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저보고 영국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영국으로요? 무슨 일로 말이죠?”
“남은 모든 삶을 보장해 준다고 했거든요. 돈뿐만 아니라 명예, 지위까지 영국으로 오기만 하면 엄청난 대가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권세력이 있는 핵심 지역인 영국으로 강용식을 데려올 셈이었다. 아마도 일을 마무리한 작업자를 더욱 가까이서 관리할 셈인 것 같았다.
혹시나 다른 마음을 먹을까, 차라리 집에 데리고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대가는 그저 허물일 뿐, 속박으로 보였다.
“제 생각에는 대가를 주기보다는 본인들이 당신을 끝까지 이용해 먹기 위해 본진으로 부르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위협적인 칼날이 당신의 입속에 들어 있으니 말이죠. 그 칼날을 본인들이 쥐고 싶어 하는 겁니다.”
“사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말은 대가를 보장해 준다고 하지만, 괜히 영국에 갔다가는 어떻게 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고……. 그리고 전 이미 배신자가 아닙니까? 그들이 그걸 안다면 저한테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죽겠죠.”
강용식의 굳은 얼굴이 그의 공포를 말해주고 있었다. 강용식 역시 그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범은 양용식에게 어떠한 동정심도 느끼지 않고, 자비를 베풀고 싶을 생각은 없었다.
만약 태범이 먼저 손을 쓰지 않았다면, 그는 지시에 따라 사람을 해쳤을 테니 말이다. 무슨 말로든 그의 행동은 용서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당신에게 내렸던 지시를 보니, 배신자는 가차 없이 처단할 성격으로 보이네요. 아마 영국으로 가시면 이렇게 되실 겁니다.”
태범은 본인의 목에 엄지손가락을 그으며 목숨이 달아날 거라고 표현했다.
정말이다.
단지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그들의 행동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더 이상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너무 두렵습니다. 대표님, 저 좀 살려주세요.”
강용식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태범의 소매를 붙잡고는 애원했다.
그가 기대고 붙잡은 곳이라고는 결국 태범밖에 없었다.
이권세력의 앞잡이 역할은 태범에 의해 이미 물 건너갔고, 남은 건 오직 모든 걸 알고 있는 태범이었다.
“좋아요. 제가 용서를 받고 할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신은 지켜드리겠습니다. 당신이 그들 편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어쨌든 그들 손에 놀아나고 싶지는 않거든요.”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용식은 몇 번이나 태범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의 말이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세요. 말씀하시는 것 모두 하겠습니다.”
“지금처럼 그쪽에서 오는 모든 정보를 제게 넘기세요. 단 하나도 빠짐없이요. 그리고 절대 티를 내시면 안 됩니다. 계획을 위해서도 있지만, 당신의 앞길이 달린 문제이기도 합니다.”
“물론입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제 의사인 강용식은 확실히 태범의 편에 서게 됐다. 하지만 위험한 줄타기는 여전했다.
강용식은 의사의 가면을 쓴 채 이중 스파이로서 이권세력과 태범 사이에 껴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다. 한번 족쇄에 묶인 발목은 풀 수가 없었다.
* * *
[내일 저녁 3번째 환자도 처리하세요. 약은 그때 그 장소로 전달 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 일까지 마무리되면 빠른 시일 내 영국으로 넘어와요. 거하게 대접해드릴 테니 말이죠. 대신 절대 누구에게도 이 비밀이 누설되면 안 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작업 마무리하고 바로 영국으로 가겠습니다.]
누군가 강용식에게 지시를 내린 통화 녹음내용.
그 누군가는 마틴의 마크 필립스와 연결된 한국인 브로커였다.
태범이 마크 필립스의 지식을 스캔하는 과정에서 그와 엮여 있는 한국인 브로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양용식도 알게 된 것이었다.
브로커는 천만 달러라는 금액과 교수직을 제안하며, 의사인 강용식을 유혹했었다.
물론 무식하게 아무런 근거 없이 내건 조건은 아니었다.
그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는 직접적으로 거론이 없었지만, 간접적으로 제약, 의료분야의 이권세력 힘을 내보이며 강용식을 매수할 수 있었다.
스캐너로 정보를 얻게 돼 다행이지, 이 사실을 몰랐더라면 정말 언론에 뜬 대로 임상시험에서 부작용 사건이 터졌을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바보 같은 자식들. 날 뭐로 보고 저러는 거지.”
녹음내용을 듣고 있던 태범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날고 긴다 한들 태범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태범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지 말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태범은 재생 프로그램을 닫은 후, 프로그래밍 툴을 실행시켰다.
타다다닥─
곧이어 키보드 소리가 대표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키보드 위에 놓인 열 개의 손가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언뜻 보면 피아노를 치는 듯한 손놀림이다.
‘완전 뿌리를 뽑아야 해!’
태범의 손에서 새로운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통해 컴퓨터와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알고리즘의 프로그램의 언어를 작성하고 있었다.
태범의 언어이해력은 거의 신들린 수준이 되었다. 언어이해력은 곧 패턴을 분석하는 능력이었고, 또 다른 패턴을 지닌 컴퓨터의 언어를 태범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컴퓨터의 언어인 기계어를 대신해 사용하는 고급언어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건 물론, 기계어를 직접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만큼의 수준이었다. 이는 태범 본인 스스로가 컴퓨터가 된 수준의 능력이었다.
태범은 폰 노이만의 언어이해력을 100% 달성한 이후에도 계속된 트레이닝에 능력은 100%를 초과한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랑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쉬운 것이 컴퓨터와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머릿속 상상은 곳 컴퓨터 안 프로그램으로 현실이 되었다.
타다다닥─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프로그래밍 하나가 뚝딱 하고 만들어졌다.
태범이 개발한 건 뿌리 찾기 프로그램이다.
키워드나 정보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인터넷 속에서 찾아내는 알고리즘이었다.
당연히 딥멀티를 기반으로 했고, 무작위의 정보를 탐색하는 것이 아닌, 컴퓨터 스스로가 학습한 내용을 참고하여 정보를 역으로 추적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자식들의 정체를 꼭 파헤치고 말겠어.’
태범은 가슴 한편에 독기를 가득 품고는 손을 움직였다.
알면 알수록 잔인한 놈들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마음을 꼭 붙들어 매고 싸워야만 했다.
타다다닥─
[제약회사 ‘마틴‘]
[세포재생 기술]
[임상시험 부작용]
[사기꾼 강태범]
태범이 탐색하는 주된 키워드는 도롱뇽 프로젝트에 대한 부정적 단어들이었다.
언론이라는 것이 사실만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정보를 내뱉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분명 통제되고 계획적인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면이 있었고, 태범의 눈에는 그게 보였던 것이다.
태범을 공격하는 근원을 찾아야만 했다.
물론 이권세력과 결탁했겠지만, 더욱 자세한 정보가 필요했다.
* * *
[세 번째 환자 부작용 발생! 임상시험 당장 중단해야.]
[황이준 박사의 줄기세포 거짓 논문의 사건이 되풀이되는가.]
[실망한 환자들, 모든 걸 이곳에 걸었는데, 그저 눈물만…….]
└사기꾼 강태범! 정부가 주도해서 진상조사에 나서라.
└당장 도롱뇽 프로젝트를 철회하라.
└이곳에 모든 기대를 걸었던 환자들의 마음을 아는가, 나 또한 장애를 지닌 사람으로서 이번 임상시험에 실망이 크다. 아무래도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세 번째 환자의 부작용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나가고, 세포재생기술에 대한 언론의 부정적인 반응 수위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일분일초,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언론을 보면, 하나같이 태범과 삼에스 생명 공학 그리고 도롱뇽 프로젝트 때리기에 바빴다.
거의 선동에 가까운 글들이었다.
사실관계를 완전히 파악하지 않은 채 기사를 마구 쏟아냈고, 어느 순간부터 진실은 거짓이라는 깊은 구렁텅이 속에 묻혀버렸다.
* * *
“요즘 많이 힘들지? 아이고. 다 성공한 줄 알았는데, 또 그게 무슨 일이냐.”
오랜만에 집에 들르신 어머니였다.
예전처럼 반찬을 싸 가지고 오시지는 않지만, 태범의 대한 걱정은 여전히 마음속에 간직한 채 오셨다.
어머니도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있었기에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계셨다.
게다가 태범에 대한 소식은 더더욱 관심을 가졌으니 말이다.
“큰일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엄마는 그냥 아들이 무조건 잘 된다고만 생각해. 그 외에 다른 생각할 필요는 없어. 모두 잘될 테니까.”
“엄마도 아들을 믿기야 믿지. 그런데 요즘 TV나 신문 보면 난리도 아니잖아. 엄마는 그런 걸 보면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
심각하게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
어머니가 스캐너의 기괴함을 감당할 만큼 이해력이 넓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태범조차 여전히 알 수 없는 스캐너의 능력에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고, 이는 말로서 설명될 부분이 아니었다.
‘그래. 참자. 참아. 어머니도 조금만 참으시면 돼.’
목구멍 밖으로 나올 뻔했던 진실을 다시 삼키고, 태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로 대답했다.
“캐서린은 한국에 언제 온다니?”
“갑자기 캐서린은 왜?”
“아니, 네 아빠가 물어보라더라. 언제 한번 가족끼리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캐서린도 지금 한창 바쁠 때인데 아직은 좀 그렇고, 일 마무리 되면 그때 한 번 약속 잡아 볼게.”
“아니야. 괜찮아. 네 아빠가 빨리 손주 보고 싶어서 주책없게 내뱉는 말이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안 그래도 지금 머리가 지긋지긋할 텐데. 그렇지?”
“일단은 나도 코앞에 일부터 해결하고 생각해 볼게. 그건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그래. 천천히 생각해. 엄마가 아빠한테 잘 말해줄게.”
* * *
[협상기술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90%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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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91% 진행되었습니다.]
마크 필립스 협상기술이 90%쯤 진행됐을 때 태범은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다.
세계 1위 제약회사 마틴의 회장인 데이비드 버니가 주도적으로 이번 도롱뇽 프로젝트 방해 작전에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예상했던 바이긴 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 대대적인 언론 조작이 있다는 게 지식과 함께 정보로 들어왔다.
* * *
TB 금융 투자 대표실.
“기자회견을 하시고 진상을 밝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론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그냥 무시하고 임상시험을 강행했다가는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합니다.”
평소 태범 앞에서 좋은 말만 하려던 삼에스 생명 공학의 조세윤 사장이 이번에는 쓴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악화된 여론에 못 이겨 결국 그 역시 한계에 도달한 듯 보였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죠.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대표님, 이런 말씀을 드리긴 죄송하지만, 지금 때를 찾을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내일하는 게 저희 목숨이고, 내일 당장에라도 임상시험이 취소돼도 아무 이상이 없을 정도니 말입니다.”
조세윤 사장은 여유를 부리는 태범이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일분일초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임상시험에 대한 태범의 입장발표가 없다면, 여론은 더욱 뜨겁게 끓어오를 게 뻔했으니 말이다.
“대표님이 정 못 하시겠으면, 제가 기자회견이라도 열어서 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실수를 인정하고 시험을 철회하면 여론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그래 봤자 사기꾼 낙인찍히는 건 똑같을 겁니다.”
태범이 소리 내며 웃자, 조세윤 사장은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와?’라고 말하는 것처럼 태범은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