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부모님 집에서 공허함을 달랜 태범은, 다시 강남 본인 집으로 돌아왔다.
12시가 되고, 항상 그래왔듯 스캐너를 작동시킨다.
태범에게 또 하나 습관이 생겼다 하면, 스캔을 작동시키기 전 주위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혼자밖에 없는 텅 빈 집이지만, 몇 번이나 이상한 기운을 느낀 태범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도 주위를 의식하게 되었다.
어쩌면 효준이 말한 대로 신경쇠약이 아닌가 싶어, 마음을 굳게 잡으려 해도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노래 기술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59% 진행되었습니다.]
……
[스캔이 60% 진행되었습니다.]
스캔을 마친 태범은 영국에 있는 캐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 친구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마음의 안정이 조금이나마 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태범 씨가 먼저 전화를 다 걸고.
“그냥 마음도 허전하고, 너 목소리 듣고 싶어서.”
-태범 씨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그래?
“어? 아무것도 아니야. 여자 친구 목소리야 매일 듣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니야?”
-나도 태범 씨, 빨리 보고 싶어. 우리 언제까지 이렇게 떨어져서 지내야 하지?
“일단 일이 완전히 자리 잡고 안정이 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지.”
-그 자리 잡고 안정이 된다는 게 도대체 뭘 말하는 데?
“그건…… 말로 설명하기가 좀 애매하네.”
서로 다른 국가에서 각자의 사업을 하다 보니, 만날 기회가 없었다.
사실은 사업을 어느 정도 일궈놓고 캐서린과 같이 살 계획을 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태범의 기준에서 사업이 안정됐다는 건, 더 이상 기업 성장에 대한 욕구와 욕심이 생겨나지 않을 때를 말했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태범의 눈에는 여전히 부족한 기업이었다. 아직 하고 싶고, 할 일이 넘쳐났고, 이를 주체하지 못하는 태범이었다.
태범은 캐서린의 질문에 어물쩍 거리다가 이내 사업 이야기로 대화 주제를 옮겼다.
“캐서린, IPO(기업 공개)는 잘 진행되고 있어?”
-기대치가 좋긴 한데,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있어.
“뭐가 문제인데?”
-일단 인기를 끌고 있긴 한데, 다른 SNS와 큰 차별화가 없다는 거야. 당장은 급속히 성장할 수도 있어도, 그만큼 거품이 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
“그렇긴 하지. SNS도 결국 계속 변화할 테니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혹시 딥멀티 기술을 이용해서 스낵피쳐에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면 어떨까?
“딥멀티?”
왜 딥멀티 이야기가 안 나오는가 했다.
언젠가 캐서린의 입에서 딥멀티 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IT업종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 딥멀티의 알고리즘을 이용하는 것이었으니, 캐서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게다가 캐서린의 남자 친구가 딥멀티의 핵심 인물이었으니, 그 유혹은 더 했을 것이었다.
-어차피 태범 씨도 스낵피쳐 대주주잖아. 같이 손잡고 일하는 것도 괜찮지 않아?
태범은 스낵피쳐에 개인적인 지분 0.5%를 가지고 있고, 현재 운용 중에 있는 TB샛별 펀드에서는 지분 30%를 소유하고 있었다.
0.5%는 초창기 취약점을 수정해주고 받은 지분인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설마 스낵피쳐가 이 정도 규모까지 성장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스낵피쳐의 상장 주관사를 맡고 있는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 스미스에서는 예상되는 기업 공개 물량을 약 60억 달러로 추측하고 있었다.
한국 돈으로 6조가 넘는 돈, 거기에 0.5%면 약 300억의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개인 지분과 TB샛별 펀드의 지분을 합치면 태범이 대주주로써 영향력을 지녔다는 건 사실이었다.
“근데 그건 나 혼자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런던대 측에서 의견을 물어야지.”
-태범 씨, 나를 뭘로 보고 그래!
“응?”
-내가 그쪽에 묻지도 않고, 태범 씨한테 말했겠어?
“오…… 런던대랑 벌써 이야기가 끝났나 보네? 꽤 계획적인데.”
-그러니까 모든 결정은 태범 씨한테 있는 거야. 어떻게 할래?
“알았어. 일단 나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생각 좀 하다가 다시 연락 줄게. 일단은 기업 공개에 집중하고! 알겠지?”
캐서린과의 전화를 끊고, 태범은 침대에 들어 누워 딥멀티와 스낵피쳐를 어떻게 융합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일단 기술적으로 뽑아낼 사업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아이디어가 샘솟을 정도였다.
단지 태범을 대신해서 손과 발이 되어, 스낵피쳐와 딥멀티 간의 업무를 담당해 줄 인물이 필요했다.
프로그래밍에 능통하고, 사업적 수단이 좋은 사람. 고민을 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한 사람 있었다.
* * *
“오랜만입니다. 임호진 씨.”
“정말 반갑습니다. 요즘 엄청 잘나가시던데요.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청바지에 흰색 티 한 장, 그것도 밥을 먹다가 흘렸는지, 김칫국 자국이 묻어 있기까지 했다.
그의 자유로운 옷차림을 보니 임호진은 여전히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음악 어플인 앨론 뮤직 창업자의 임호진.
그는 앨론뮤직을 크게 성공시키고, 모바일 플랫폼인 키키오에 앨론 뮤직을 매각해 큰돈을 만지게 된 사람이었다.
태범이 처음 운용했던 사모 펀드인 TB샛별 펀드의 첫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큰손인 백 여사와도 인연이 되어 사업 자금을 획득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 태범이 그를 다시 찾아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요즘 따로 하시는 일은 계신지?”
“아직 하는 일은 없고, 그냥 집에서 심심하면 프로그래밍이나 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지내고 있죠.”
“아! 그럼 백수 생활로 재미 좀 보시고 계시겠네요.”
“재미 좀 봤죠. 세상에 앉아만 있어도 돈이 들어오는데, 그보다 좋은 세상이 있을까요? 여태껏 못 놀았던 것 한 번에 보상받는 기분이던데요? 하하.”
“재미 좀 보셨으면, 이제 다시 일해 볼 생각은 없으세요?
“안 그래도 키키오 측에서 기술 이사 자리를 저한테 제안했는데, 거절했거든요. 거기 가봤자 프로그램 유지 보수나 책임지고, 재미없는 일만 할 것 같아서요.”
“잘됐네요. 그럼 재미있는 일 하나 드리죠.”
“네?”
태범의 제안에 몸을 살짝 기울이며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 훌륭하신 엔지니어의 손이 놀고 있는 건 너무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다시 한번 그 손을 사용하시는 건 어떤지요?”
“하하. 제가 뭐 도움이 될 거라도 있겠습니까? 앨론 뮤직 매각 이후에 거의 놀다시피 했는데요. 뭐.”
“그래도 그 실력이 어디 도망가겠습니까? 앨론 뮤직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드신 정도면, 분명 능력이 있으십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뭘.”
“딥멀티와 관련해 추가 프로젝트가 있을 계획인데, 그걸 담당해 주셨으면 합니다.”
“딥멀티라 하면…….”
“네, 맞습니다. 이번에 샘성 스마트폰 10시리즈에 탑재된 그 알고리즘이죠.”
옅은 미소만 띈 채 고개를 저으며 태범의 제안을 거절하던 호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딥멀티라는 단어가 나오자,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태범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그…… 그걸 저한테 맡기신다는 말이에요?”
“네, 맞습니다. 이제 좀 관심이 가나보죠?”
“하하하, 그거라면 무조건 오케이죠!”
* * *
TB금융 투자 기술 사업 팀 사무실
[삼에스 생명 공학, 도롱뇽의 세포 재생 유전자 개발, 강태범 대표의 새로운 프로젝트.]
도롱뇽의 세포 재생에 착안을 얻어, 사람 세포에도 유사한 기능을 적용할 수 있을지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삼에스 생명 공학은 TB금융 투자사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이며, 이번 프로젝트는 강태범 대표의 주도하에 이뤄졌을 거라 추측이 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세포 재생이 인간에게 적용된다면, 앞으로 수명 연장과 함께 의료계의 새로운 혁신을 가져올 거라 기대를 할 수 있다.
└정말, 사람의 신체도 도롱뇽 세포처럼 분화하면 엄청난 일 아닌가요, 그렇게만 되면 장난감 조립하듯 신체도 마음대로 바꿔 쓸 수 있을 텐데, 대박이네요.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연구되고 있는 줄기세포가 도롱뇽의 조직 재생과 유사한 겁니다. 누가 보면 엄청난 일이라도 생긴 줄 아시는데, 줄기세포 연구는 애들 장난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냥 프로젝트 착수한 것뿐인데, 너무 설레발들 안 떠셨으면 하네요.
└그래도 강태범이잖아요. 기대해볼만한 거 아닌가요? 윗분은 너무 부정적이시네요.
└오오오! 저 사람 대박이네!
└강태범 대표, 이쯤에서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 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문어발식 사업을 하는 것 자체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기업 가치 상승을 유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윗분 망상하지마세요.ㅋㅋ 샘성이 사기꾼이랑 계약을 하겠습니까?
“아니! 이 기사는 또 뭐야?”
인터넷 기사를 읽던, TB금융 투자의 기술 사업 팀 백석규 과장은 손바닥으로 책상 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TB금융투자에서 투자하고 있는 삼에스 생명 공학의 연구 프로젝트가, 아무런 예고 없이 기사를 통해 공개된 것이다.
혁신적인 기술 개발인 만큼, 언론 공개에 있어 논의를 거치고 이뤄져야 했지만, 투자사이자 대주주인 TB금융 투자에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단독 행동을 한 것이었다.
“박 대리! 박 대리! 이리와 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과장님.”
“이거 봐. 이거 도대체 뭐야?”
과장의 황급한 목소리에 다급히 다가온 박 대리는 과장이 가리키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기사를 보는 박 대리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어…… 이게 왜.”
“후…… 이거 분명 비공개 연구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프로젝트 시작할 때 비공개로 진행하기로 이야기된 건데.”
“이거 일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삼에스에 연락해서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백 과장의 불호령에 박 대리는 화들짝 놀라 몸을 곧게 세우며, 바로 삼에스 생명 공학에 전화를 걸었다.
* * *
삼에스 생명 공학, 본사.
“네네. 죄송합니다. 저희도 일단은 상황을 파악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진상이 파악되는 데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TB금융 투자의 기술 사업 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도롱뇽 프로젝트 책임자인 홍동하 팀장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머리에 뿔이 달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상을 잔뜩 지은 채 불호령을 내렸다.
“아니, 누가 도롱뇽 프로젝트, 이거 언론에 흘린 거야?”
큰 성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쉬쉬하기로 했던 프로젝트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공개돼 버리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홍동하 팀장은 씩씩거리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전 팀원을 급하게 사무실로 호출했다.
“이게 왜 와이TV 기사에 뜨는 겁니까? 누가 여기에다가 정보 흘렸어요?”
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팀장은 호통을 치며 진상 파악에 나섰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홍동하 팀장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팀원들 모두 기가 잔뜩 죽은 채 팀장의 눈치 보기에 바빴다.
그렇게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던 와중, 팀원 중 한 명이 손을 들며 말했다.
“팀장님, 그게…….”
“뭡니까. 아는 거라도 있어요?”
“사실 저희 연구원 중 한 명이 개인 인터뷰를 하다가, 실수로 서류를 떨어뜨리고 오는 바람에 그게 노출됐다고 합니다.”
“뭐? 그게 말이 돼요? 누가 그런 건데요.”
“아. 그게…….”
“똑바로 말 안 해요?”
“저기…… 문재영 연구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