심근의 산소 부족으로 이어지며, 비정상적인 심장 리듬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일단 관상동맥 쪽에 심혈관조영술로 검사했습니다. 아마도 우회술을 통해 다른 혈관으로 연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급하게 달려온 이희현 명예회장의 가족들과 상의를 하고 있었다.
태범은 몰랐지만, 평소 이희현은 혈관 질환을 앓았던 모양이었다.
옆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태범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고민에 빠졌다.
‘회장님이 그렇게 원하셨는데…….’
고민과 함께 잠시 머뭇거리던 태범은 의사와 가족들 앞에 다가가 제안 하나를 했다.
“그것보다 새 혈관으로 대체하는 건 어떻습니까?”
가족들은 태범이 말을 걸어오자 연예인 바라보듯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들 역시 태범은 신기하면서도 경외의 존재였으니 말이다.
“네? 새 혈관이요?”
태범의 제안에 잠시 물음표를 띄우던 의사는 아! 하며 태범의 눈을 바라봤다.
“네. 결국 혈관의 문제 아닙니까? 그걸 새것으로 바꿔준다면 어떻겠습니까?”
마주 보고 있는 의사와 태범의 눈은 서로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태범이 앞으로 무슨 말을 할 건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의사는 알 수 있었다.
“설마…… 그걸 사용하시려고 그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