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화면에 나타난 설계도는 선시티에서 개발했던 리튬이온 배터리와 유사했다. 하지만 성능은 선시티의 배터리에 비하면 발끝도 못 미치는 수준. 설마 이걸 자랑이라고 보여주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맞습니다. 리튬 이온 배터리 설계도. 근데 이거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나십니까?”
방금까지 미소를 유지하던 데론 머스크의 표정이 이상했다. 눈썹을 세우더니 시비 어조로 질문을 건네는 게 아닌가. 태범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선시티와 함께 일하면서 에너지 문제에 대해 많이 연구를 해봤는데 그때 사용하던 기술과 흡사하네요.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좀 아쉬운 부분이 있네요.”
“그렇죠? 선시티에서 내놓은 리튬 이온 기술에 비하면 쓰레기 수준이죠.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쓰레기까지는…….”
데론 머스크가 연구원들 앞에서 본인 회사의 연구물을 ‘쓰레기’라고 칭하며 깎아내리니 태범을 당황스럽게 했다. 아마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려는 듯한 언어 사용으로 보였다.
데론 머스크는 키보드의 다음 화살표 버튼을 누르며 스크린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참고로 선시티보다 연구 시작은 저희가 빨랐습니다. 그것도 아주 앞서서 말이죠. 한데, 흡사한 것도 아니고 똑같은 기술을 가지고 선시티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엄청난 성과를 이뤄냈더군요. 말이 되나요?”
“하하. 그럼 저희가 드림 에너지 사의 기술을 베끼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데론 머스크의 말투와 언어 사용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태범은 어이가 없어 가볍게 웃음을 뱉으며 당당함을 보였다.
데론 머스크의 표정에서 더 이상 단 1의 미소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굳어버렸다. 더욱 심각해진 분위기에 태범의 입꼬리도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성과는 선시티 쪽에서 먼저 냈지만 최초의 기술 아이디어는 저희가 독자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근데 갑자기 왜! 이 기술이 선시티에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네요?”
“뭔가를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데론 머스크는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데론 머스크가 태범을 느닷없이 이곳은 초대한 것은 호의가 아닌 목적을 지닌 해명을 듣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말이죠?”
“데론 머스크 씨가 저랑 생각이 많이 비슷하셨나 봅니다. 선시티에서 개발한 리튬 이온 기술의 원천은 모두 제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이 사실만큼은 제가 장담합니다.”
태범의 데론 머스크는 대답을 호락호락하게 넘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간을 모은 채 깊게 파인 눈으로 바라보는 게 불만 가득한 표정이었다.
“머릿속에서 나왔다고요? 이걸 전부요? 허허.”
“장담하는데 드림 에너지와는 전혀 관련 없습니다. 오히려 선시티 측에서도 중국에 샹차이라는 기업에 기술이 유출되는 바람에 고생 많았습니다. 설마 저희가 샹차이처럼 행동하겠습니까?”
데론 머스크의 어이없다는 웃음에 태범은 전혀 당황하는 것 하나 없이 당당한 모습으로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물론 말은 그러시겠죠. 하지만 논리적으로 기술의 베이스가 너무 같았습니다. 도저히 보고 베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저도 그런 우연이 대해서는 신기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머스크 씨가 상상하는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드림 에너지사의 정보를 제가 어떻게 얻겠습니까?”
데론 머스크는 이제 대놓고 ‘베꼈다‘라는 표현을 쓰며 본색을 드러냈다.
태범은 여전히 본인의 생각을 단호하게 말하며 데론 머스크의 생각을 반박했다.
‘그냥 대충 말로는 안 되겠는데.’
단단히 묶인 오해는 쉽게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범은 인물들의 능력과 함께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대처 방안을 고민했다.
‘거짓말 탐지기를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실을 어떻게 설명해줄까 생각하던 찰나 주위를 살피던 태범은 말을 꺼냈다.
“정 못 믿겠다면, 그때 제 머릿속을 모두 보여드리면서 증명을 해보이죠.”
태범은 연구실 한편에 한쪽에 붙어있는 화이트보드에 다가가 보드 마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화선지 위에 난을 치듯 하나의 선을 휘갈겼다.
“뭐하시는 거죠?”
“이게 제 아이디어의 원천이었습니다. 머리카락.”
“머리카락?”
“네, 이번 개발의 핵심인 나노 와이어는 단 머리카락이라는 미세한 선을 떠올리고 생각해 낸 것입니다. 물론 믿기 어렵겠다는 것은 저도 알지만 어쨌든 사실입니다.”
아이디어는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태범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아이디어의 원천에 대해 데론 머스크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건 내가 믿기에는 좀 어렵겠는데요?”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믿기 어려우실 거라고. 하지만 원하시면 가능한 최대로 설명해드리죠.”
“그래요?”
데론 머스크는 말을 툭 던지며 냉담하게 대했다. 태범은 다시 보드 마카를 집어 들고 화이트보드 위에 그림과 공식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쓱쓱.
마치 학습지를 보는 듯한 완벽한 이미지가 화이트보드 위에 그려지고 있다. 양극, 음극, 전해질의 화학적 반응을 이미지화가 되어 직관적으로 뭘 의미하는지 알기 쉽게 표현되며 그 옆에는 이론적 공식이 아주 작은 오차도 없이 완벽히 적혔다.
“피지가 자외선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떠올리며 플렉시글라스라는 코팅제를 떠올렸습니다. 아! 물론 이것 또한 예기치 못 한 제 상상력에서 나온 아이디어죠.”
어찌 보면 아이디어의 원천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화장실에서 대변을 보면서도 나오는 것이 아이디어였다. 눈치 없이 아무 때나 튀어나오는 것이 아이디어였으니 말이다.
데론 머스크도 슬슬 납득이 되는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태범의 설명을 지켜봤다.
“사실 전구의 필라멘트만 봐도 나노 와이어에 대한 기술은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디가 무조건 드림 에너지 것이라고 단정 짓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태범이 아이디어 창출과정을 모두 설명하고, 그의 말에 모두 반박하자 데론 머스크는 입을 쉽게 열지 못했다.
그는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모습을 보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우연이란 말이죠…….”
방금 전 쩌렁쩌렁했던 데론 머스크의 목소리는 이제 다 죽어가는 소리로 말끝을 흐리고 있었다.
“장담하는데 저는 드림 에너지사의 기술을 훔쳐 썼다거나, 다른 사람의 지적 재산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정 문제가 있으시면 법적으로 해결하셔도 됩니다.”
태범은 더욱 강하나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그러자 데론 머스크는 살짝 기가 죽었는지 한 발짝 물러서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내가 오해를 했을 수도 있겠군요. 생각이라는 게 이렇게 겹칠 수가 있었다니 참 신기하네요.”
“신기하긴 하죠.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오해를 푸셨으면 다행입니다.”
데론 머스크가 한 발짝 물러서며 납득하는 태도를 보이자 태범도 굳은 표정을 풀고 부드러운 말투로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해를 해서 미안합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제가 바보 같이 굴었네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어떻게 머스크 씨가 바보입니까? 허허.”
그렇게 데론 머스크의 오해가 풀린 이후, 서로가 가진 지식을 공유하며 대화를 나눴다. 데론 머스크는 연구소 곳곳을 안내하며 에너지 기술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그의 혁신의 절반은 자신감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전 앞으로 혁신적인 신재생 에너지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머스크 씨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분야에 사업을 벌이실 생각을 하셨는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데론 머스크의 설명을 듣던 태범은 그의 폭넓은 지식에 놀라워했다.
태범 본인이야 마법과 같은 기능을 가진 스캐너를 사용해 능력을 얻었다. 하지만 순수한 그의 능력은 인간으로서 정점에 달한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저 다양한 지식들을 학습했을까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요? 소문을 들어보니까, 이번 딥 멀티는 그저 부업에 불과했다면서요? 과학의 한 획을 그은 기술 이렇게 쉽게 얻어냈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천재적임 암기력에 예술 능력까지 무슨 영화에서 나오는 만능 캐릭터도 아니고 혹시 능력을 돈 주고 사는 가게라도 있는 거 아닙니까?”
본인의 칭찬에 데론 머스크는 한사코 손을 흔들며 오히려 태범의 능력을 높이 샀다. 그리고 능력 이야기를 하는데 태범은 능력(ability)이라는 단어에 시장이 철렁했다.
“네? 능력이요?”
“아아! 농담입니다. 보통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에 재능이 있는 건 드문데 참 신기해서 말이죠.”
농담이라지만 태범은 ‘능력’이라는 단어에 민감했다.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있는 비밀을 가진 자의 불안함이었다.
데론 머스크는 태범의 반응을 보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모든 대화를 마쳤을 때 연구소를 빠져나오며 다시 악수를 청했다.
“언제 달 여행이나 한번 같이 가죠. 그 날이 생각보다 금방 올 겁니다.”
“정말 재밌겠네요. 무조건 갈 테니 꼭 불러주세요.”
약속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달 여행이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농담으로 생각했겠지만 데론 머스크와의 약속은 현실이 보이고 있었다.
* * *
한국에 돌아왔을 때 TB 금융 투자는 더욱 뜨거운 이슈 속에 달궈지고 있었다.
태범에게 쏟아지는 언론 취재며 딥 멀티에 대한 기술 협약을 묻기 위해 전 세계 기업에서 문의가 들어왔다. 심지어 멀리 중동 왕자에게까지 연락이 왔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한참 쏟아지는 미팅 요청에 가장 바쁜 건 강태범의 비서인 강은미였다. 이제는 추가적으로 비서팀 인원을 구성할 정도로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대표님, 샘성 전자 최 실장님에게 연락 왔습니다.”
“네, 연결해주세요.”
한참 펀드 투자 기업과 관련한 서류를 살펴보던 중 연락이 들어왔다.
일반적인 연락은 사전에 내용을 조율하고 대화를 미뤄두지만 샘성 측에서 온 연락은 바로 받곤 했다.
“네, 최 실장님. 무슨 일로 전화 주셨죠?”
“대표님, 잘 돌아가셨습니까?”
“샘성 측에서 극진히 대해준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다행입니다.”
“최 실장님도 한국으로 돌아오셨죠?”
“네, 저도 대표님이랑 같은 전용기 타고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전화를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부탁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무슨 부탁 말이죠?”
“저희 회장님께서 강태범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병원으로 한 번 방문해주셨으면 합니다.”
최 실장에게 회장님이라면 단 한사람. 샘성 그룹의 이근휘 회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에 자세히 물었다.
“회장님이라면…… 이근휘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러면 알겠습니다. 시간 잡아서 다시 연락주시죠.”
태범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이근휘 회장과의 만남을 바로 승낙했다.
부로써 성공하겠다는 신념하에 열심히 위로 달려왔던 태범에게 대한민국 자본주의 정점에 있는 이근휘 회장을 만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 * *
샘성 측에서 제공해준 검은색 고급 세단을 타고 향한 곳은 샘성 그룹의 소속 의료 기관인 샘성 병원이었다.
관계자들의 안내를 받으며 병원 내 VIP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고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병원 18층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18층이 끝이 아니었다. 18층에 내린 태범은 계단을 통해 한층 더 올라가야만 했다. 엘리베이터로 갈 수 없는 19층은 삼엄한 경호와 보안이 이뤄지고 있었다.
한 층 전체가 VVIP 병실인 셈이었다. 경호원이 쫙 깔린 복도를 지났고, 그곳에는 집무실, 업무용 회의실, 비서실, 담당 의료실 등 다양한 공간이 존재했다.
병원이 아니라 고급 호텔에 온 기분이었다. 의료조차 부의 격차로 차이를 보인다는 게 한편으로는 씁쓸했지만 현대 사회가 돈으로 움직인다는 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저긴가?’
복도의 가장 끝부분에 위치한 병실 하나.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공간이 있었다. 비밀 요원이라도 되는 듯한 덩치가 산만한 남자들이 복도를 가로막는데 태범을 안내하는 실장과 대화를 나누고서야 그곳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병실에는 최첨단 의료 장비들이 주위에 놓여있고 그사이에 커다란 침대 하나가 놓여있다.
‘이근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남자.
태범은 그를 보자마자 단박에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한민국 제계 1위인 샘성 그룹의 회장, 이근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