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피지 이야기를 꺼내셨다고?”
“네, 머리카락에 피지랑 두피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노 와이어랑 비유하던데요.”
“혹시나 해서 말인데 설마 너 머리 보고 꺼낸 이야기 아니야?”
“제 머리요?”
조문기가 후배 연구원에게 태범의 이야기를 듣고는 머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그 연구원은 자신의 텅 빈 정수리를 만지작거린다.
“네 옆에서 일하는 걸 지켜봤다면서 그러니 너 정수리가 훤히 보였을 것 같은데?”
“에이 설마요. 제 머리를 보고 무슨 나노 와이어를 떠올려요.”
“장난이야. 장난. 그건 그렇고 그분은 알다가도 모르는 사람이야. 도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탈모 이야기에 후배 연구원이 정색을 보이자 조문기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오늘 하는 거라곤 온 종일 연구소를 돌아다니면서 뭘 생각하고 있는 거뿐이더라고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질문 한번 안 받아본 사람 없을 걸요?”
태범이 떠난 연구소, 다시 한번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태범이 내뱉은 이야기들이 화젯거리가 되고 있었다.
태범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연구원들에게는 큰 자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쳐 지나가는 말조차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게 도와주는 말이었다. 알게 모르게 연구원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괜히 사람들이 천재, 천재 거리는 게 아니더라고, 그분한테 설명을 듣는데 말이야. 무슨 노벨상이라도 받은 사람한테 듣는 줄만 알았다니까.”
조문기는 감탄을 넘어 고개를 흔들며 경외심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태범을 반말로 칭하던 것도, 이제는 ‘그분’ 이라는 높임말로 칭하고 있었다.
“네, 저도 같이 들었으니 잘 알죠.”
“그래, 그럼 잘 알겠네. 그분이 우리보다 나이도 어리고, 굴러온 돌이라고 무시해서는 될 게 아닌 것 같더라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 이상이야.”
“그러게요. 저희가 사람을 오해한 것 같네요. 어린 나이에 대표 자리에까지 올라가고 천재 소리를 듣는데 그런 사람이 괜히 우리랑 같이 일하겠어요? 확신이 있으니까 그러겠죠.”
“그래, 다른 연구원들한테 전해. 이번 프로젝트의 팀장은 강태범 팀장님이라고.”
* * *
[상상력를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39%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40% 진행되었습니다.]
‘와이어라…….’
스캔을 마치고 태범은 침대에 누워 본인의 머리에서 뽑은 머리카락 한 올을 손가락을 집어 관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머리카락 보다 수천 배 얇은 나노 와이어를 안정성 있게 설계할지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고민이 함께했다.
태범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서로 실타래처럼 엉키며 새로운 생각을 끊임없이 생산해 냈다.
‘딥 멀티를 이용해볼까?’
하도 빠르고, 많이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생각의 소스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정보를 흡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데 있어서 세상에 그 어느 것도 태범의 능력을 쫓아올 건 없었다.
태범은 확신했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걸림돌이 존재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소화시킬 수 있는 정보를 탐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리 많은 인물의 능력이 한 몸에 들어와 있더라도 육체가 하나라는 한계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이 때문에 딥 러닝을 이용한 자산 관리 자문 프로그램인 딥 멀티를 개발했다.
그리고 태범은 다시 한번 딥 멀티를 떠올렸다.
지금 업무에 사용하고 있는 딥 멀티를 조금 손을 본다면 선시티의 연구, 개발에 도움이 되는 도구가 될 것 같았다.
‘그래, 분명히 가능해.’
태범은 손에 집고 있던 머리카락을 바닥에 떨어트리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영국에 있는 존 스미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딥 멀티를 같이 개발했고 태범 다음으로 딥 멀티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헬로우, 태범.”
“교수님, 잘 지내고 계셨어요?”
“그럼요. 딥 멀티가 잘 되고 있어서 기분이 좋네요.”
스마트 폰에서 들려오는 존 스미스 교수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 보다 밝았다.
당연히 같이 개발한 딥 멀티가 잘 되고 기술에 대한 권리의 절반 가지고 있는 존 스미스 측에서는 한동안은 기쁨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제가 전화를 드린 게 딥 멀티 때문에 할 말이 있어서 그렇거든요.”
“아,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존 스미스의 밝던 목소리가 다시 진지해졌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요. 딥 멀티의 용도를 확장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허허. 태범 씨가 저랑 통하는 게 있는 것 같군요. 안 그래도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요?”
“딥 멀티의 딥 러닝 알고리즘이 한 작업에서만 쓰이는 게 아까웠거든요. 분명 다양한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알고리즘인데 말이죠.”
“맞습니다. 저도 사용하면서 그 생각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또 어디에 사용하실 계획인지?”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인식하고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취합해 줄 수 있는 기능이 필요합니다. 제가 배터리 기술과 관련된 연구 중에 있거든요.”
“연구용이라…….”
“어떻습니까? 괜찮지 않나요?”
“딥 러닝을 이용하기에 적합하겠군요. 그럼 저한테 기술 계획서를 보내주시죠. 저희 쪽에서 프로그래밍을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작성이 끝나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존 스미스 교수도 태범과 같은 생각을 가졌기에 일은 빨리 진행될 거로 보였다.
전화를 마친 태범은 바로 다음 작업을 위해 구상에 들어갔다.
* * *
“한국형 알파고 딥 멀티를 선보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한국형’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부정적인 생각이 나기 마련이었다.
독창적이고 창조적이기보다는 뒤늦게 선두 주자를 쫓아갈 때 붙는 타이틀이었다. 항상 결과가 엉성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인식을 한 번에 바꾼 게 있었으니 바로 ‘딥 멀티’였다.
태범이 딥 멀티를 선시티의 연구, 개발에 사용하기로 결정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모든 게 완성된 이 시점에서 기술이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딥 멀티가 자산 관리, 투자 자문에 쓰일 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큰 관심을 두진 않았다.
그저 투자 업무에 보조적인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딥 멀티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기술 연구, 개발에 사용하는 지금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돼버렸다.
특히 IT계열의 기업에서 태범의 딥 멀티를 노리고 있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세계적인 IT기업들부터 국내 굵직한 대기업들까지 모두 관심을 가졌다.
아무래도 4차 산업 혁명의 주역이 될 거라 예상되는 인공 지능에 대한 실질적인 성과였으니 당연했다.
“이 기술을 이용할 방법은 없는 거야?”
“상업화 계획은 있다고 하는데 정확한 일정이 없는 걸 보아하니 기간이 걸릴 듯 보입니다.”
많은 기업에서 딥 멀티를 원하고 있지만 그 중에도 가장 관심을 보이는 건 국내 1위 전자기업인 샘성 전자였다.
태범의 스캐너가 제작된 기업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은 본인 회사에서 제작된 스캐너가 한 인물에 의해 신비롭게 사용되고 있다는 건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참 아이러니 했다.
태범이 개발한 딥 멀티의 근원은 샘성 전자가 만들어낸 스캐너에서 나온 셈이었다.
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딥 멀티를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아니, 선시티 측에서 지금 사용하고 있다며 그런데 왜 아직 인데?”
“정확한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좀, 알아보라니까. 지금까지 뭐한 거야?”
“그게…… 강태범 대표가 요즘 일에 바쁜지 접촉하기가 도통 쉽지가 않습니다. 접촉을 하더라도 별 성과 없는 이야기만 나오고요.”
“아니, 그래도 어떻게라도 해봐. 사장님이 직접 내리신 지시라 그런 식으로 답할 수는 없잖아?”
“네, 계속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샘성 전자 사장이 내린 직접 내린 지시에 바빠진 스마트 폰 개발팀 직원들이었다.
* * *
“이런 게 숨어 있었다니.”
태범은 딥 멀티가 가져다주는 정보를 살펴보고 있었다.
딥 멀티는 태범이 원하는 정보를 최적의 가공 상태로 전달하고 있었다.
사용자가 딥 멀티를 통해 기초 자료를 입력하고 추가적인 정보를 주입시키면 딥 멀티가 텍스트를 분석해 정보를 찾아주는 방식이었다.
사용자 완전 맞춤형의 정보다보니 아이디어의 근원이 될 만한 재료들의 질이 한결 높아지고 있었다.
그 덕분일까 태범의 능력은 정보에 빠르게 반응했다.
‘플렉시글라스를 이용해봐!’
컴퓨터를 통해 딥 멀티의 정보를 읽던 중이었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처럼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다.
지금 당장 ‘유레카!’라고 외쳐도 될 만한 아이디어임이 분명했다. 태범은 즉시 느낄 수 있었다.
‘그래, 플렉시글라스 성분을 와이어에 둘러싼다면…….’
태범은 당장 화학과 전자 물리학을 이용한 공식을 책상 위 노트 위에 작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플렉시글라스는 유리창, 액세서리에 이용되는 투명한 합성 수지였다.
뜬금없이 왜 이런 물질이 떠올랐을까 싶지만 아인슈타인 물리적 능력과 폰 노이만의 천재적 재능의 합작으로 떠올린 결과였다.
화학과 전자 공식이 머릿속에 연결되어 하나의 공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노트위에 한참동안 공식을 작성하던 태범은 드디어 완성된 이론과 공식을 만들었다.
“유레카!”
태범은 결국 유레카를 내질렀다.
그렇게 소리를 크게 내지르고는 주먹을 쥐고 새 아이디어에 대한 기쁨을 표출했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태범의 고함에 밖에 있던 직원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소리가 컸던 모양이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서 일 보세요.”
* * *
“아니, 정말 플렉시글라스를 이용하면 리튬 이온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는 거예요?”
“플라스틱을 가지고 그게 가능한가요?”
태범의 아이디어를 들은 선시티의 연구원들은 태범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연구를 같이 시작한지 한 달이 넘은 이 시점에 드디어 태범의 입에서 확신에 가까운 신기술이 나왔다.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일단 실험은 해봐야 알겠지만 이론에 의하면 분명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확실히 가능할 겁니다.”
태범은 연구원들을 향해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근데 플라스틱이라니 뭔가 허전하네요.”
위대한 발견은 사소한 우연에서 시작한다고 지금이 딱 그 말과 같았다.
태범이 이야기한 플렉시글라스는 플라스틱의 일종이었다. 이를 가지고 신기술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보통 신기술이라 하면 기존의 생각을 뛰어넘어 새로운 창조에 가까운 것을 말하지만 태범의 아이디어는 그저 기존의 것을 융합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러한 우려에 태범은 설명했다.
“일단 플렉시글라스를 젤의 형태로 만들어 와이어에 코팅을 해 볼 겁니다. 제 이론에 따르면 기존 리튬 이온의 최소 50배에서 많으면 영구적인 수명까지 이뤄낼 수 있을 겁니다.”
50배 그리고 영구적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땐 연구원들의 표정은 모두 놀라움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