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TB 투자 자문 사무실.
유리로 가려진 조그마한 회의실 그리고 대형 회의실, 외부 테이블, 심지어 업무를 보는 자리 옆에 의자를 끌고 와서는 앉아 있는 고객들.
회사는 TV광고를 보고 찾아온 고객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회사가 생긴 이후, 역사상 가장 바쁜 날이었다.
누구하나 쉬는 사람 없이 고객을 맞이하기에 바빴다. 성과는 곧 대가로 돌아오니 모두가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박 반응에 힘입은 태범은 기쁜 마음으로 잠시 회사를 들렀다.
“어! 저분 여기 대표님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
귀를 기울이며 상담을 받던 고객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태범에게로 쏠렸다.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 그들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차 있다.
“어머! 엄청 젊으시네요. 어떻게 저런 나이에 자수성가를 다 했을까?”
큰 회사를 책임지는 대표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젊은 외모는 호기심을 더하고 있다.
보통은 금융 회사의 대표라 하면 중년의 남성이 떠오를 테니 말이다.
미국의 실리콘밸리에나 있을 법한 젊은 CEO가 한국에도 나타났다는 것에 대해 모두가 신기하게 바라볼 때였다.
“저기 대표님한테 직접 자문은 받을 수 없나요?”
“죄송하지만 직접 받는 건 어렵고요. 그래도 저희 회사에서 이용하는 기본 자문 시스템이 대표님이 구축한 거라 사실상 대표님에게 받는 거랑 비슷한 효과입니다.”
“그래도 대표님한테 직접 받아 보고 싶은데 방법은 없는 거죠?”
“네, 죄송하지만 저희 대표님이 바쁘시다 보니 고객들은 개인별로 상담하게에는 아무래도 어렵습니다.”
고객들이 자주 묻는 말 1순위였다.
고객들은 회사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태범에게 직접 자문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태범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 들 육체는 단 하나.
모든 고객의 요구를 수용시킬 수는 없었고 대신 태범이 전해준 능력을 통해 직원들로 하여금 대리로 하여 고객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들 열심히 하네.’
식당이 손님으로 만석일 때 사장의 심정이 이러할까.
TB 투자 자문의 사무실을 한 번 훑어본 태범은 만족스러웠다.
사무실에 가득 찬 고객들을 보니 열심히 찍은 광고가 큰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에서 정말 뿌듯하다.
* * *
“로얄팰리스는 연예인이나 사회 고위층들이 많이 살다 보니 보안이 철저해요. 아까 들어오셨을 보셨다시피 외지인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 연예인도 살아요?”
“네, 실명은 말씀드리긴 어려우나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한류 스타부터 유명하신 분들이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분들이죠.”
“사실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게 그겁니다. 프라이버시. 보안에만 잘 신경 써주시면 좋겠네요.”
로얄팰리스의 전용 부동산 중개인이 태범에게 집을 안내하고 있다.
도곡동에 있는 로얄팰리스는 아파트 중에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아파트다.
누구나 이름을 들으면 알 만큼 유명한 아파트였고 외지인의 출입이 엄격히 제안된 곳으로 보안이 뛰어난 곳이었다.
태범이 이곳에서 집을 알아보는 이유는 모두 가족들 때문이었다.
태범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한 관심도 커진 상황. 그러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곤 했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언론사는 기본이었다. 돈을 기부해달라는 자선 단체 사업을 가장한 사기꾼들까지 태범의 인기와 능력에 더불어 한몫해보자는 사람들 있었다.
태범은 이로부터 가족을 지킬 책임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이 본인의 의지 없이 관심 받고 힘들어지면 이 또한 큰 문제이니 말이다.
결국 이 문제를 막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보안이 가장 뛰어나다는 아파트를 찾아 왔다.
사설 경비 업체가 상주하고 있고 수많은 CCTV가 아파트 단지에 설치 돼있는 그런 곳이다.
일이 벌어지고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기에 미리 완벽한 대비를 해두는 것이었다.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가족분이 살기에는 정말 좋을 겁니다. 이 아파트에서 프라이버시나 보안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고요. 분명히 만족하실 겁니다.”
“좋습니다. 계약하시죠.”
* * *
백 여사를 포함한 여사님들이 태범의 사무실을 다시 방문했다.
벽 여사의 수족인 윤우열 실장은 산세베리아가 담긴 커다란 화분을 들고는 사무실 한쪽에 놓고 사라졌다.
“산세베리아라고 사무실에 두면 미세 먼지도 빨아들이고 음이온도 발생해서 건강해 좋을 겁니다.”
“이런 거 가지고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에이, 뭘요.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저죠.”
백 여사는 사무실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아마 지금 태범만큼이나 가장 기분이 좋은 사람이 백 여사일 것이다.
선시티의 신기술 개발의 수혜는 사실상 가장 큰 금액을 투자한 백 여사에게 돌아간 상황이었다.
게다가 태범의 두 가지 사모펀드 모두 큰 금액을 투자하면서 백 여사는 거액의 수익률을 달성하고 있었다.
“요즘 광고 반응도 좋던데 많이 바쁘시겠어요?”
백 여사의 선물 증정이 끝나고 한성 식품의 사모님인 류 여사가 말을 꺼냈다.
“네, 반응이 좋다 보니까. 고객들도 많아지고 좋습니다.”
“저희 남편이 대표님한테 투자하고 싶어서 안달이에요. 저희가 얼마나 대표님의 펀드를 기다리고 있는데요.”
그렇다.
여사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태범의 또 다른 사모 펀드에 투자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만기일이 되진 않았지만 기존 두 개의 사모 펀드 모두 엄청난 수익률을 갱신하고 있는 상황. 이를 본 투자자들은 태범의 사모 펀드에 투자하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나마 태범과 친분이 있는 백 여사의 소개로 이곳에 온 여사들은 행운인 셈이었다.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요?”
여사님들의 칭찬에 괜히 쑥스러운 척을 해본다.
원래는 주는 칭찬을 굳이 마다하지 않고 당당히 받아들이려 했으나 요즘 와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능력이 점점 완벽해지다 보니 혹시나 인간미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도 들긴 했다.
그렇다 보니 가끔은 사람다운 모습도 보여주고 완벽에서 멀어진 사람처럼 보여줄 필요도 있었다.
“참. 예의도 바르셔라.”
한성 식품 사장의 부인, 류 여사가 미소를 지으며 손목 까닥거렸다.
“다들 제 펀드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 같은데 제가 뭐 하나 알려드려도 될까요?”
“네? 어떤 거요?”
“물론 사모 펀드도 괜찮은 투자처지만 제가 또 다른 걸 계획하고 있거든요.”
“또 다른걸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태범의 말에 여사들로 하여금 귀가 쫑긋 세워지도록 하고 있다.
본인이 운영하고 있는 사모 펀드가 아닌 새로운 투자라니.
이는 TB 자산 운용의 대표님 태범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폭탄 급 발언이었다.
“이 소문을 들었을라나 모르겠네요.”
“어떤…….”
“저희가 금융 투자 회사를 설립한다는 소문 못 들어 보셨나요?”
태범의 질문에 류 여사는 잘 몰랐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대신 옆에 있던 백 여사가 반응하며 입을 열었다.
“들었네요. 요즘 회사를 크게 확장하시려 하던데 저는 대표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역시 백 여사님은 잘 알고 계시네요. 네, 맞습니다. 저희 회사가 곧 증권사로 사업을 인가받을 계획에 있습니다.”
“그럼 금융 투자 회사와 관련해서 좋은 정보라도?”
돈 굴러가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듣는 백 여사답게 눈치가 아주 빨랐다.
그녀는 말투를 보아 태범이 뭘 말할지 예측하고 있는 눈치였다.
“눈치 채신 것 같은데, 바로 말하겠습니다. 전 저희 펀드가 아닌 이제 저희 회사에 투자해줄 투자자분이 필요합니다. 금융 투자 회사 설립을 위해 말이죠.”
금융 투자 회사, 즉 증권사를 설립할 요건이 되려면 엄청난 자기자본이 필요했다. 게다가 인적, 물적 자원 등 많은 절차가 까다로운 상황이었고 이를 커버하기 위해 필요한 건 결국 돈이었다.
“회사 주식을 매입하라는 건가요?”
“TB에 투자하라는 말씀이죠?”
태범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여사님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새로운 제안이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그렇게 태범은 여사님들과 함께 금융 투자 회사(증권사) 설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증권사 설립을 위해서는 회사를 거의 새롭게 구축해야 할 정도로 영업, 인사, 재무, 회계, 감사 등 기업의 많은 활동을 금융 감독원이 요구하는 요건에 맞게 재구축해야 하며 이 모든 게 결국 돈이었다.
“저기…… 대표님, 손님 오셨는데요.”
한창 여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비서인 강은미가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손님이 있을 땐 함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달랐다.
“이 시간에 약속한 사람 없을 텐데요? 그리고 지금 손님 계시니까, 약속 잡으시고 나중에 오라고 하세요.”
앞에 손님을 두고 다른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태범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비서에게 손짓을 하며 내보내려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강은미가 대표실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하고 있다. 난감한 표정에 쭈뼛거리며 그 자리에서 요지부동이다. 태범은 다시 한번 눈으로 사인을 보냈지만 문 앞에서 나가질 못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태범은 결국 다시 한마디 내뱉었다.
그러자 강은미가 천천히 태범에게 접근하더니 살며시 귀에 대고는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사님들은 그런 강은미의 귓속말이 궁금했는지 몸을 앞으로 숙이며 은근슬쩍 엿들으려 하고 있다.
“대표님, 손님이 왔는데요. 샘성 그룹의 부회장이라 하시는데…….”
귓속말을 들은 태범은 놀란 나머지 눈이 동그랗게 뜨고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샘성 그룹 부회장이요?”
설마 하는 말에 태범은 다시 한번 물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네, 샘성 그룹 부회장. 이재호 씨라고 하던데요.”
“그분이 여길 왜…….”
이재호 부회장이 이곳에 와있다니 믿기 힘들었다.
이재호이라 하면 누구나 알만한 재벌 이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벌 그룹인 샘성 그룹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시가총액만 300조 이상,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무대로 활동하는 기업이었다.
웬만하면 당장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건 눈앞에 있는 여사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아무리 급해도 사람 간의 도리는 지켜야만 했다.
일단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강은미에게 말했다.
“먼저 약속을 주라고 하세요. 지금 손님이 계시니까. 당장 만나기는 어렵다고 정중히 전달하시고요.”
* * *
TB 자산 운용 사무실 건물 앞, 검정색 고급 벤츠 차량에서 대기하던 이재호.
태범에게 말을 전하러 간 비서실장이 차 안으로 들어오고, 결국 만남이 거절당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뭐, 지금 만날 수 없다고?”
“네, 부회장님. 지금 강태범 대표가 손님을 만나고 있다고 다음에 연락을 달랍니다.”
“허허허.”
태범의 의사를 들은 이재호 부회장은 호탕한 웃음을 내뱉었다.
본인을 문전박대한 사람은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이없음과 낯선 상황이 뒤섞인 감정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샘성 그룹의 부회장이라는 직급으로 나타난다면 누구든 버선발로 뛰어나오기 마련이었는데 강태범 대표는 그러지 않았다.
사람이 판단을 제대로 못하는 건지 아니면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요. 그럼 약속은 잡을 수 있답니까?”
“네, 부회장님. 강태범 대표의 비서라는 사람한테 명함을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쪽으로 연락을 달랍니다.”
“강태범 대표. 역시 보통이 아니구만. 괜히 떠들썩한 게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