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어찌 된 일인지 비상 출입구의 문이 잠겨있었다. 문고리를 아무리 흔들어 봐도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 열쇠 없습니까?”
태범은 다급한 목소리로 미용사에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곤 ‘모른다.’였다. 막힌 출구에 이미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연기는 점점 복도를 따라 퍼지기 시작했고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다.
몇 사람들은 가스로 가득 찬 중앙 계단을 뚫으려 하고 있다. 저 정도 농도의 가스를 4층에서 1층으로 내려간다는 건 사실상 낮은 성공 확률의 복불복에 가까웠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눈으로 볼 때는 숨만 조금 참으면 뚫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가스를 한 번만 들여 마셔보면 고통은 상상 이상이라는 걸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쪽으로 내려가지 마시고 위로 올라가세요!”
태범은 고함을 지르며 손짓을 크게 하고 나서야 연기를 뚫고 내려가려는 사람들을 겨우 말릴 수 있었다.
“형! 어떻게 해.”
“일단은 올라가자.”
검은색 유독 가스가 점차 강하게 올라오더니 복도가 점점 자욱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연기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인 위층으로 올라가는 수밖에 사람들은 중앙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 대피 시설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여기서 일하시는 분 아무도 몰라요?”
헤어샵의 미용사들뿐만 아니라 이 건물에 입주해 있는 그 누구도 대피 시설과 관련해 정보가 없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곤 불을 피해 위로 올라가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된 게 이 건물은 비상구가 왜 다 닫혀있어!”
설상가상, 각 층의 비상계단은 모두 문이 잠겨있었다. 어쩌면 이미 비상계단마저 연기로 뒤덮였을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젠장,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는 아직 들리지도 않는다. 이러다가 모두 타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이 음습해 오고 있었다.
이제야 스캐너의 능력이 재대로 빛을 보고 있는데 차마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태범은 이 건물에서 탈출할 방법을 떠 올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머릿속에는 스캔한 인물들이 모여 각가지 생각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옆 건물과 거리는 3m, 이걸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나.’
‘완강기나 사다리 같은 대피 도구는?’
‘발화 정도와 이곳까지 화염이 도달할 시간은?’
사람이 목숨이 달리면 초인적인 힘이 발휘된다고 태범의 능력은 평소보다 매우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컴퓨터의 연산 속도를 강제로 올리는 오버클럭처럼 태범도 살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다 하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기 밧줄 있는데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기다란 빨간색 밧줄을 가지고 왔다. 이 건물에 등산 용품을 파는 매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산악용 밧줄이 있던 것이다.
‘밧줄이라.’
태범은 남자가 가져다 준 밧줄을 만지작거리며 이것을 이용해 이 건물을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바로 밑으로 내려가기에는 위험하고…….’
밧줄을 타고 1층으로 바로 내려가는 건 위험해 보였다. 이미 밑층은 불길에 휘말렸고 유독 가스가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상황이었으니 자칫 지옥불로 뛰어드는 자살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태인아 저 옆 건물로 이동해서 이 밧줄을 묶을게. 내가 만들어준 밧줄로 한 명 씩 타고 내려 보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보기나 해.”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태범은 당장 남자가 가져온 밧줄을 가지고 매듭을 매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매듭 매는 방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물리적, 수리적 능력을 통해 완벽한 매듭 매기 공식을 떠올렸다.
절대 오차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 태범은 온 정신을 매듭에 집중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매듭 하나가 만들어졌다.
태범은 복도 끝에 있는 통유리를 소화기로 강하게 내리쳤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다들 어리둥절해하는 동시에 불안에 떨며 태범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소화기가 유리에 부딪힐 때마다 조금씩 금이 가더니 마침내 쨍그랑하고 유리가 부서졌다. 여전히 틀에 붙어있는 유리마저 다 떼어내고 나서야 태범은 소화기를 바닥에 내려놨다.
“어…… 어!”
유리를 깨고 난 후 연이은 태범의 행동에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며 당황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놀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태범은 밧줄 한쪽을 가지고는 복도 중간에서 뛰어오더니 풀숲의 메뚜기처럼 펄쩍 튀어 오르며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저 사람 미친 게 아닌가 하는 눈빛으로 사람들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들의 눈에 보이는 건 반대편 건물 난간에 매달려있는 태범이었다.
조금이라도 손을 놓았다가는 수십 미터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은 위급상황 하지만 태범은 태연하게 난간 위로 몸을 들어올리며 건물 안으로 이동했다.
요즘 운동을 많이 쉬긴 했지만 여전히 태범의 몸에는 이소룡의 힘이 존재했다.
강한 허벅다리의 힘의 높은 탄성은 뛰는데 도움을 주고 광배근은 난간에 매달리는데 힘이 돼줬다. 어쩌면 묘기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반대편 건물로 들어간 태범은 본인이 가지고 있던 밧줄을 기둥에 묶었다. 그리고는 방금 전 같이 있던 화재 건물 안의 사람들에게 외쳤다.
“아까 만든 매듭을 걸치고 이쪽으로 한 분 씩 넘어오세요!”
미리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일렬의 과정은 전혀 망설임 없이 이뤄졌다.
건물과 건물 사이 하강 사선으로 연결된 밧줄은 마치 줄 타고 내려가는 ‘집라인’의 형태가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처음에 허술해 보이는 이 밧줄을 못 믿겠는지 망설였다.
태인이 먼저 시도를 해서 옆 건물로 이동하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밧줄을 이용해 옆 건물로 넘어왔다.
그렇게 5명의 사람이 검은 유독 가스가 차 오르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넘어 올 수 있었다.
“살았다!”
탈출의 성공한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기뻐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태범과 같이 있던 다섯 사람만 탈출했을 뿐, 많은 사람이 타오르는 건물 안에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윙이잉. 위잉잉.
태범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나서야 소방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화재 현장의 골목길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위층에 아직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빨리 들어오세요!”
소방차가 골목길에 불법 주차된 차량으로 진입을 하지 못 하고 있다. 미국이었으면 벌써 주차된 차량을 밀고라도 들어왔을 텐데.
대한민국은 아직 이와 관련된 법이 없어 함부로 남의 차량을 훼손할 수가 없었다.
확성기로 차량 번호를 외치거나, 유리에 붙은 번호로 연락해 차주를 부르며 차량을 이동시킬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냥 밀고 들어오시라고요!”
이 꼴을 보고만 있기에는 너무도 답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불도저로 다 밀어버리고 싶지만 현실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제가 다 보상해드릴 테니, 그냥 다 밀어 버리고 들어오세요! 지금 차가 중요합니까?”
불은 점점 활활 타오르며 건물은 재가 되고 있는 와중에 더 이상 볼 수만은 없었다. 태범은 소리를 지르며 소방차를 유도했다.
“어! 저 사람 강태범 대표 아니야?”
“어디? 어! 정말이네. 샘성 스마트 폰 그…….”
“어. 맞네. 맞아!”
소방관들은 얼굴이 시껌둥이가 된 채 손짓을 하는 태범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태범을 신뢰했는지 소방차는 태범의 말대로 주차된 차를 강제로 밀어붙이며 골목길로 진입했다.
소방관들을 일제히 건물을 향해 소방호수를 들어올리며 물을 쏟아부었다.
최근 대형 화재로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소방관들은 그 어느 때보다 구조에 적극적이었다.
다행히도 불을 빠르게 진화가 가능했고 건물 위쪽에 있던 사람들은 소방 사다리와 옆 건물에서 줄을 연결해서 사람들을 신속히 구출했다.
가슴을 졸이며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태범은 모든 구조가 마무리됐다는 소방관의 말에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마무리되고 집에 가려던 찰나 혹시나 유독 가스를 마셨을 수도 있다고 하니 구급대원의 권유에 태범과 태인은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다사다난했던 하루였다.
* * *
[압구정 건물 화재를 도운 TB 금융 투자 강태범 대표, 소방서 표창장을 수여 받았다고 합니다.]
“쉭! 하고 점프해서 옆 건물로 날아오르는데, 완전 날다람쥐를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소방차가 불법 주차 차량 때문에 진입이 어려웠는데 강태범 씨가 피해 차량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며 재촉을 하더라고요. 그러니 저희도 어쩔 수 없었죠. 게다가 화재 건물에는 아직 사람이 있다고 하니 차가 중요하겠습니까?”
화재 현장에서 태범의 활약상이 TV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현장에서 태범의 모습을 봤던 시민과 소방관 등의 목격자들은 하나 같이 태범에 대한 칭찬일색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샘성 10시리즈의 대성공으로 이슈 중심에 서 있는 태범이 또 다른 이슈를 낳아버리니 이건 그야말로 빅뉴스가 돼버렸다.
└ 강태범 대표를 국회로 보냅시다!
└ 이 사람은 무슨 이슈메이커인가요? 무슨 컴퓨터만 켰다 하면 새로운 기사가 뜨죠.
└ 차량 보상에 대해서 강태범 대표한테 물으면 말이 안 됩니다. 정말 그럴 생각이면 정부는 큰 반성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봤습니다. 강태범 대표님!
└ 이제 소방 기본법 제정돼서 곧 주정차 된 차량들 적극적으로 제거한다고 합니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시죠.
큰 상은 아니었지만, 기업인으로서 얻는 효과는 대단했다.
기업가하면 냉정하고 비열한 이미지가 있기 마련인데 이로써 부정적인 이미지를 싹 걷어내고 인간다운 면을 보여줄 수 있었다.
태범은 경영 능력을 인정받는 것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명예 또한 얻게 된 셈이었다.
이렇게 모두가 태범을 칭찬하는 분위기에서 이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뉴스에서 소식을 접한 부모님은 화들짝 놀라하며 태범에게 전화를 걸어 몸 상태를 물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본인 몸을 가장 먼저 신경 쓰라며 위험한 상황에 너무 나서지 않기를 말씀하셨다.
아무리 자식이 명예로운 일을 하더라도 부모님의 눈에는 자기 자식이 우선이었다.
태범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에 일단 다음부터는 본인 몸부터 챙기겠다며 약속을 하며 안심시켜드렸다.
하지만 또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이번 사건과 똑같이 하겠다는 태범의 생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 * *
소방 당국과 경찰의 조사 결과 화재는 고의적인 방화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 건물 복도에 있던 CCTV판독 결과, 누군가 천장 안에 가연성 물질을 뿌리고 불을 지른 것이 포착됐다고 한다.
현재 그 방화범을 추적하고 있다고는 하는데 아마 쉽지 않을 거로 보였다. 마치 귀신처럼 나타나 사라진 방화범은 CCTV 외에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서 본 듯한 레퍼토리.
‘요즘 나한테 이상한 일이 생기는 것 같은데.’
태범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일들이 짧은 시간 안에 몰아서 찾아오고 있었다.
저번 집에 들어왔던 유령 같은 도둑도 그렇고 지금의 방화범도 마찬가지 연이은 범죄가 짧은 시간 안에 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했다.
‘에이…… 설마 그래도 우연이겠지.’
태범은 애써 연이은 사건을 우연으로 넘기려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한 감정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찝찝함은 혀에 돋은 하얀 혓바늘처럼 태범을 자꾸 신경 쓰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