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형! 웹툰 연재하는 거 언제 도와줄 거야?”
일주일간 이어진 광고 촬영에 이어, 단 하루 가지는 휴식이었다.
태범이 본가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맞이해 준 건 뜻밖에도 동생 태인이었다.
평소 형이 오든 말든 방 안에서 꼼짝 않던 동생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태인이는 그 어느 때보다 형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 이제는 형인 태범 손이 꼭 필요했다.
“태인아, 형 쉬러 온 건데 좀 있다가 알려달라고 해라…….”
“저번에도 그래놓고, 그냥 가버렸잖아.”
어머니의 만류에도 태인이는 끈질기게 부탁했다.
평소 입을 조심해야 한다는 게 딱 지금 상황이었다.
괜히 태인이에게 웹툰을 유명 웹사이트에 공식 연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약속을 해버리는 바람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물론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동생을 도와주긴 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끈질기게 찰싹 달라붙어 조를지는 생각도 못 했다.
평소 이런 성격은 아니었는데, 급하긴 급한가 보다.
그렇게 태범은 본집에 오자마자 태인의 방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 한번 보자.”
작은방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은 태범은 동생에게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생의 선생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선생이 맞긴 하지만.
“아직 15화밖에 연재 안 했어?”
“응. 1주일에 1화 연재하는 거라, 그리고 중간에 몇 번 쉬었어. 어차피 읽어줄 사람도 없어서 쉰다고 뭐라 할 사람 없거든.”
글을 쓰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가장 무서운 것이 독자들의 무반응이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해주면 피드백이 있기에 뭘 고쳐야 할지 알겠지만, 무반응은 그저 허공에 삽질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그걸 태인이가 겪고 있었다.
태범은 안타까운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완전 다시 시작해야 해.”
“완전 처음부터? 너무 아까운데.”
“아깝긴 개뿔, 그냥 이건 연습했다고 생각해. 시작이 가장 중요한데 이거 가지고는 절대 안 돼.”
“알았어. 그럼 형이 하라는 대로 할게.”
동생이 이렇게 말을 잘 듣다니, 예전 같았으면 자기주장 안 꺾으려고 한판 했을 텐데, 새삼스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태인은 태범의 말을 듣기로 하며, 새 시작을 위해 일러스트 프로그램을 켰다.
“내가 보기에는 그림체가 보기 너무 불편한 것 같아. 네가 그렸던 그림의 윤곽과 색감을 보면 무슨 수채화 그림을 그리는 것 같지, 웹툰 같지가 않아.”
“그런가…….”
“여성 독자가 좋아할 만한 멜로풍의 느낌이랄까, 이건 전혀 판타지 느낌이 안 살잖아.”
태범은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실 웹툰이라 하면 그냥 심심풀이 땅콩으로 잠깐 봤을 뿐, 이를 작업하는 데 있어서 전혀 문외한 상황.
하지만 예술과 지식은 비슷한 분야끼리는 통하게 마련이다.
그 분야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예술과 지식을 접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자! 네가 원하는 그림체로 다시 그려봐.”
“무슨 그림?”
“그냥 네가 웹툰에 넣고 싶은 캐릭터.”
태범의 요청에 태인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금세 펜을 잡고는 태블릿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니터에는 여자 캐릭터 하나가 그려지고 있었고, 태범은 모니터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관찰했다.
“다 된 거야?”
“응. 어때?”
역시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던 녀석이라 그런지, 미술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태인은 그림 그리는 방법만 알뿐, 상황에 맞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르고 있었다.
“펜 줘봐.”
태범은 태인이 쥐고 있던 펜을 뺏어 들고는, 의자를 옆으로 끌어 태블릿 앞에 앉았다.
그리고 태인이 그린 그림 위에 덧칠을 하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맨날 붓으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렸지만, 이번에는 태블릿 액정 위에 그리려 하니 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따지지 않는다고, 태범은 묵묵히 수정을 이어갔다.
툭. 툭. 툭.
단지 몇 번의 터치와 선을 그렸을 뿐이다.
그림이 직관적으로 보기 쉽게 바뀌어 있었다.
불필요한 이미지는 빼고,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강렬한 색감으로 바꿔 넣었다.
확실히 그림을 보는데 눈이 더욱 편해진 느낌이었고, 간단하게 보는 웹툰의 특성을 잘 이용한 그림체였다.
“형! 진짜 확실히 다르다.”
태인은 새롭게 탄생한 본인의 그림에 놀라워했다.
약간의 펜 터치로 태인의 그림은 새 생명을 부여받았다.
“어때 쉽지? 약간의 변화만 주면 이렇게 달라진다니까.”
태범의 모습은 어릴 적 교육방송에서 나왔던 화가 밥 아저씨가 그림을 쓱쓱 그리고는 ‘참 쉽죠?’ 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분명 눈으로 보면 쉬운 게 분명하나, 태인이의 머리는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형, 근데 어떤 걸 지우고 어떤 걸 추가시킨 거야? 형이 말하는 그림체가 뭔지는 대충 느낌으로 알겠는데, 어떻게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
“잘 봐, 색에는 강약이 필요한 거야. 네가 사용한 색은 너무 옅고, 웹툰보다는 전시회에 걸어둘 그림 같았어. 근데 내가 수정한 걸 봐. 필요한 부분에 색이 강해졌잖아”
“아! 그런 건가.”
“그리고 선은 좀 더 부드럽게 각을 너무 주지 말고.”
태범의 가르침에 태인은 다시 한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펜이 잘못 움직일 때마다 태범은 즉시 잘못된 점을 일러주며, 특훈에 가까운 연습에 들어갔다.
“과일 좀 먹고 하렴.”
어머니는 아들들이 입이 심심할까, 포도와 복숭아가 담긴 과일 접시를 가져오더니 책상 위에 올려놨다.
태범과 태인, 이 두 아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자 어머니는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들들을 잘 키운 보람에서 느끼지는 감정인지 순간 소름이 돋으며 감동을 받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조용히 미소만 지은 채, 혹시나 두 아들을 방해할까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렇게 어머니가 놓고 가신 과일을 먹으며 태범의 가르침은 계속됐다.
“그림은 계속 피드백을 받아가면서 수정하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보다 중요한 게 스토리 아니겠어?”
“스토리는 기존 걸로 쓰면 안 될까?”
“내가 아까 말했잖아.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하라고.”
태인이는 여전히 기존의 작업해 둔 작품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나온 작품이니 아깝긴 하겠지만, 새로 배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걸 버려야만 했다.
아니면 이럴 바에 차라리 스캐너를 사용하게 해줄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도저히 스캐너를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게 남이 아닌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어쩔 수 없지만 괜한 생각은 접어두고 다시 설명에 나섰다.
스캐너가 아닌, 본인이 스캐너가 되어 동생에게 능력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좀 오래 걸릴지 몰라도 선생 된 마음으로 열심히 가르쳤다.
“내 메일에다가 스토리를 보내줘. 내가 시간 날 때 수정하고, 피드백 적어 보낼 테니까.”
“알았어.”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시간이 꽤 지났다.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아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며 작은방을 나왔다.
방에서 나온 태범은 허리를 한 번 쫙 펴며 스트레칭을 하고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발가락을 흔들며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If we never learn~”
새롭게 얻은 가창력 덕분에 태범의 또 다른 취미가 생겼다.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더니 이제는 거의 가수가 다 돼 있었다.
물론 마이클 잭슨의 음색은 특유의 미성과 파워풀한 목소리에 있었지만, 태범은 달랐다.
태범은 나름 자신의 스타일대로 소화해 내며 부르고 있었다.
가요나 팝송, 심지어 랩까지 가릴 것 없었다. 그저 평소에 자주 들었던 음악들을 흥얼거리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I can't believe you let me down~”
“어머! 방금 태범이 네가 부른 거니?”
“응? 뭐가?”
“방금, 영어로 노래 불렀잖아.”
“아…… 그냥…….”
태범이 흥얼거리는 소리는 저 멀리 안방에서 빨래를 개던 어머니가 들은 모양이었다.
“태범이 너 원래 노래를 그렇게 잘 불렀어?”
능력에 대한 반응을 바로 왔다.
아직 가창력이 스캔 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어머니는 변화된 가창력을 눈치채고 있었다.
평소 얼마나 개떡같이 불렀으면 말이다.
* * *
다음 촬영은 TB 투자자문 회사 내에서 이뤄졌다.
촬영 팀과 광고 대행사에서 회사를 찾아왔고, 촬영에 앞서 잠시 딥멀티의 구경하던 참이었다.
“이게 딥멀티라는 거예요?”
“네. 그냥 컴퓨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알파고 같은 건가 보죠.”
“사실 영화에서 나오는 그 정도 인공지능은 아니고요.”
“그럼요?”
“저희가 입력한 정보를 토대로 스스로 정보를 탐색하고, 사용자가 원할만한 정보를 만들어내죠.”
카메라 감독은 인공지능에 대해 호기심이 있는지, 태범에게 딥멀티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원하시는 정보를 입력하세요.]
모니터 속에 기계 로봇의 이미지가 나타나더니, 말을 걸어왔다.
이를 처음 체험해 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 모니터 속을 바라봤다.
사실 이 로봇 이미지는 광고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이미지였다.
기술적으로 본다면 아무런 효율은 없으나, 광고인만큼 시각적으로 강한 이미지가 필요할 거라 생각하고 만든 것이었다.
원래 실무에서 사용하던 딥멀티는 그저 텍스트와 간단한 인터페이스밖에 없었다.
“한번 해보세요. 생각보다 재밌을 거예요.”
태범이 컴퓨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촬영감독에게 사용해 볼 것을 권했다.
“어떻게 말로 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냥 키보드 자판으로 쓰시면 돼요. 평소 관심이 있는데, 찾기 어려운 정보 같은 게 있었으면 한번 적어보세요.”
“그냥 아무렇게 나요?”
“네. 딥멀티가 알아서 텍스트를 인식할 겁니다.”
태범의 말에 촬영감독은 컴퓨터 안에 카메라 관련 텍스트를 입력하다. 그러자 딥멀티는 이를 분석, 정보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평범하게 알던 그런 인터넷 검색엔진과는 달랐다.
사용자의 입력정보가 반복되어 입력될수록, 이를 토대로 스스로 학습을 하며 더욱 정교한 정보를 낳는 방식이었다.
“지금이야 텍스트 몇 마디 안 썼기 때문에 이 정도지, 계속 정보를 주입하면 더욱 정확하고 원하시는 정보가 나타날 겁니다.”
“와, 이거 잘만 이용하면 사용 용도가 무궁무진하겠는데요?”
“그렇죠. 지금 서버가 부족해서 그렇지, 서버만 충분히 증설된다면 많은 곳에서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남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건 기쁜 일이었다.
촬영감독의 호기심 가득한 반응에 태범 역시 신이 난 채 설명을 해줬다.
“근데 제가 이쪽 분야는 잘 몰라서 그런데, 영화 같은데 보면 사람처럼 생각하며 말하고 그런 인공지능 있잖아요? 그런 건 언제쯤 나올까요?”
“전 금방 나올 거라 보는데요.”
IT에 호기심이 많은 카메라 감독이었다.
하긴 카메라 장비를 다루다 보면, 기계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텐데, 그럴 만도 했다.
“제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그런 세상이 오긴 오겠죠?”
“하하하.”
카메라 감독의 순수한 호기심을 느낀 태범은 빵 터진 듯 웃음을 내뱉었다.
“한번 말해 봐요.”
“네?”
“여기 컴퓨터 옆에 마이크 있죠? 저기 빨간색 버튼 누르고 딥멀티에게 말을 걸어보세요.”
태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컴퓨터 옆에 놓인 마이크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