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펀드 매니저들과 합의가 끝나고 태범은 본격적으로 투자자들을 모으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가장 먼저 이 사실을 선시티의 대표 양효철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항상 본사 사무실보다는 연구소에 자주 상주하며 일을 하는 현장형 CEO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그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선시티 연구소에서 이뤄졌다.
“선시티에 추가로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네? 정말요?”
태범의 희망찬 이야기에 양 대표는 몸을 움찔거리며 놀라워했다.
그저 아무 방도가 없을 줄 알고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있던 그에게 태범의 한마디는 단비와도 같았으니 말이다.
“저희 회사에서 선시티에 투자할 펀드를 구성하고 투자자를 구하기로 했습니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양 대표는 자리에 일어서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앉으세요. 앉아요. 아직 투자자가 확정 난 건 아닙니다.”
괜히 호들갑 떨며 김칫국을 마실까 태범은 양 대표에게 앉으라며 손짓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양 대표가 물었다.
“근데 투자자는 어떻게 구할 생각이십니까? 솔직히 저희 회사에 과감하게 투자할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생각이라도 있으신 건지.”
“네, 맞아요. 누가 기술을 빼앗긴 기업에게 투자를 하겠어요. 게다가 기술이 전부인 기업한테 말이죠.”
들떠있던 양 대표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그럼 어떻게 하신다는 건지.”
“투자자들에게 확신을 줘야죠.”
“확신이요?”
“네, 선시티 투자에 손실은 없다는 걸 보여주는 확신이요. 저희는 투자자들에게 이 확신을 보여주고 투자를 얻어낼 생각입니다.”
양 대표는 태범이 무슨 말을 이해를 못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투자에 손실이 없을 수 있나요? 저는 좀 이해가 안 가는데…….”
“선시티에 투자하는 금액만큼은 원금 보장형으로 운용할 생각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라도 승부를 봐야죠.”
“아니, 원금 보장형이요? 저희 기업에 그런 투자가 가능합니까?”
양 대표 본인도 자신의 기업을 무조건 수익을 낸다는 확신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원금 보장은 도박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리스크를 조절을 위해 분산 투자를 하며 원금 보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한 기업에 투자하는 금액을 원금을 보장해준다는 건 흔치 않는 일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역시나’하는 표정이다. 양 대표는 태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뭐죠?”
“선시티 측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제게 오픈 해줬으면 합니다. 그리고 저랑 같이 일했으면 합니다.”
“같이 일하자는 건…….”
“새로운 자본으로 이뤄지는 연구, 개발은 저와 함께 협업을 하자는 겁니다. 저도 연구원으로서 일에 참여하겠습니다.”
“연…… 연구원이요? 대표님이 직접요?”
태범의 제안을 들은 양대표는 당황스러워했다. 마치 축구 선수가 내일부터 야구 선수를 하겠다는 느낌의 뉘앙스로 들렸으니 말이다.
태범이 갑자기 연구원이라니 양대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대표님이 직접 연구, 개발에 참여하신 다고요? 외람된 말씀이시지만 대표님은 이쪽 분야랑은 거리가 좀 있지 않습니까?”
“아직 경험은 없지만 일에 참여할 수 있는 지식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양 대표는 잠시 눈을 테이블 위로 내려 깐 채 고민을 하고는 말을 꺼냈다.
“단지 지식만으로 팀을 이끌어 나간다는 게 쉬운 게 아닐 텐데요. 대표님을 못 믿는 건 아닙니다만 이쪽에서 같이 일하시려면 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합니다. 전기, 전자는 물론 화학 분야의 지식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팀을 이끌어 나가시려면 어려움이 있으실 겁니다.”
양 대표의 심각함에 태범은 여유 있는 웃음으로 답했다.
“하하하. 그 정도도 모르고 제가 팀을 이끈다고 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제게 맡겨 주시죠. 제가 끌어온 투자인 만큼 끝까지 책임을 져보고 싶네요.”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말고요. 전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하는 사람입니다.”
차마 말할 수 없는 비장의 무기.
이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양 대표는 여전히 태범의 연구, 개발참여에 우려를 보이고 있지만, 태범은 달랐다.
스캐너라는 비장의 무기를 지닌 태범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그저 대학생에 불과했던 사람은 천재로 만들어주고 만능인이 되게 해줬다. 그리고 지금은 유망 받는 청년 CEO가 되었다.
그만큼 스캐너의 능력은 대단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태범은 이번에도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스캐너에 대한 존재는 말해줄 수 없지만, 이를 통해 얻은 능력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양 대표의 가진 생각은 완전히 뒤집혀질 것이라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이사진들과 논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의아한 감정을 감추지는 못하고 있지만, 일단 양 대표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 * *
태범의 과감한 제안은 많은 투자자로부터 관심을 사고 있었다.
원금 100% 보장이라는 사모 펀드 투자 제안은 그 어디에도 찾기 힘든 유일 무일에 가까웠다.
사실상 투자만 한다면 돈을 무조건 번다는 이야기인데 사기꾼도 아니고 금융계에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강태범이 제안했으니 이는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태범과 가장 빠르게 접촉을 시도한 건 명동의 백 여사였다.
역시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도 증명을 하듯 반응 한번 기가 막히게 빨랐다. 아마 백 여사 집안은 남들보다 돈 냄새에 민감한 DNA가 있지 않을 듯싶었다.
그렇게 백 여사는 항상 그래왔듯 윤우열 실장을 태범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진주 귀걸이에 각종 보석이 박힌 목걸이로 치장한 백 여사는 창문 밖 햇볕을 반사시키며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녀와 만날 때는 말하는데 신중해야만 했다. 투자를 위해 혼신의 연기까지 선보일 정도로 지독하고 신중한 사람이니 말이다.
“오랜만이네요. 호호.”
“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기분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 가슴 아픈 일이 생겨 좀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죠.”
최근 선시티 문제 때문에 투자자들 역시 고민이 많았을 텐데 백 여사에게는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백 여사 정도면 감정을 충분히 숨기고도 남을 사람이지만 딱히 부정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 여사와 태범은 소파에 마주 앉았고, 윤우열은 멀찌감치 서서 둘의 대화를 바라봤다.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선시티 때문에 마음이 좀 걸렸거든요.”
이왕 투자가 성공한 김에 모든 게 완벽했으면 좋았을 걸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누가 그런 일이 생길 줄은 알았겠습니까?”
“차마 그런 변수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네요.”
태범이 아쉬워하는 모습에 백 여사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그건 아쉽긴 하지만 전 이번에 대표님을 새롭게 봤습니다.”
“네?”
“보통 사람이었으면 선시티를 포기하고 빠져나올 궁리를 했을 텐데 이번에는 본인 모든 걸 내걸고 또 투자를 하신다면서요? 이건 일반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에서는 나올 수 없는 생각인데 말이죠.”
“전 오점을 남긴 것에 자꾸 신경 쓰이더라고요. 제게는 오점이 존재하면 안 되거든요. 안 그럼 괜히 저 자신에게 부끄러워진다고 할까, 그런 기분이 들거든요.”
태범은 실패에 대한 자책이 남들보다 엄격했다.
이미 세상을 치트키를 쓰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기 때문에 실패에 대한 기준이 엄격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이 실패한다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들지만 능력을 주는 스캐너라는 어마 무시한 기능을 가진 태범에게 실패는 있어서는 안 됐다. 이는 본인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뭐 투자하는 사람이 완벽주의 성향을 가진 건 나쁘지 않죠. 근데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니에요?”
“무리가 아니라, 확신이 있으니까 하는 거죠. 전 애초에 질 게임이라면 도전하지 않습니다.”
“호호호. 어쩜 자신감이 이렇게 넘치십니까? 정말 볼 때마다 생각이 드는 건데 꼭 뭐 숨겨두신 거라도 있는 것 같아요. 도대체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제 능력을 믿는 거죠. 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체 없이 행동으로 옮기거든요.”
백 여사는 태범의 말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원금을 100% 보장하는 것 맞죠?”
“네, 이렇게라도 해야죠. 투자자님들을 선시티로 이끌 방법은 이것밖에 없더라고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제 모든 걸 걸기로요.”
“좋아요. 그럼 전 무조건 투자하기로 하겠습니다.”
* * *
참 웃긴 상황이었다. 자산 운용사의 대표인 사람이 이제는 연구원 행세를 한다니 말이다.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아직 이 분야에서 전혀 두각을 드러낸 적이 없던 태범이었다. 이를 바라보는 선시티의 연구진은 태범과의 협업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천재라고 해도 우리랑 같이 일하는 게 말이 돼?”
“그러게 말이야. 저 사람 이쪽 분야랑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인데 팀을 이끌겠다니?”
태범이 선시티 연구소에 온다는 소식에 직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믿을 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전문가도 아닌데 우리 팀을 이끌다니 말이 돼?”
“야, 천재라잖아. 그 대단한 천재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
연구원은 태범을 비꼬듯 말했다.
대부분 연구원들은 에너지, 물리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이 석, 박사들로 이뤄진 전문가들로 아무래도 이 분야에서 아무 이력도 없는 그저 투자자에 불과한 태범이 팀을 이끈다고 하니 못마땅해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원들의 생각을 대표해 전지개발팀의 조문기 팀장이 총대를 메고 양효철 대표에게 항의에 가깝게 말을 꺼냈다.
“대표님, 강태범라는 사람이 우리 팀을 이끈다는 소문이 있는 데 사실입니까?”
“어떻게 벌써 알았어? 소문 한번 빠르네.”
“아니, 제가 듣기로는 그 사람 금융업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개발팀의 실무자로 참여하다니요. 게다가 팀장 직급으로 말이죠.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지 않습니다.”
“후…… 그런 이야기 나올 줄 알았다.”
양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나라고 그렇게 생각 안 해봤겠어? 근데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그런 요구를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해?”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실무에 직접 관여한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혹시 강태범이라는 사람 다른 목적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
조 팀장의 질문에 양 대표가 집게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 그렇다고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대표라는 사람이 설마 그러겠어?”
“그래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닌데 실무를 맡겠다니요. 여기가 무슨 애들 장난감 만드는 곳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도 어쩌겠어. 한 번 믿어 볼 수밖에…… 그리고 그 사람처럼 우리 회사를 신경써주는 사람이 어딨어?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손절하고 이 회사에서 손 뗐을 걸? 분명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러는 게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