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병실에 들어간 태범이 인기척을 내니 침대에 누워있던 이근휘가 고개를 돌리며 태범을 쳐다봤다.
“어어. 강태범 씨, 아닙니까.”
이근휘 회장은 누워있는 침대를 90도로 세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TB 금융 투자의 강태범 대표입니다.”
“허허.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옆에 편하게 앉아요.”
“네.”
TV에서 보던 이근휘의 모습과는 달리 볼살이 쪽 빠진 것이 더욱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팔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의 손짓에 태범은 침대 옆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이번에 10시리즈가 아주 성공적이어서 기쁩니다. 대한민국에 이런 인재가 있었다니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근휘 회장은 아주 느린 노인의 말투로 말을 뱉어냈다. 태범은 최대한 상체를 침대 쪽으로 기울이며 그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영광입니다, 회장님.”
“사실 스마트 폰 시장이라는 게 기술적인 한계가 도달해서 힘들 줄 알았는데 어쩜 그런 대단한 기술을 만들어 온 겁니까?”
“그냥 뭐든 열심히 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좋은 결과가 이뤄진 것 같습니다.”
이근휘의 물음에 태범은 예의를 지키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근휘 회장은 천천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내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생을 경영자로 살아오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여러 일을 경험하며 생긴 능력이죠. 세상이 참 재밌는 게 뭔지 압니까?”
“재밌는 거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는데 실제로 사람은 한 번 만나보면 그 사람이 후에 어떤 사람이 될지 한눈에 보인다 말이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속은 개털인 사람이 있는 반면 입은 굳게 다물고 있지만 속에는 강심(強心)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죠. 제 눈에는 그게 다 보입니다.”
이근휘 회장은 본인의 사람을 보는 혜안(慧眼)에 대해 자화자찬을 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태범은 전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뭐가 됐든 기업가로서 큰 성과를 이룩한 인물이었으니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네, 맞습니다. 회장님에게 그러한 능력이 있으셨으니 샘성을 대한민국의 최고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내 뜻을 쉽게 이해해 주다니 역시 똑똑하군요. 아……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내 혜안으로 보는바. 태범 대표는 분명 앞으로 대성할 겁니다.”
이근휘 회장은 허탕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태범의 앞날을 점찍어 줬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운이 좋네요. 회장님에게 점까지 받아보다니 말이죠.”
“허허.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복 하나는 날 못 따라 올 겁니다. 이래 봬도 샘성의 역사를 바꿀만한 특별한 행운의 사건도 있었다. 사업을 하며 여러 귀인들 덕분에 이렇게 샘성이 번창할 수 있게 됐죠. 그리고 오늘 이렇게 대한민국의 인재를 만나는 게 얼마나 큰 복이겠습니까? 운이 좋은 건 이 본인입니다.”
“그래도 복보다는 모두 회장님의 노력과 일궈낸 결실이 아닙니까? 사업 전체가 흔들릴 때, 샘성 전자를 혁신적으로 싹 바꿔서 지금의 샘성을 만드셨는데 그때 당시 제가 어려서 잘 모르지만 들어보면 대단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의 성공 역사를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나왔던 여러 기업인들 중 가장 비중 있게 다뤘던 인물이 이근휘 회장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90년대 초, 샘성 전자의 경영 위기가 찾아왔을 때 이근휘 회장의 기업의 세계화를 선언할 때였다. 그동안 저가 제품만을 생산했던 운영 방식을 기술력을 중요시하는 기업으로 탈바꿈 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이끈 것이다.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차마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꼭 그런 건만 아닙니다. 그때 내가 기업 세계화를 선언할 수 있었던 건, 내게 행운이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행운이요?”
“어이구, 미안한데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죠.”
“아…… 네, 알겠습니다.”
이근휘 회장은 신나게 이야기를 하다가 뭔가 아차 싶었는지 대화를 끊었다. 아마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궁금하긴 하지만 더 이상 묻는 건 실례가 아닌 것 같아 대화 주제를 바꿨다.
“회장님, 그럼 앞으로 경영에 참여하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투자자다운 태범의 질문이었다.
몸이 불편해 경영 일선에 물러난 건 확실시 된 것이지만 혹시 모를 앞으로 샘성 그룹의 회장으로서 행보가 궁금했다.
“난 남은 여생 여기서 TV 드라마나 보고 끝내야지. 이 몸으로 뭘 더 하겠습니까? 앞으로 내 아들이 내 몫까지 잘 해줄 거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도 회장님이 건강을 찾으셔야, 샘성의 직원들도 더 파이팅 하지 않겠습니까?”
“에이, 나이 다 먹고 힘없는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난 그저 남은 인생 이렇게 살랍니다.”
이근휘 회장은 더 이상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초연한 태도를 보니 역시 아무리 강한 사람이었어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회장은 딱히 뭔가를 제안한다거나 목적이 있어서 태범을 이곳에 부른 건 아니었다. 10시리즈 성공에 대한 감사함과 앞으로 샘성과의 깊은 관계를 기대하는 말을 할 뿐이었다.
앞으로 뭘 하고 어떻게 살아갈지 형식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주치의가 들어와 휴식 문제로 대화는 마무리가 됐다.
태범이 병실을 떠나기 전 이근휘 회장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샘성 그룹의 회장으로 이번에 10시리즈 성공에 큰 기여를 해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깊은 인연이 돼주셨으면 합니다.”
* * *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
“진짜 아무거나 골라도 돼?”
“가격 신경 쓰지 말고 아무거나 고르라니까. 대신에 나중에 네가 잘되면 나한테 사줘야 해. 알지?”
“알았어!”
태범과 태인은 압구정에 있는 백화점 안을 거닐고 있었다. 평소 다니던 일반 아울렛과는 다르게 값비싼 명품 매장이 즐비해 있고 고급 상품들이 진열돼있었다.
“이제 태인이 너도 엄연한 사회인이야. 자리에 맞춰 품위를 지킬 필요가 있어.”
태인이의 웹툰이 포털 사이트에서 1위를 하는 등 인기를 유지한 덕에 각종 콘텐츠 사업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로써 태인이는 대중들이 인정한 웹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다.
언제까지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범은 태인이에게 사회생활의 기념으로 정장을 맞춰주기 위해 백화점을 찾은 것이었다.
“이거랑, 이거, 이거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탈리아의 유명 명품 의류 매장, 상품의 가격표에는 0을 세기도 힘들 정도로 붙어있지만 태범의 선택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매장 매니저는 해맑게 웃으며 태범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다녔다. 선택 된 상품을 체크하며 포장까지 해놓는다.
태범은 마이클 잭슨이 했던 쇼핑 방식을 즐겼다. 엄청난 부를 거머쥔 마이클 잭슨이 쇼핑할 때 가격은 전혀 따지지 않은 채 마음에 드는 상품이 있으면 손가락으로 지목하며 쓸어 담기 쇼핑을 하곤 했다.
지금 이러한 행위를 태범이 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가격표 따위는 볼 필요가 없었다. 마음에 드는 상품이 있으면 그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됐다.
“형, 이것도.”
“응, 사.”
돈을 너무 좋아하면 속물이라 여겨지곤 하지만 돈이 좋은 건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불어난 엄청난 부는 돈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최근 태범은 ‘무언가를 사고 싶다.’라든가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잊은 채 살고 있었다. 태범이 소유한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유욕에 대한 한계를 넘었을 때 소비에 대한 망설임을 없게 만들었다.
오히려 가격에 신경 쓰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것 자체가 태범에게는 비효율적 상황이 온 것이다. 마치 빌게이츠가 땅에 흘린 100달러를 줍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마치 할리우드 스타가 쇼핑을 하고 나온 것처럼 매장을 나오는 태범과 태인의 손에는 쇼핑백이 가득 들려있었다.
돈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소비를 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과소비한 건 아니었다. 태범의 기준으로 일반 사람이 티셔츠 한 장을 산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내려가서 밥 먹고 가자. 뭐 먹을래?”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아무데나? 그래. 그럼 김밥지옥 가서 김밥에 라면이나 먹자.”
“아니, 그건 빼고.”
“아무데나 가자며?”
같은 핏줄의 형제가 아니랄까, 음식 하나 선택하는데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결국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가기로 합의를 보고 백화점 지하에 있는 수제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둘은 배가 고팠는지 햄버거가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 쇼핑을 하는 것도 나름 에너지가 소모되는 활동이었다. 남자란 쇼핑을 즐기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종족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식사를 마치고 또 다시 이동한 곳은 근처 헤어샵이었다. 남성 커트만 3만원하는 조금 비싼 미용실이지만 태범은 이번에도 과감히 카드를 내밀었다.
태인이 머리를 자르는 동안 태범은 커피를 한잔 들이키며 미용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푹 빠져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작사 작곡 능력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음악을 받아드리는 데 한층 감각적이었다. 심지어 음악을 분석하며 어느 부분이 좋고 안 좋은지를 구별하고 있었다.
“저기 강태범 대표님 맞으시죠? 사인 좀 해주세요.”
옆에 대기 하고 있던 젊은 여성 손님이 태범을 알아봤다. ‘어머 어머!’ 거리며 눈을 크게 뜨며 놀라고 있다. 길가다 연예인이라도 본 듯한 태도였다.
히죽거리며 놀라워하는 여성에게 태범은 펜을 꺼내 들며 여성의 수첩 위에 펜을 가져다 댔다.
그때였다.
뜨르르릉.
‘불인가?’
고막을 강하게 때리는 화재 알림 소리에 태범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실제 화재 경보가 오작동으로 잘못 울리는 경우를 많이 겪다 보니 잠시 아리송한 상태였다.
뜨르르릉.
하지만 알림 소리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길어졌다. 그리고 화재의 사실을 알리는 남자 목소리가 복도를 울려 퍼졌다.
“불이야!”
화제 알림은 오작동이 아니었다. 정말 이 건물에 화재가 난 것이다.
순간 헤어샵에 있는 모든 미용사들은 하던 행동을 멈췄다. 머리를 자리던 손님들도 가운을 풀어헤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동태를 살폈다.
태범도 마찬가지 펜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외쳤다.
“다들 나가요!”
창밖 뿌연 화재 연기가 용처럼 솟아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재에서 1분 1초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오간다. 더 이상 상황파악이나 하고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태범은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과 밖으로 이동했다.
태인이 역시 잘리다 만 머리를 한 채 헤어샵 밖으로 이동했다.
“계단으로 이동하세요!”
3층인 이곳에서 몇몇 사람들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재 시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자살 행위랑 다름없었다. 혹시나 정전이라도 돼서 엘리베이터가 멈추면 그날로 그곳이 본인 무덤이 될 테니 말이다.
태범은 사람들에게 강한 손짓과 함께 비상계단으로 유도했다.
1층에서 시작된 연기는 온갖 건물의 구멍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두들 연기를 피하며 황급히 비상계단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사람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계단 문이 잠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