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대표님, 투자 자문 성과 보고서입니다.”
“잠깐만요. 통화 한 번 해야 해서 그런데 의자에 앉아 있으세요.”
보고를 위해 대표실에 찾아온 윤희성을 잠시 뒤로하고 태범은 핸드폰을 들었다.
영국에 있는 임호진 팀장에게 넘겨받은 연락처.
‘존 라쉬.’
그는 얼마 전 영국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퇴사한 사람으로 외부 연구 의뢰의 승인 허가를 책임졌다. 그래서 이번 도롱뇽 프로젝트의 연구 거절에 큰 연관이 있는 사람이었다.
“존 라쉬 씨 맞나요?“
“네? 누구시죠.”
“TB 금융 투자에 강태범 이라고 합니다. 도롱뇽 프로젝트 총 책임자죠.”
“강…… 태범?”
“네, 영국에 아는 지인을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서 이렇게 연락을 드린 겁니다.”
“당신 정말 강태범 맞아?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인데?”
“네, 강태범 맞습니다.”
“아니, 당신 발음이 완전 영국 사람이잖아. 장난 전화 아니야?”
영국 발음을 너무 완벽하게 해서 그런지 존 라쉬는 발신자인 태범의 신원을 의심했다.
“하하. 요즘 시대가 글로벌 시대 아닙니까? 한국인이 영어 좀 쓸 수 있죠.”
“아니,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
“저 강태범 맞습니다.”
존 라쉬의 의심을 떨치기 위해 태범은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다시 한번 자신을 알렸다. 물론 그렇다고 영국인인 그가 한국어 발음은 알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정말…… 당신이 강태범 씨 맞나요?”
“그래요 뭐, 제가 강태범이 맞든 아니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아무렇게 생각하셔도 되니까, 본론부터 이야기하죠.”
의심을 거두지 않으려니, 태범은 대화를 좀 더 강하게 나갔다.
“네?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건지?”
“누구한테 사주를 받고 저희 쪽 연구 의뢰를 거절하신 건가요?”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태범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어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인사치레 따위는 필요 없었다. 대화는 본론부터 시작됐고 존 라쉬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태범은 전화 속 목소리만 듣고도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음악적 능력이 스캔 되면서 생긴 부가적인 능력이었다.
목소리는 사람의 감정을 대변하듯 생각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졌다. 정말 전문적인 배우의 발성이 아니라면 감정이 목소리로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도롱뇽 프로젝트요.”
“네?”
도롱뇽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존 라쉬의 목소리 톤이 한껏 높아졌다.
전화기 넘어 멀리 떨어진 사람이지만, 그의 놀라는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죠. 전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왜 전화를 한 거지도 모르겠고요.”
“굳이 시치미 떼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일 테니 말이죠.”
“아니, 다짜고짜 이런 식으로 전화를 주는 건 예의가 아니죠.”
“다짜고짜요? 다짜고짜 연구를 거절당한 건 저희입니다. 승인까지 다 해놓고 갑자기 번복을 하더니 저희 연구 계획을 틀어지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우리도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 사정이라는 게 결국 기존 세력을 지키기 위함이겠죠.”
“뭐…… 뭐라고요?”
“제가 이 나이에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전 모든 걸 할 수 있고, 모든 걸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말이죠.”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어느 쪽 손을 잡아야 하는지 잘 판단하시라는 겁니다. 대중들이 저희 손을 잡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감이 오지 않습니까?”
“난 이미 퇴사한 사람입니다. 이제 연구소랑 아무 상관없으니까 연락하지 마세요.”
“그럼 언제든 기다릴 테니, 할 말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주세요.”
존 라쉬는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그의 냉정함은 긴장과 불안을 감추기 위한 감정적 방어 수단으로 보였다.
말을 더듬는 것부터 해서 감정의 변화가 하늘과 땅을 찍고 있으니 그는 분명 무언가를 감추며 긴장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합니까?”
옆에서 보고서를 들고 서 있던 윤희성 이사가 물었다.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시치미를 떼고는 전화를 끊던데요.”
“역시 그러겠죠.”
“근데 좋은 징조가 느껴졌습니다.”
“좋은 징조요?”
“떨고 있더라고요. 그 사람 목소리로 확실히 느꼈어요.”
“그게 목소리만 듣고 느껴지시나 봐요.”
“감정은 온몸을 지배하죠. 얼굴의 표정, 손짓, 발짓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부터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와 언어를 잘 살펴보면 감정에 따른 변화가 있기 마련이죠.”
“아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던데…….”
“희성 씨도 고객들 많이 만나보면서 알게 모르게 느꼈을 거예요. 감정을 포착하는 건 사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느낌에 가까우니까요.”
“하하. 그래도 전 아직 대표님 따라가려면 먼 것 같네요.”
“희성 씨도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그럼 가져온 보고서 한 번 볼까요?”
“네, 4분기 자문 성과 보고서입니다.”
희성이 건넨 보고서를 받아든 태범은 특유의 속독 기술과 정확한 판단능력으로 보고서를 빠르게 넘기며 살펴봤다.
검토하는 데는 단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성과네요 딥 멀티가 제 대신에 일을 잘 해주고 있어요.”
“맞습니다. 고객들 만족도가 여전히 90%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올린 투자 지침 자료가 큰 도움이 되는 모양입니다.”
“제 지침보다는 딥 멀티 덕이죠. 요즘은 제가 굳이 정보 업데이트를 안 해도 딥 멀티가 알아서 분석해주던데요?”
“그 딥 멀티를 만드신 분이 대표님 아닙니까? 결국 대표님 덕인 거죠.”
“하하. 그런가요? 생각해보면 제가 한 일 중에 가장 뿌듯한 것 중 하나가 딥 멀티를 개발한 거예요. 이거 없었으면 제가 지금 이렇게 딴 짓이나 할 수 있겠어요?”
딥 멀티로 이뤄진 프로그램인 TB 교육은 태범의 지침을 분석하여 정보를 재가공한 뒤 직원들에게 공유가 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은 이 정보를 토대로 투자를 하면 됐다.
태범이 손을 덜기 위한 하나의 시스템이었는데 이제는 나름 자리를 굳게 잡아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태범의 지식과 딥 멀티와 연산 능력은 서로 시너지로 작용해 큰 기능을 한 덕이었다.
“요즘 그 프로젝트는 잘 돼가고 계십니까? 제가 뭐, 그런 생물학에 전문적인 지식은 몰라도 언론에서 보도하는 거 보고 대충은 알거든요. 그 이권 세력이니 뭐니 해서 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항상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기 마련이죠.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아…… 그러면.”
윤희성이 말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삐 소리와 함께 인터폰에서 비서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표님, 다음 스케줄 준비하셔야 합니다.”
비서의 음성 소리에 태범은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봤다.
“워,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대화는 여기까지 하죠. 그럼 나가보세요. 저도 나가 볼 때가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 * *
오늘 태범과 삼에스 생명 공학 연구원이 만남을 가질 예정이었다.
경호원 임창순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태범은 삼에스 생명 공학 연구소로 이동하고 있었다.
“창순 씨는 언제부터 유도를 시작한 거예요?”
줄기 세포 관련 논문을 읽고 있던 태범은 흔들리는 차 안이라 그런지 멀미가 나서 잠시 논문을 내려놓고는 창순에게 말을 걸었다.
“저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했습니다.”
“빨리 시작했네요. 초등학생이면 유도라는 스포츠도 잘 모를 텐데.”
“그 당시 장난감이 뭐라고 체육관 등록하면 사은품으로 장난감 준다는 말에 어린 나이에 혹해서 다니기 시작했죠.”
“하하하. 그랬어요? 그래도 올림픽 메달리스트니까 좀 더 거창하게 시작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네요.”
“원래 자기 앞날은 모르는 거잖아요. 제가 아는 친구 중에 프로 축구 선수가 있는데 걔는 축구하면 선생님이 빵 준다고 해서 다녔다니까요.”
“하긴 사실 저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모두 사소한 것에서 시작됐다. 책상 위에 놓인 스캐너가 태범의 인생 전부를 바꿔줬던 것처럼 말이다.
그날 스캔이라는 사소한 행위 하나로 모든 인생이 바뀌어 버리다니 다시 생각해도 감회가 새로웠다.
“창순 씨, 뉴스를 듣게 라디오 좀 틀어 줄래요?”
“네!”
창순은 태범의 지시에 뉴스 방송을 하는 라디오 채널을 찾아 맞췄다.
그때였다. 잠깐이었지만 채널이 돌아가는 틈 사이에서 걸 그룹 핑크레인의 노래가 태범의 귓속에 들려왔다.
“핑크레인 노래…….”
노래를 들은 태범은 무의식적으로 가수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그러자 창순이 깜짝 놀라 룸미러를 통해 뒷자리에 앉은 태범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대표님, 걸 그룹 이름도 아세요?”
“저도 이름 있는 애들은 알죠.”
“오…… 대표님이 걸 그룹을 알다니 신기하네요. 일만 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을 알아가는 것도 일의 일부분이죠.”
창순은 태범을 아직 범생이 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벌써 경호원으로 같이 일한 지 석 달이 넘었지만 창순의 눈에 태범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일벌레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해지는 일과 학문 속에 파묻혀 사는 태범의 모습은 창순이 본 전부였다.
“핑크레인이 이번에 이 앨범으로 엄청 떴잖아요. 데뷔하고 지금까지 완전 망해서 해체한다는 소리까지 있었는데 말이죠.”
“오. 창순 씨도 걸 그룹 좀 아나보네요.”
“제가 이래 뵈도 걸 그룹 마니아! 그 유명한 삼촌 팬입니다.”
“그래요? 창순 씨도 운동만 하고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저도 그렇고 창순 씨도 그렇고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나 봐요.”
창순이 태범을 오해한 것처럼 태범도 마찬가지.
유도 은메달리스트에, 몸은 우락부락해서 운동만 하고 살 것 같은 창순이 걸 그룹 마니아라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역시 남자는 여자를 보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 그러보니까, 핑크레인 신곡 작곡가가 대표님하고 동명이인이던데, 아세요?”
핑크레인 이야기를 한창 나누던 중 창순은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핑크레인의 신곡 작곡가의 이름이 ‘강태범’ 이라는 것이다. 태범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모르쇠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거 참 신기하네요.”
“저도 인터넷 보고 알았거든요. 어떤 사람이 댓글로 이 노래를 대표님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참 웃긴 소리죠?”
“하하하하.”
결국 태범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최근 이렇게 웃어 본 적이 없었던 만큼 눈물 나오는 큰 웃음이었다. 차 안을 가득 울리는 태범의 웃음에 창순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그거 아세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네? 무슨?”
“뭐, 이제 슬슬 사람들이 알아가는 거 같은데 굳이 숨길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설마…… 진짜 대표님이 작곡하신 거예요?”
“네, 제가 작곡했어요. SN엔터테인먼트이랑 계약한 곡인데 이번에 잘 돼서 저도 기분이 좋네요.”
창순은 ‘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으며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매일 일에만 빠져 있는 사람이 따로 작곡을 했다는 게 사실 보통 사람 기준으로 보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많이 들어줘요. 보니까 핑크레인 걔네도 좀 불쌍하던데 이제라도 뜨니까 얼마나 다행이에요?”
“에이…… 대표님 농담하시는 거죠?”
* * *
삼에스 생명 공학 연구소.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삼에스 생명 공학 사장과 도롱뇽 프로젝트 책임 연구원인 홍동하 팀장이 연구원 입구에서부터 태범을 맞이했다.
다른 연구원들도 태범의 방문을 하나같이 미소로 환대해줬다. 그들은 같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자가 아닌 연예인을 보는 흥미 가득한 시선으로 태범을 보고 있었다.
“제가 자주 찾아와서 연구원들이랑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죄송하네요.”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태범은 삼에스 생명 공학 사장과 대화를 나눴다.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바쁘신 분이 어떻게 여기를 자주 찾아옵니까? 지금도 충분히 대화가 잘 이뤄지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 아닌 것과 느낌이 다르지 않습니까?”
“오늘 찾아와주신 것만으로도 저희는 정말 감사합니다.”
“대신 제가 오랜만에 이곳에 온 기념으로 선물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선물이요?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하. 지금 말로는 이러셔도 보면 깜짝 놀랄걸요?”
태범은 사장에게 기대감을 잔뜩 심어주더니 임원들과 함께 3층 회의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