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자, 저희 이제 이야기 좀 나눠볼까요?”
태범은 연구원들과 자기소개를 끝내고 자리에 앉기 위해 테이블 의자로 다가갔다.
그러자 양효철 대표가 다가오더니 입술을 꿈틀거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한데 저는 일이 있어서 본사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선시티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 조문기 연구원에게 물어보시면 다 알려드릴 겁니다. 이 친구, 실무에서는 저보다 많이 아는 친구거든요.”
“아! 네, 바쁘실 텐데 그러셔야죠. 그럼 저는 연구원들과 대화 좀 나누다 가겠습니다.”
“아이고. 오늘 같은 날은 같이 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고 하시던 대로 하세요.”
그렇게 양 대표는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는 연구실을 나섰다. 그리고 이제 태범과 조문기 수석 연구원 그리고 몇몇 연구원이 연구실 내 자리를 지켰다.
“전화로 부탁하셨던 기술 현황입니다.”
조문기는 태범에게 노란 서류봉투를 건넸다.
여기에 오기 전 태범이 미리 부탁했던 서류였다.
가장 먼저 현재 선시티가 보유하고 있는 기술의 현황을 알 필요가 있었다. 주 사업인 배터리 기술부터 시작해 태양광 발전기 등 모든 게 에너지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고 또한 어떤 부분에서 가치를 이끌어 낼 야 할지 판단하는데 꼭 필요한 자료였다.
“다들 앉아서 보죠.”
태범은 멀뚱멀뚱 서있는 연구원들을 앉히고, 테이블 위에 서류를 펼쳐 살펴보기 시작했다.
‘타일형 패널이라…….’
그렇게 기술 현황 서류를 넘겨보던 태범은 기와 모양의 타일형 패널이 그려진 이미지를 보고는 손을 멈췄다.
“패널은 계속 개발 중에 있죠?”
태범의 질문에 조문기가 대답했다.
“네, 개발 부서가 있기 때문에 계속 연구는 하고 있는데 배터리 사업을 키운다고 이곳에 투자 비중을 낮추는 바람에 눈에 띄는 성과는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음…… 여러분들이 만드신 이런 패널처럼 일반 태양광 패널이 아니라 디자인이 담긴 패널을 개발해서 외부에 놓이는 제품에 자연스럽게 부착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태범이 다시 질문을 하자 조 팀장은 입을 한 번 꽉 다물더니 말했다.
“그런 건 저희도 알죠. 이것뿐만 아니라 강화 유리 안에 패널을 넣기 위해서 연구까지 해봤습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긴 해봤죠. 근데 상업화하기에는 여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고, 아까 말했듯 배터리 사업에 집중되면서 흐지부지됐습니다. 저희는 샹차이에게 빼앗긴 그 기술만이 유일한 희망이었죠.”
나름 선시티는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는 혁신적인 기업에 가까웠다.
기존의 기술을 가지고 제품화시키는 단순 공정보다는 항상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를 했으며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상업화하기에는 어려운 기술이 대부분이었지만 성장의 밑거름이 될 가능성은 보였다.
“뭐 그래도 많은 걸 시도한 흔적을 보니 다들 열심히 하셨나 보네요.”
태범은 다시 서류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범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들은 능력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로 가공됐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한다고 아무리 쓸모없어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다. 태범은 선시티의 기술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본인의 것으로 흡수시켰다.
“자, 그럼 이제 제 생각 좀 말씀드려도 될까요?”
태범의 서류 전체를 보는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정말 책을 속독으로 읽듯이 거의 훑어보는 수준으로 읽어나갔다.
연구원들은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머리 위에 ‘벌써 다 봤다고?’라는 메시지가 보이는 것처럼 살짝 당황한 눈빛이 보였다.
익숙한 반응이다. 태범의 정보처리속도는 이미 일반 사람에 비하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속도니 말이다.
태범은 모든 서류를 검토하고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그리고 검정색 보드 마커를 하나 집어 들고는 연구원들에게 말했다.
“제가 떠오르는 공식 하나를 적어 드릴게요. 잘 봐주시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은 언제든 질문해주세요.”
그렇게 태범은 보드 마커 뚜껑을 열고, 화이트보드 위에 뭔가를 적어나기가 시작했다.
쓱쓱.
한 치에 망설임도 없지 마치 외워오기라도 하듯 기다란 수식을 적어 나갔다.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지 태범은 입을 꾹 다물고는 쓰기에만 열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
처음에 연구원들은 그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라는 심정으로 바라보는 듯 무심히 쳐다봤다. 하지만 보드 위에 숫자가 채워지면서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눈빛이 반짝거리더니 얼마나 놀랐으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만요, 태범 대표님. 아니, 팀장님.”
조문기가 팔을 내밀며 태범의 행동을 잠시 멈춰 세웠다.
“네, 뭐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지금 보드 위에 적고 계신 게 뭐죠?”
“리튬 이온 음극 물질의 탄소 구조를 수식화한 겁니다. 그리고 안정적인 분자 구조로 대체하기 위해 계산을 해봤고요.”
“아니, 그건 알겠는데. 이 식을 어떻게 도출하셨는지? 직접 실험이라도 해보신 거예요?”
지금까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조문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아뇨, 아직은 그저 이론적인 추측에 불과하죠.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지금 제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돼서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걸 그냥 머리로만 계산하신 거라고요? 어떠한 실험도 없이요?”
조문기는 믿을 수 없는지 태범에게 같은 질문을 재차 물었다.
다른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조문기 수석 연구원과 마찬가지로 놀라는 표정이었다.
태범은 이런 반응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보드 마커를 쥐고는 숫자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네, 여러 논문을 찾아보고 어떤 식의 분자 구조가 효율적일지 생각을 해봤을 뿐이에요. 아직은 가설에 불과하죠.”
“가설이라고 하기에는 마치 실험을 통해 얻어낸 결과 같은데요.”
“하하. 제가 좀 깊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결과가 오묘하게 맞춰졌네요. 그래도 아이디어는 어디서든 나올 수 있으니까. 아무리 가설이라도 한 번쯤은 고민해 보는 게 좋으실 거예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시고요.”
태범은 시작부터 연구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태범은 단지 투자자로만 볼 게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과 견줄 수 있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 * *
“와. 이거 도대체 뭐냐. 강태범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태범이 퇴근한 연구소 밤늦게까지 회사를 지키는 연구원들은 태범에 대한 속마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이걸 정말 혼자 생각한 걸 까요?”
“아마 따로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있겠지. 이 정도 물리 공식을 혼자 떠올렸으면 그게 아인슈타인 아니겠어?”
태범이 있는 자리에서 조문기는 애써 놀라움을 숨기려 했지만, 지금은 대단함을 표하고 있었다.
“하긴 뭔가 있으니까. 저렇게 자신감가지고 저희랑 일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겠지. 우리 회사에 투자 할 때도 그 강태범이 원금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으로 투자자를 끌어 모았다며? 이게 무슨 의미겠어?”
“확신이 있다는 거죠.”
“그래, 그거야. 분명 뭔가 있어.”
그렇게 오늘 하루 태범이 남기고 간 흔적을, 연구원들은 밤늦게까지 몇 번이나 살펴보며 강태범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자 했다.
* * *
집에 돌아온 태범은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바로 책상 앞으로 향했다.
선시티에서 직접 실무자들과 접촉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행동을 이끄는 동기 부여와 목표 의식이 더욱 강해졌다.
꼭 선시티를 부활시키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태범은 다시 본인만의 책상 위 연구에 돌입했다.
책상 위 연구는 어떠한 실험 도구를 지니지 않고 오직 머릿속 추측으로만 이뤄졌다.
태범은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마우스를 잡은 채 인터넷 속 정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최적의 전극 물질을 찾아야 하는데…….’
선시티의 가장 우선시 되는 신기술은 리튬 이온 전지의 용량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안정성의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용량과 안정성 이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는가에 따라 에너지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선시티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문제는 존재했으니 용량과 안정성은 서로 반비례하는 까닭에 이 둘을 만족시키긴 한계가 있었다. 용량을 늘리자니 폭발의 위험성이 커진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태범은 기술적 한계를 이겨내고 새로운 걸 개발해야만 했다.
한참 능력을 사용하며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있을 때쯤 전화벨이 울렸다.
캐서린이었다.
“응, 캐서린.”
“태범 씨, 논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시간 돼?”
“응, 시간이야 되지. 일 끝나고 집에 들어왔거든.”
“그게 아니라 이번에 비시지 북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거든.”
“어! 정말?”
“응, 인수 관련해서 이야기 좀 나눠보자고 하더라고.”
소문이 사실이었다. SNS 글로벌 기업인 비시지 북(BISAGE BOOK)에서 요즘 젊은 층에서 뜨고 있는 스낵 피쳐를 눈독 들이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다.
하지만 스낵 피쳐의 CEO인 캐서린조차 긴가민가하던 소문으로 사실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늘로써 모든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이 소식은 스낵 피쳐에 투자를 하고 있는 태범에게 또한 희소식, 너무 흥분된 탓인지 심장이 쿵쿵 뛰고 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 차후 계획이 있을 거 아니야?”
“아직 이야기를 해봐야 알 것 같은데, 애들도 지금 딱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든. 나도 아직 확신이 안 가서 태범 씨한테 전화한 거야.”
“음…… 그래?”
“그래도 태범 씨가 기업 보는 눈은 있잖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말이야.”
“그렇긴 한데, 이번 선택은 CEO인 너랑 앤드류 그리고 하인버그가 선택해야 할 문제 아닐까? 아마 비시지 북에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제시할걸? 너랑 친구들이 혹할만한 금액이겠지. 지금까지 비시지 북이 기업 인수를 할 때 그런 식으로 했거든.”
“그럼 스낵 피쳐를 팔라는 거야?”
“아니지. 그건 너랑 애들의 의지에 따라 달렸겠지. 이건 내가 선택해줄 수 있는 입장은 아닌 것 같아.”
스낵 피쳐의 CEO들이 어느 선택을 하든지는 태범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분명 천문학적인 금액이 제시될 텐데, 그 유혹을 이길 만큼 자신이 있으면 기업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돈을 주고 팔든지 말이다.
물론 태범이 단기적인 투자 수익을 목표로 한다면 주식을 비시지 북에 넘기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스낵 피쳐 잠재적인 가치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인수되는 순간 가치의 상승은 거기에서 끝나며 모두 비시지 북으로 흡수가 될 것이다.
무엇이 됐든 간에 태범의 투자는 이미 성공을 이뤘고, 나머지는 CEO의 의지 문제였다.
태범은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그럼 만약에 태범 씨가 CEO였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태범이 선택의 책임을 스낵 피쳐 CEO들에게 넘기는데도 캐서린은 끈질기게 태범의 입장을 물어봤다. 아마도 태범의 안목을 보고 싶은 모양인가 보다.
어쩔 수 없이 태범은 본인의 입장을 말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였다면 끝까지 함께 하지 싶은데?”
“그래? 알았어!”
태범의 대답을 들은 캐서린은 뭔가를 결심한 듯 딱 부러진 말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