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선시티에서 일 해보니 어땠어?”
대표실에서 태범에게 인력 보충과 관련한 재무 보고를 하던 효준은 자연스럽게 선시티 대한 질문으로 옮기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효준의 가장 관심사가 강태범인 만큼 또 다른 일을 도전한다고 하니,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태범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대답했다.
“아직은 나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것 같더라고 근데 뭐. 금방 나아지겠지.”
“경계? 태범이 너한테 가질 경계가 어딨다고 그런데?”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같이 일하자고 자기 작업장에 쳐들어오는데 그럴만하지.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는 생각해.”
태범의 말에 납득이 됐는지 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나도 해외 연수가 가서 너한테 잔뜩 경계했었잖아? 그때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나 싶다.”
효준이 태범과의 첫 만남 이야기를 꺼냈다. 상정회계법인에서 있었던 조그마한 에피소드 이를 다시 상상해보니 입 밖으로 웃음이 세어 나왔다.
“하하하. 그 말하니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눈싸움한 거 기억나? 형이 나 째려봤잖아.”
효준이 지금과는 다르게 꽤나 사나운 눈빛으로 야려보던 게 생각났다.
그때는 재벌2세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렇게 잘난 체 하던 형이었는데 말이다.
효준도 그때를 기억하면 민망한지, 어색한 미소와 함께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 알잖아. 그때는 내가 너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지. 얼마나 대단한 놈이기에 나를 제치고 수석을 했다 싶었고 괜히 심술이 났었나봐. 아마 선시티 그 연구원들도 그때 나랑 비슷한 생각일걸?”
“그래?”
“괜한 심술일 거야. 어차피 너랑 며칠만 지내다 보면 깨닫게 되겠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효준은 태범의 능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시티의 연구원들이 태범에게 경계심을 가진 듯, 효준도 태범과의 첫 만남에서 잔뜩 경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효준은 깨달았었다. 태범은 본인이 이길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란 걸.
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회계법인의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태범의 밑으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은 다 했다.
“오늘은 선시티에 안 나가봐?”
“있다가 오후에 가봐야지. 요 며칠간은 자주 왔다 갔다 해야 할 거야.”
“아…… 그래? 그럼 많이 바쁘겠네. 내가 바쁜데 시간을 뺏은 건지 모르겠네. 그럼 난 이만 나가볼게.”
* * *
[TB 자산 운용 강태범 대표, 선시티 기술 연구 개발에 직접 참여한다!]
└ 아니, 저 사람은 직업이 몇 개지. 강태범 이 사람 꾸준히 기사에 언급되는데 정확히 뭐 하는 사람인가요? 볼 때마다 직업에 바뀌는 것 같은데요.
└ 선시티 중국 기업에게 기술 유출됐다는 말이 있던데, 아마도 TB쪽에서 투자 관련된 일 때문에 직접 움직이는 거로 보인다.
└ 딥 멀티라는 딥 러닝으로 개발된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것도 강태범 대표가 직접 참여해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 정체가 뭡니까?
└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TB 대표. 많은 기업에서 이 사람 모셔 가려다가 실패했죠.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의심되는 게 너무 많다는…….
역시나 태범의 투잡 생활에 대한 소식이 금융권으로 빨리 퍼져나갔다. 물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네티즌들의 반응은 아주 뜨거웠다.
특히나 투자자인 태범이 이번에는 본업과 전혀 다른 에너지 업종에 손을 대니 이는 뜨거운 이슈가 되기에 충분했다.
‘아직 놀라긴 이른데.’
태범은 인터넷 속에 흘러 다니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보고 있자니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본인에 대한 내용이라면 모두 찾아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고 관심을 주는 건 행복한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태범은 본인의 능력이 하나둘씩 세상에 밝혀지는데 별 거부감은 없었다.
물론 능력을 주는 스캐너의 정체를 들킬까 혹시나 하는 마음의 염려하는 건 있지만 능력을 뽐내는 데는 별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세상에 본인의 능력을 덜 보여준 것만 같아 아쉬울 정도이니 말이다.
남들이 관심 종자라 할지라도 정말 태범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세상에 뽐내고 싶었고, 이를 가지고 대단한 일을 일궈내고 싶었다.
‘슬슬 나가봐야겠네.’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보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즐기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다음 일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범은 바로 컴퓨터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을 나섰다.
* * *
“저기…… 팀장님? 그때 말해주신 층상구조 좀 다시 설명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태범이 선시티 연구소 문을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반겨준 사람은 조문기 수석 연구원이었다.
할 말이 있는지 잠깐 머뭇거리더니 태범에게 질문을 건네 온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경계심이 있어 보였는데 이제 그런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어제 태범이 건넨 정보를 가지고 하루 종일 머리를 굴렸던 모양이다.
“설명해 드릴 테니까. 앉으세요.”
연구소에 오고 나서 숨 돌릴 틈도 없던 태범은 조문기의 질문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테이블에 수첩을 펼치고 펜을 들어 설명에 나섰다.
태범이 설명한 건 리튬이온의 음극 물질로 사용되는 흑연에 대한 층상구조를 어떻게 보완할까에 대한 공식이었다.
물리 공식뿐만 아니라 각종 수리 공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웬만한 머리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문제였다.
“와…….”
어느새 조문기와 태범 주위로 다른 연구원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태범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 서서 설명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는 여러 번의 감탄과 호응이 내뱉어지기까지 했다.
“아. 이런 식으로 하면 리튬 이온의 분자가 결합 저장이 가능하겠는데요. 와……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하셨죠?”
몇 번을 들어도 대단한지 조문기는 고개를 흔들며 경외심을 표하고 있었다. 그도 슬슬 태범의 능력에 빠지고 있던 것이다.
“생각을 미시적으로 한 단계씩 접근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리다보면 여러분들도 다들 하실 수 있는 생각입니다.”
“아. 그래요?”
너무나도 쉽게 말하는 태범에게 조문기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근처에 있던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생이 초등학생에게 다가와 ‘이 문제 쉽지?’ 라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 이들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이제 이런 공식을 정말 실체화시켜줄 수 있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네, 저희도 노력은 하겠습니다.”
연구원들은 더 이상 태범에 대한 모든 경계는 사라지고 협업에 대한 의지를 나타냈다.
* * *
“미생물을 활용해 리튬 이온의 분자에 결합시킬 수 있는지 연구 중에 있습니다.”
“흠 미생물이라…….”
“다양한 미생물 안에도 나노 크기의 분자가 존재하거든요. 이걸 잘만 이용하면 리튬 이온의 분자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연구는 하고 있는데 아직은 잘 안 나오네요.”
태범은 연구소를 돌아다니며 연구원들의 작업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미생물을 연구하던 연구원이 눈에 띄었다.
“자! 이거 보세요. 실제로 전자를 체외로 전달하는 이런 미생물들이 꽤 있거든요. 이건 슈와넬라(Shewanella) 박테리아라고. 이 녀석이 앞으로 전자 산업에서 기대되는 놈입니다.”
“오. 그래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연구원을 태범은 옆에 서서 그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웬걸 태범의 눈에 띄는 건 모니터 속 자료가 아닌 연구원의 텅 빈 머리숱이었다.
‘공부 많이 했나 보네. 저 나이에 탈모라니…….’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그는 벌써부터 탈모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것처럼 가운데가 뻥 뚫렸다.
‘고생이 많으셨나 보군.’
태범은 연구원이 안타까우면서도 혹시 본인도 탈모에 걸릴까 걱정이 됐다.
저 연구원보다 많으면 많았지 머리를 많이 사용할 텐데 말이다.
‘머리카락?’
상상력이 증가한 탓일까 하나를 보더라도 다양한 면이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그저 스쳐가듯 어디서 본 듯한 머리카락의 구조가 떠오르더니 리튬 이온과 연관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 이 머리카락보다 얇은 와이어를 이용해보면 어떨까?’
아무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머리카락과 리튬 이온의 두 가지 성질은 태범에게 상상력으로서 결합되었다.
“저기 혹시 와이어는 어떻게 생각해요?”
태범은 곧장 본인의 생각을 앞에 있는 연구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연구원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와이어요?”
“네, 와이어가 전도성이 높잖아요. 그 크기를 나노 수준으로 줄여서 리튬 이온과 결합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차마 탈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굳이 필요한 말도 아니고 태범은 와이어를 이용한 배터리 설계를 제안해봤다.
“연구를 해본 적은 없지만 와이어로는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충전하고 방전이 반복되면 쉽게 손상될걸요?”
연구원이 어려움을 나타내자 또 다시 태범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미 태범의 머릿속에는 스캐너로 스캔한 천재적 인물이 한 곳에 모여 논의를 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태범이 말했다.
“그럼 손상이 안 되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그걸 어떻게…….”
“두피에서 나오는 피지의 역할이 무엇이겠어요?”
“두피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연구원은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사람의 땀구멍에서 피지가 나오잖아요. 두피도 마찬가지고, 그럼 그 역할을 잘 떠올려보세요.”
태범의 질문에 연구원은 고개를 숙이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음…… 피지는 피부나 머리카락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거겠죠?”
“네, 그거에요! 피지는 외부의 균이나 자외선을 막아줌으로써 방어 작용을 해주잖아요. 그럼 와이어에도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물질을 첨가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틀린 말은 아니신데 저희가 연금술사도 아니고 원하는 물질을 뚝딱 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마도 연구원은 무슨 개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으니 말이다. 태범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범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모두 생각이 있고, 가능성이 보이기에 꺼낸 말이지, 절대 실속 없는 말은 내뱉지 않았다.
연구원의 말에 태범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음…… 그거야 앞으로 생각을 해봐야겠죠?”
“아…… 네.”
뭔가 대단한 걸 말할 것처럼 잔뜩 기대를 줬지만 태범의 입에서 별말이 나오지 않자 연구원은 아쉬운 듯 짧은 말로 대답했다.
태범 역시 방금 떠올린 아이디어라 대략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직 자세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태범에게 시작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했다.
태범에게 있어서 시작이 곧 끝이었기 때문이다. 대상과 목적이 정해진 이상 태범이 파헤치면 해결되지 않을 건 없었다.
‘머리카락, 피지, 나노 와이어, 방어 물질.’
이 새로운 단어들이 태범을 강하게 자극시키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아이디어 머릿속에 헤엄쳐 다니지만 이 중에도 이끌리는 게 있었으니 지금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