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영국 분자 생물학 연구소.
“여기에서 오는 의뢰는 모두 거절해주셨으면 합니다.”
“TB…… 삼에스?”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분위기. 중대한 사안이니 잘 처리해주길 믿습니다.”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공간에서 두 남자가 만나고 있다.
한 남자는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외부에서 들어온 연구 의뢰를 담당하는 직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자로 잰 듯 다리미로 곱게 다려진 양복을 입은 남자였다.
둘은 한마디를 던질 때마다,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지나가는 쥐새끼조차 의식할 정도로 민감했다.
“안 그래도 그쪽에서 염기서열 분석 의뢰가 들어왔긴 했습니다.”
“뭐라고요? 그러면 진작 저희한테 말을 해야죠.”
고요하고 은밀한 분위기가 단 한마디에 깨졌다. 남자는 눈동자를 치켜뜨며 연구원을 노려봤다.
“안 그래도 연락은 드리려고 했습니다.”
“삼에스 맞죠? 그 TB 밑에 있는.”
“네, 저희가 소유하고 있는 초고속 염기 서열 분석 장비를 이용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정부 승인도 끝났고요.”
“그놈들도 참. 빠르긴 빠르군. 알았어요. 거기서 들어오는 거 싹 다 거부하세요.”
남자는 손을 강하게 휘저으며 삼에스 생명 공학에 대한 격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연구원은 난감한 듯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근데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커서, 이거 쉽게 거절할 수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연구원은 미간을 좁힌 채 걱정스러워했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를 소리 나게 내려치더니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거절하겠다는 겁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남자의 단 한마디를 했지만, 그 속에는 강한 협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칼만 들었지 않았을 뿐, 말에는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날이 시퍼렇게 서고 있었다.
기가 눌린 연구원은 말을 더듬더니,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저희랑 연을 끊으면 어떻게 되시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 네,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보는 눈이 많아서 조금 위험할…….”
“어허…… 그렇게 일일이 따져서 어떻게 일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자칫하다가 저희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아니요. 제 말대로 하세요. 아무 일 안 일어납니다.”
“그래도…….”
“저희는 같은 배를 탄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망하면 당신도 망하는 것이고, 당신이 망하면 저희도 망하겠죠.”
남자의 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냉정했다.
상황이 어찌한들 그가 원하는 건 단지 하나, 도롱뇽 프로젝트의 실패였다.
* * *
삼에스 생명 공학 연구소.
“도대체 왜 연구 의뢰가 거절당한 겁니까? 예산은 얼마든지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죄송합니다. 스케줄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아니, 저번에 통화할 때까지만 해도 정부 승인만 있으면 가능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내부 사정상 스케줄이 바뀌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저희도 당연히 요즘 이슈에 있는 도롱뇽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죠. 하지만 사정이 이래서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떻게 없던 스케줄이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 겁니까?”
“더 이상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연구 스케줄 또한 보안 사항이니 말이죠. 죄송합니다.”
“아우!”
전화를 마친 홍동하 팀장이 주먹을 책상 위로 내리꽂았다. 그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며 분노를 힘겹게 삼켰다.
“이런 개자식들. 어디서 거짓말을 치고 있어.”
홍동하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단단한 쇠방망이로 말이다.
홍동하 팀장의 입에서는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 대한 욕이 맴돌았다. 그리고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열을 내며 부하 직원을 호출했다.
“네? 연구가 거절당했다고요?”
홍동하 팀장의 부하 직원, 유승진 책임 연구원은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역시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팀장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방금 영국에서 연락이 왔어.”
“아니, 영국 정부의 연구 승인도 났는데 연구소에서 거절을 하다니요, 무슨 이유죠?”
“일단 이유는 현재 진행 중인 연구의 스케줄을 고려해서 연구 요청을 반려했다고 하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갑자기 왜 그런데요?”
“내 말이! 이 새끼들이 정말.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도롱뇽 프로젝트가 외부로 새어난 사건부터 시작해 연이은 문제에 홍동하 팀장은 속에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지금껏 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해왔지만 이번 프로젝트처럼 시작부터 삐걱 거리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다.
책임자라는 직책을 달고 초반부터 문제에 직면하는 건 끔찍한 고통이었다.
“갑자기 대답을 바꾸고 저희 연구를 거부하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리고 저희 프로젝트가 보통 프로젝트도 아니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데요. 이거 아무래도 저희 모르게 어디선가 물밑 작업이 이뤄진 것 같습니다.”
“역시 승진이 너도 같은 생각이었구나.”
유승진 연구원의 말에 홍동하는 눈동자를 번뜩이더니 격하게 반응했다.
둘 모두 생각이 같았다.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이렇게 갑자기 변화된 태도에 한 가지 합리적인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디선가 압력이 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다.
시장은 제로섬(zero-sum) 게임이다.
같은 업종의 옆 가게가 잘 된다면 그 옆 다른 가게는 망하는 방식. 물론 공생 관계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도롱뇽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의료 산업이 크게 바뀐다는 것이다.
탈모약이 생긴다면 가발 산업이 망하고 감기 치료제가 생기면 이비인후과가 위태로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롱뇽 프로젝트가 성공한다면 그 작용으로 어려움에 처할 기업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곳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건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써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빨리 TB에 연락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 또 어떻게 대표님한테 이 말을 전해야 하나.”
홍동하 팀장은 차마 전화기에 손이 가질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난 연이은 문제로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는 한숨을 푹 쉬며 태범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몇 번이나 고민한 뒤에야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대……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 * *
영국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의뢰를 거부했다는 소식은 태범에게도 전해졌다.
백과사전 두께의 계획서를 검토하던 태범은 날벼락 같은 소식에 어처구니가 없어 계획서를 책상 위에 던져두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게 도대체?”
태범은 대표실 안을 천천히 걸으며 생각에 빠졌다.
‘너무도 수상하단 말이지.’
차라리 이유를 대려면 그럴싸한 이유를 댈 것이지. 분자 생물학 연구소에서 갑자기 스케줄 핑계를 대는 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순차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 시설에서 갑자기 변경된 스케줄이라니. 그건 그렇다 치고 아예 의뢰를 거부했다는 것에 의심이 갈 수 밖에 없었다.
스케줄이 바뀌었으면 바뀐 대로 날짜를 바꾸면 되는 건데 말이다. 이건 거절할 사유가 전혀 되지 않았다.
연구 의뢰에 필요한 모든 서류를 구비했었고 분자 생물학 연구소가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들어줬었다. 그리고 좋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계획이 틀어졌다?
거절 사유는 그럴싸했지만 태범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 방해 세력의 짓일 거야.’
몇 번이나 머리를 굴려 봐도 나온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 도롱뇽 프로젝트를 타깃으로 방해 공작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방해 공작은 아마도 산업의 기존 세력일 가능성이 컸다.
‘결국 밥그릇 싸움인가.’
태범은 씁쓸한 생각에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 *
[생물학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20%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21% 진행되었습니다.]
항상 그랬듯 고개를 돌려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스캐너를 작동했다.
스캐너가 발산한 불빛이 눈과 피부를 통해 들어와 지식을 머릿속에 때려 박는다.
‘때려 박다’라는 표현에 가까운 것이 정말 두뇌 속 기억 장치에 정보를 강제로 집어넣는 기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지식을 학습하려면 여러 번의 반복과 기억, 생각을 통하며 여러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스캐너의 지식은 아무런 절차 없이 바로 각인이 되었다.
그 기분은 말로 차마 설명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느낌이었다.
‘제프리가 이런 계기로 생물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구나.’
단지 학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스캔 인물이 가진 생물학과 관련된 잔지식까지 모두 스캔이 되고 있었다. 스캔의 대상이 왜 생물학을 좋아하기 시작했으며, 어떤 계기로 이 분야에 뛰어들게 된 것인지 까지 말이다.
해당 지식에 조금이라도 연관성이 있는 모든 정보가 들어오다 보니, 봐서는 안 될 사적인 지식까지 들어왔다.
가끔은 프라이버시 침해하는 건 아닌가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식의 스캔을 멈출 수 없었다.
지식처럼 확실하고 빠른 능력은 없다. 게다가 지식은 마약의 중독성처럼 끊기 어려운 달콤한 쾌락이 존재했다.
사람이 뭔가를 깨닫고 아! 하는 순간 나오는 쾌락, 그것이 지식을 스캔할 때마다 느껴졌다.
그렇게 스캔을 마친 태범은 진한 아메리카노 믹스를 한 잔 탄 뒤 후루룩 마셨다.
요즘은 스캔을 하는 도중에도 눈을 껌뻑거리며 졸 정도였고 그만큼 하고 있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능력을 사용하는 게 너무나도 좋아 어쩔 수 없었다.
잠을 줄이면서까지 스캔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스캔을 할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 기분은 태범에게 원동력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 * *
TB 금융 투자 대표실.
“대표님, 그러지 말고 연구 시설을 아예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게 어떻습니까? 외부 기관의 선택에 따라 저희 연구가 이런 식으로 멈추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염기 서열 분석 서비스 관련 기업을 인수할 예정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집 앞 슈퍼마켓 물건처럼 바로 돈 주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인수 과정에서 시간이 꽤 소모될 거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그 기간 동안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잖아요?”
태범과 삼에스 생명 공학의 도롱뇽 프로젝트 책임을 맡고 있는 홍동하 팀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홍동하와 태범은 같은 생각을 가지며 이번 의뢰 거절에 강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영국 분자 생물학 연구소의 의뢰 거절로 연구가 지체되며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만 했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기다리고 있는데. 전 1분 1초조차 버려지는 시간이 아까워 미치겠습니다.”
태범은 잔뜩 아쉬운 표정을 짓고는 두 손을 꽉 쥐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현실적으로 지금은 자체 연구밖에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베이징 생물 연구소에서는 아직 아무 이야기 없죠?”
“거기는 아예 대답조차 없습니다. 아무래도 중국 연구소는 외국 기업에게는 배타적이라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흠…… 그 방법을 쓸 수밖에.”
“네? 방법이요?”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줄 아시죠? 그중에 많은 사람들이 몸이 불편한 환자고 그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죠.”
“네…… 그렇긴 한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바로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건 사람들입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길을 누군가 막고자 하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럼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