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카메라 감독 이성한.
그는 어릴 적부터 호기심이 많아 기계 다루는 걸 좋아했다.
그의 방에는 항상 분해된 기계들이 놓여있었고 심지어 고장 나지도 않은 기계의 내부가 궁금하다며 집안의 벽시계며 라디오, 비디오, 카메라 등 보이는 기계마다 족족 분해하며 가지고 놀았다.
그 때문에 집안에는 남아나는 기계가 없을 정도였고 부모님에게 혼이 나도 그의 호기심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의 벽 앞에 그의 호기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IMF로 집안이 기울어지며 그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돈을 벌기 위해 카메라를 붙잡았다.
그렇게 카메라맨으로 인생의 반을 살아온 그는 여전히 IT에 대해 관심이 많이 있었고 그런 그의 호기심이 오늘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여기에 말하면 되나요?”
“네, 버튼을 누르고 말하세요.”
딥 멀티가 설치돼 있는 컴퓨터 옆에 마이크가 하나 놓여있다.
카메라 감독은 어느새 본업을 잊어버렸는지 호기심 어린 어린아이의 표정을 하고는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씩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카메라 감독의 말이 끝나자 컴퓨터 스피커에서 딥 멀티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카메라 감독은 물론 옆에서 다 같이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오오’ 거리며 신기하게 바라봤다.
“너는 누구니?”
[저는 인공지능 딥 멀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럼 내가 누군지 아니?”
[딥 멀티를 이용하시는 사용자 님입니다.]
“내 말 이해하고 있는 거니?”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용자님의 언어를 통해 정보를 탐색하고 있습니다.]
“딥 멀티,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저에 대한 위치는 비밀 사항입니다. 다른 질문 부탁드립니다.]
“오오!”
카메라 감독은 옆에 서 있던 태범을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는 입꼬리가 점점 벌어지더니 환한 미소를 보였다.
“대표님, 이거 정말 제 말 알아듣고 있는 거예요? 진짜 인공지능 맞아요?”
“하하. 사실은 이미 입력된 정보로 대답하는 거예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인공지능은 아니에요.”
“그…… 그런데 제 말을 알아들었는데요?”
[뭐. 어떻게 보면 알아듣는다는 말이 맞긴 한데 사람의 신경 구조망처럼 완벽히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래도 이 정도면 엄청난 거 아닌가요. 요즘 제품들이 인공지능이라고 나와 놓고서는 사람 말 제대로 알아듣는 것도 얼마 없던데요.”
“잘 아시네요.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의 인공지능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존재하는 다른 것들에 비하면 꽤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죠.”
“대단하십니다, 대표님. 어떻게 금융업을 하시는 분이 이런 걸 다..”
“그냥 필요해서 개발해봤는데, 생각 외로 잘 나왔네요. 혹시 나중에 궁금한 거 있으면 놀러 오세요. 그때 제가 딥 멀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드릴게요.”
“정말요? 그럼 나중에 와도 될까요?”
“네, 따로 연락 주세요. 이런 쪽에 흥미가 많으신 분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아우! 감사합니다.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저런 큰 호기심과 반응이면, 굳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찾아가서라도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었다.
마치 재미있는 게 있으면, 친구나 남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딥 멀티를 본 카메라 감독의 리액션이 맘에 든 태범은 그를 다시 한번 초대해 딥 멀티에 대한 성능을 제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대표님, 이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촬영을 위한 사무실 내의 소품이 모두 세팅이 되었고 이제 촬영만을 남겨뒀다.
태범은 촬영 감독의 지시에 따라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이번에도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 한 번 해봤으니 아시죠?”
촬영 감독이 말한 표정은 최대한 스마트한 모습으로 일에 열중하는 표정이다.
이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능숙해진 태범에게 표정연기는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케이! 잘하셨습니다.”
이번에도 단 한방의 오케이였다.
연기와 관련된 능력은 하나도 없는데 이 정도라니 어쩌면 본인에게 연기는 숨겨진 능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다음은 직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찍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연기하는 게 쑥스러운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리고 있다.
“컷! 카메라를 의식하지 마세요. 그냥 평소처럼 일한다고 생각하시고 하세요. 카메라는 없다고 생각하시고요.”
직원 중 한 명이 곁눈질로 카메라를 보고 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감독의 예리한 눈에는 그게 보였던 것 결국 컷사인이 나왔다.
“자, 다시 찍을 테니까 앞에 분 카메라 쳐다보지 마세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세요.”
촬영감독의 지시와 함께 카메라는 다시 직원들에게 향했다.
다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려하지만 굳은 얼굴에서 긴장감이 잔뜩 묻어 나왔다.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슬레이트가 쳐지고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는 천천히 사무실 내부를 지나며 직원들이 열일 하는 모습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서류를 보는 직원, 고객과 상담을 하는 직원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사무를 보는 직원들까지 한 공간에 다양한 직원의 모습이 담겨지고 있었다.
물론 조금 과한 연출이지만 광고는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야하기 때문에 이정도의 연출은 있어야만 했다.
“오케이! 좋습니다. 다들 잘하셨어요.”
이로써 직원들의 촬영은 모두 끝났다.
그제야 굳어있던 직원들의 표정이 풀리더니 이제는 미소를 지으며 잡담을 나눴다.
“아, 저 표정 너무 이상하지 않았어요?”
“저도요. 긴장해서 입술이 떨렸는데 괜찮은가 봐요.”
그렇게 촬영이 끝난 직원들은 카메라 뒤로 물러갔다.
이제 하이라이트가 등장할 차례였다.
바로 태범의 등장.
지금까지는 그저 배경에 불과했을 뿐, 사실상 본 광고는 태범의 등장으로부터 시작된다.
태범은 딥 멀티가 설치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대표님,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대사가 있는 장면이었다.
무려 인공지능인 딥 멀티와의 대화를 금융업 광고에 사용한 곳은 지금껏 단 한 곳도 없었다.
태범은 금융업 광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을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착!
촬영팀 직원 한 명이 플레이트를 치며 촬영 시작을 알렸다.
컴퓨터 앞에 앉은 태범은 모니터에 나타난 기계와 대화하기 시작한다.
“딥 멀티, 고객 정보 보여줘.”
[네, TB 투자 자문 고객 정보를 검색하겠습니다.]
태범이 육성으로 건넨 질문에 따라 모니터는 TB 투자 자문의 고객 정보가 나타냈다. 이를 카메라에 담아냈다.
물론 광고용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정보였지만 실제로 딥 러닝 기술을 이용하며 딥 멀티에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최근 미국 무역 협상과 관련해 자산 변동이 있을 것 같은 고객의 정보를 보여줘.”
[미국 무역 협상과 관련한 고객 정보를 탐색했습니다.]
이번에는 더 정교한 정보를 딥 멀티에게 요구했다.
복잡한 명령어가 뒤섞인 언어를 분석하는 건 현재 존재하는 인공지능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딥 멀티는 해내고 있었다.
태범이 개발한 특별한 알고리즘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명령어를 단순화시켜 이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카메라는 이러한 딥 멀티의 기능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오케이! 대표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촬영 감독의 오케이 사인과 함께 이렇게 모든 촬영은 마무리가 되었다.
드디어 긴 시간의 광고 촬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사무실에 있는 모두가 지금까지의 고생에 수고했다며 박수를 쳤다.
이제 남은 건 광고를 볼 시청자들의 몫, 반응이 어떠할지는 그때 가봐야 아는 것이지만 모두가 기대를 하고 있었다.
광고를 찍는 동안 태범의 놀라울 만한 능력을 봐왔으니 거의 확신에 가까운 기대감이었다.
“다들 고생들 하셨는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죠? 제가 사겠습니다.”
“아우! 대표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희 직원들은 저희가 잘 먹이겠습니다.”
태범이 지갑을 꺼내 들어 외치자 와라콤의 백남준 이사는 괜찮다며 호의를 마다하려 했다.
하지만 태범은 결심하면 하는 성격, 그날 모두가 태범을 따라 거한 회식을 할 수 있었다.
* * *
한 달 뒤, 태범의 회사는 광고를 타고 대한민국 전국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방송을 탄 건 20초짜리 첫 번째 버전인 태범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었다.
심오한 느낌의 음악과 함께 헬기에 탄 강태범은 미간을 좁히며 여의도 상공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
현란한 광고 음악과 함께 태범이 그림 작업하는 모습이 나왔다.
길게 놓인 캔버스 앞에서 한 치의 머뭇거림 없이 그리는 태범의 모습은 경이로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의 긴 시간의 작업이었기 때문에, 빨리 감기와 함께 편집을 이용해 작업의 전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완성된 그림.
마치 그림이 아니라 실제 금융의 도시 여의도 사진을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완성된 그림 위로 문구하나와 함께 성우의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금융을 담는 기업, TB 투자 자문.’
단 20초의 짧은 광고이지만, 마치 하나의 영화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영화 같은 광고를 본 네티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 저거 편집빨 아니냐?“
└ 아니 저게 가능해요? 세상에 신기한 일이에서 그린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저렇게 똑같이 그려.
└ 저거 그림이 아니라 사진 아닙니까?
정말 저게 사실이 맞는지 의심을 할 정도로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역시나 미리 예상했던 대로였다.
기자들을 대동해서 작업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정말 한동안은 합성이니 하며 의심을 받았을 게 분명했다.
* * *
“네, 여보세요?”
“죄송합니다. 지금 전화가 많이 와서 업무 관련 외에는 답해드릴 수 없습니다.”
“다음에 연락 부탁드릴게요.”
광고가 나간 첫날, 회사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왔다.
TB 투자 자문과 TB 자산 운용의 직원들은 본 업무보다 전화를 받는 게 주 업무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업무와 관련된 투자자문만 해도 손과 발이 모자랄 지경인데 업무 외적인 전화까지 수많은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림 실력과 암기력 그리고 딥 멀티에 대한 물음까지 광고에서 강조했던 모든 것이 포함돼있었다.
마치 컴퓨터에 디도스(DDoS) 공격하는 것처럼 전화에 융단 폭격을 내리는 수준이었다.
“대표님, 방송사에서 아주 난리입니다. 대표님 한번 섭외하자고 요즘 안 덤비는 프로그램이 없을 정도예요.”
TB 투자 자문의 이사 윤희성이 태범을 찾아와 이 사태와 관련해 대화를 나눴다.
“첫날부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채용된 상담원들 기간 앞당겨서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사무실에 업무가 안 될 정도입니다.”
광고가 열풍을 일으킬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문의 전화를 대비해 전화 상담원까지 미리 뽑아 놓은 상황이었고,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뜨거운 반응은 예상외로 빠른 시간 내 찾아왔고 대비를 위한 계획이 앞당겨질 판이었다.
“네, 앞당겨 나올 수 있는 상담원들 모두 투입시키세요. 그리고 기존 고객들에게는 따로 업무용 번호를 돌리세요. 절대 기존 업무는 방해가 되면 안 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고객들이 많이 들어오실 겁니다. 이에 대한 대응은 계획대로 처리해주시고 직원 추가채용도 예정대로 진행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윤희성은 딱 부러지게 태범의 지시를 받아들었다.
지금 이 상황을 태범 만큼이나 기대하는 게 바로 윤희성 이사였다.
광고에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TB 투자 자문의 책임자로서 윤희성은 앞으로의 회사 발전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태범은 회사의 더욱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 슬슬 금융 투자 회사를 설립할 때가 오는 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