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태범은 스캐너가 주는 능력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신감이 더해지는 바람에 회의에서 그렇게 자신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본인도 확신할 수만은 없었다.
일단 선시티가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샹차이에 빼앗긴 기술을 뛰어넘는 또 다른 기술을 만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 기술을 만들자니 회사에 추가 자본이 필요했고 자본을 얻자니 다시 기술이 필요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도는 기업의 시스템. 하지만 이번에 기술을 빼앗김으로써 띠의 한 부분이 잘려나가고 말았다.
태범은 본인의 능력으로 그 잘린 부분을 연결시켜야만 했다.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선시티의 투자자를 구해오는 것.
선시티의 연구, 개발을 도와줄 자본을 대줄 그럴 투자자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자들에게 달콤한 유혹 거리를 제시해야 하지만 현재 선시티에는 그게 없다.
지금까지 선시티의 신기술이 그 역할을 해줬지만 동종업종인 샹차이에 기술을 뺏긴 이상 신기술의 역할은 거기서 끝나버렸다.
그러기 때문에 신기술이라는 미끼가 없이 투자자를 구해야만 하는데 아마도 다른 미끼와 유혹거리가 필요해 보였다.
두 번째는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
선시티가 도떼기시장에 있는 가게도 아니고 아무런 물건이나 파는 회사가 아닌 사실상 에너지에 대한 기술을 빌려주고 판매하는 회사였다.
동종기업이 갖지 못한 독창적이고 효율적인 그런 기술이 곧 회사의 자산을 말했다.
하지만 이를 얻기 위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가 필요하니,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가까웠다.
* * *
늦은 저녁 태범은 선시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에 빠져있었다.
거실에 서서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태범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던 중이었다.
태범 혼자 있는 넓은 집안은 적막감이 흐르고 있지만 그 적막을 느끼지 못할 만큼 머릿속은 혼란 그 자체였다.
‘무조건 생각해 내야만 한다.’
능력을 지닌 태범에게는 실패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었다.
띠리링. 띠리링.
그렇게 아이디어가 나올까 말까 머릿속을 애간장을 태울 때쯤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일까. 태범은 생각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태범아, 오늘 아빠 차 가져왔다.”
아버지에게 사드린 차를 오늘 인수 받으셨나보다. 그렇게 몇 년 전부터 ‘차차차’거리던 아버지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태범은 스캐너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본인의 꿈만 아니라 여려 사람의 꿈을 이뤄주고 있었다.
물론 큰 꿈은 아니더라도 행복을 공유한다는 건 태범에게도 행복한 일이었다.
지금은 흔치 않지만 어릴 적 음식이 생기면 항상 나눠주던 옆집 아주머니의 심정이 이랬을까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기뻐하니 태범도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방금까지 고민으로 복잡했던 머릿속이 잠시 여유를 찾는 시간이었다.
“정말? 어때? 마음에 들어?”
“그럼! 누가 사준 차인데. 내일 네 엄마랑 차타고 바다나 놀러 가려고.”
“놀러 가서 엄마랑 맛있는 거 먹고 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지. 태범아 너는 시간 안 되지?”
“나? 요즘 또 일이 바빠질 것 같아서. 아무래도 시간 내는 건 힘들 것 같은데.”
“그래, 돈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어놔야지. 아! 그리고 일하는 데 힘든 건 없지?”
“응. 잘 모두 되고 있어.”
“아이고. 그래, 아빠는 태범이 네가 잘되니 좋다.”
태범은 고민이 있더라도 아버지에게 그와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집에는 오직 희소식만을 전해주고 싶었다.
물론 고민을 공유하며 이를 해결하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굳이 가족에게 짐을 주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일적인 면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아, 그리고 엄마가 시간나면 그쪽에 간다니 비밀번호 문자로 보내줘.”
“집에 온다고?”
“응, 저번에 가져다준 반찬은 다 먹었을 거 아니야? 엄마가 반찬 새로 해놨다는데?”
“아. 집에서 밥 먹는 일 얼마 없어서 안 그래도 되는데. 다음부터는 싸 오지 말라고 말해줘.”
“알았다. 근데 엄마가 그렇게 말한다고 들을지는 모르겠다.”
“후…… 알았어.”
“태범아, 너도 엄마 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슬슬 결혼 생각 해야지?”
요즘 아버지는 은근슬쩍 결혼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이제 차를 얻었겠다. 아버지의 다음 목표는 손주를 보는 것이었다.
태범은 아직 20대 중반에 결혼 생각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은근슬쩍 떠보는 아버지 때문에 잠깐 생각은 해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였고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은 태범에게 결혼은 성급하게 느껴졌다.
“그건 내가 알아서 때가 되면 생각해 볼게.”
“그래, 알았다. 그럼 푹 쉬고. 차는 잘 탈게.”
“잘 주무세요.”
그렇게 아버지와의 전화 통화를 마친 태범은 다시 머릿속에 든 일터로 돌아갔다.
다시 천천히 집중력을 끓어 올리며 일에 대한 생각에 몰두했다.
침대에 가만히 엎드려 마치 명상을 하듯 인물들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뭔가 생각이 날 것 같으면서도 밖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기침이 나올 것처럼 코가 간질거리다가 턱! 하고 막히는 느낌 간지러운 다리를 긁어보지만 간지러움이 해소가 되지 않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며 시곗바늘은 12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태범은 잠시 생각을 멈추며 컴퓨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는 2년이 지난 시간 태범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상상력를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19%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20% 진행되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지식인 물리에 이어서 상상력에 스캔을 진행시켰다.
그 결과 머릿속에는 가상의 실험실이 하나 생기고 있었다.
실체가 없다 하더라도 오직 머릿속이라는 가상의 세상에서 본인만의 세상을 그려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상상에는 한계도 어떠한 방해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하는 데로 내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된다.
스캔을 마치고 침대에 다시 누워 고민을 했다. 몸만 쉬고 있을 뿐이지 머리는 여전히 돌고 있었다. 이러다가 자연스럽게 잠에 들면 된다.
‘그래, 사람 그 자체가 기업의 자원이지.’
베개를 애인 삼아 껴안던 태범은 선시티라는 회사의 근본부터 다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몇 번을 생각해도 선시티에게 남는 건 사람뿐이었다.
더 이상 특별한 자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남은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만이 회사에 있을 뿐이었다.
기술을 빼앗겼을지 모르지만 이를 개발한 인력은 여전히 회사에 남아있다.
한번 성공했는데 두 번이라고 성공 못 할까?
그까짓 빼앗긴 기술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개발하면 되는 것이다.
결심의 물꼬를 한 번 트고 나니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 방법은 오직 이것밖에 없는 듯 보였다.
태범은 선시티를 이끌고 커다란 도박을 해볼까 생각에 있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 * *
TB 자산 운용 회의실.
태범은 선시티 투자와 관련된 생각을 논의하기 위해 펀드 매니저들을 불러 모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하하. 요즘 재밌는 일이 많이 일어나죠?”
태범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번 살피고는 반어법을 통해 농담을 건넸다. 직원들은 겨우 입꼬리만 움직이고 눈이 가만히 있는 걸 봐서 억지로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들 예상은 하시겠지만 오늘은 선시티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태범은 회의에 목적을 말하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이번에 새로 운용되는 펀드를 통해 선시티에 투자할 사람을 구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범의 말에 회의 시작부터 펀드 매니저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 기색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 중 TB 미래 펀드를 운용하기로 한 배철주가 물었다.
“네? 선시티요? 요즘 기술 유출 때문에 상황이 어려운 기업 아닙니까? 안 그래도 투자 취소 때문에 아우성이던데…….”
“네, 맞습니다. 지금 이 위기를 넘기려면 추자 자금이 필요한데 회사 측에서 해결책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도와야합니다.”
“근데 그걸 굳이 우리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모든 게 선시티 측의 잘못 아닙니까? 저희는 투자자이지 경영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철주의 말에 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자본이 들어간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희가 직접적인 경영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자본이 들어갔기에 선시티 또한 저희 회사랑 다름없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합니다.”
다들 표정들을 보아 하니 태범의 말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분위기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누가 봐도 힘들어 보이는 기업에 재투자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펀드 매니저들이 의구심을 갖던 중 이번에는 TB 샛별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김태식이 물었다.
“태표님 말이 맞다 쳐도 투자자를 어떻게 구하죠? 안 그래도 우림 자동차 측에서도 투자에 발을 뺐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투자를 할까요?”
“사람을 모을 수 있는 미끼를 던져야죠.”
“미끼요? 그런 게 있습니까?”
“네, 여기 있지 않습니까? 바로 제가 그 미끼가 되도록 할 겁니다.”
김태식의 질문에 태범이 씩 미소를 짓더니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뭘 어찌하시려고…….”
“만약 투자가 실패하면 모든 손실액 제가 보전해 드릴 겁니다. 선시티에 투자될 금액만큼은 완전 보장형 펀드입니다.”
‘완전 보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점점 굳어졌던 펀드 매니저들의 염려에 정점을 찍었다. 실제 펀드 매니저 중 몇몇은 하다못해 회의 도중 한숨을 쉬기까지 했다.
“아니,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선시티 경영진이 잘못한 걸 대표님이 독박 쓰시려 합니까?”
“지금은 이 상황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아니면 저희가 투자한 200억을 그냥 휴지통에 버리던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했다가는 일만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찌하시려고 합니까?”
김태식은 평소 태범에게 하지 않았던 말들을 용기내서 말하고 있었다. 그저 태범을 믿고 따르던 직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태범의 결정에 이해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태범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에 문제가 생긴 게 선시티만의 독자적인 기술이 다른 기업으로 유출되어 생긴 일입니다. 그럼 답은 하나 아닙니까?”
“그런 기술을 다시 만들면 되는 겁니다. 여전히 선시티에는 사람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전 사람의 ‘능력’에 믿음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한번 했다면 또 다시 일을 일궈내는 것쯤이야 어렵겠습니까?”
태범은 본인의 능력과 선시티 연구원들의 능력을 믿었다. 둘이 힘을 합친다면 다시 선시티를 일으켜 세울 기술을 만들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태범의 확고한 생각에 펀드 매니저들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회의실에 적막감이 돌자 태범은 다시 입을 떼며 말했다.
“제가 오직 능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세상에 사람의 능력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충분합니다. 너무 걱정하지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