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성공을 이룬다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모교의 본인의 이름을 거는 것.
‘이곳에 나라는 사람이 있었다.’라는 걸 성공으로서 알려주고 싶었다.
성공은 혼자 간직하기보다는 서로 공유해야 더욱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언제쯤 그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 하던 중 때마침 중요한 일들이 지나가고 잠시 여유가 찾아왔다.
태범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학교를 찾아갔다.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전히 학교에 발을 디디면 학생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추억이 깃든 경상대 건물 내 복도를 걷고는 회계학과의 김영석 교수의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오! 태범이 왔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김영석 교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줬다. 마치 오래된 애인을 다시 만난 듯 반가움을 표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태범도 고개를 숙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태범에게 본인을 회계사의 길로 이끌었던 김영석 교수는 잊지 못할 인물이다.
태범의 능력을 발견하고는 길을 안내해줬으며 그 결과 회계사라는 직업을 갖게 되어 지금의 태범이 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능력은 오로지 스캐너의 덕이긴 하지만 인생의 갈림에서 선택을 도와준 사람은 김영석 교수였다.
“그래, 여기 앉아라.”
“네.”
태범은 교수의 손짓에 소파에 앉았다.
항상 낯설고 어색한 교수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편안했다.
확실히 같은 공간이라 할지라도 어느 입장에서 오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태범은 교수가 건넨 녹차가 담긴 종이컵을 손으로 감싸며 말을 꺼냈다.
“제가 자주 찾아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요.”
“바쁜데 여기 올 시간이 어디 있겠어. 사업하는 사람이 1분 1초가 소중할 텐데. 남 신경은 너무 쓰지 말고 일에만 집중해. 그렇다고 건강까지는 무시하지 말고.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인 건 잘 알지? 건강 나빠지면 돈이고 뭐고 아무것도 소용없어.”
“네, 교수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대로였다. 여전히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라는 별명답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태범에게 할 말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그래, 요즘 일은 잘 돼가지? 요즘에 기사에도 많이 나오고 청와대까지 갔다 왔던 것 같은데. 요즘 내 또 다른 취미가 태범이 자네 기사 찾아보는 거야. 그래도 자네가 내 제자라고 애착은 가더라고.”
“하하. 감사합니다. 일은 생각만큼 잘 되고 있어요.”
“물론 그러니까 이렇게 학교에 장학금도 기부하고 하는 거겠지.”
그렇다. 오늘 태범이 학교에 온 이유는 장학금을 기부하기 위함이었다.
학교에 본인의 이름을 알리고 빛내는 건 이만한 게 없다. 어쩌면 돈으로 명예를 사는 느낌에 속물이라고 느낄 수 있지만 이것이 현실인 걸 어쩌겠나.
돈이 곧 성공을 알리고, 명예가 되니 말이다.
“고시반 사람들은 요즘 어때요?”
태범은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의 근황이 궁금했다.
옆에서 같이 땀 흘리며 공부하던 이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고 회계사 2차 시험이 끝나고 발표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또 어떤 사람이 합격의 길을 걸을지 말이다.
“아! 태범아 그거 알고 있니?”
“네? 어떤 거요?”
“요즘에 태범이 자네 때문에 회계사 준비한다는 애들이 많아졌어. 저번에 현택이한테 준 그 문제 있잖아? 준비생들이 그걸로 공부해서 1차에 많이 합격했잖아. 그 때문인지 다른 애들도 자극을 받아서 회계사 준비한다고 너도나도 그러더라고.”
“정말 제 문제가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러고 보면 현택이 형의 의지가 합격을 만든 셈이죠.”
“요즘에 이 책이 그렇게 잘 나간다던데.”
교수가 엉덩이를 들더니 옆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건 바로 태범이 상정회계법인과 함께 저자로 참여한 회계사 준비과정에 쓰이는 문제집이었다.
얇은 노트 한 권 수준이었지만 문제 하나에 다양한 과목의 지식이 집약되어있어. 사람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제였다.
점수를 위한 문제집이 아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문제집에 가까웠다.
어쩌다 보니 회계학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 된 문제집이었고 태범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짭짤하게 들어오는 인세를 보면서 피부로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교수님도 그 문제집 가지고 계시네요.”
“회계학 공부하는 사람 치고 요즘 이거 안 가지고 있는 찾기 힘들 걸?”
“교수님도 풀어 보셨어요?”
문제집에 손때가 타 너덜너덜해져 있는 걸 보면 손을 많이 댄 것 같았다.
태범의 질문에 교수는 문제집을 휘리릭 넘겨보며 말했다.
“그래, 풀어봤지. 문제가 아주 정교하고 또 복합적으로 이뤄져 있던데? 아주 훌륭해. 태범이 자네가 이쪽 계통에 계속 있었으면 회계사 문제 출제 위원으로 뽑히고도 남았을 거야.”
“그게 회계사 시험 마무리 공부할 때 만들어 놓은 문제라서요. 문제가 여러 과목이 섞여 있었을 거예요.”
“문제 만드는 것도 다 능력이지. 아무리 그 분야에 뛰어난 사람도 문제를 만드는 건 쉽지가 않잖니. 문제 만드는 것이 학습 능력과는 다르게 창의력과 창조적인 두뇌 능력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자네는 참 대단한 거야.”
교수는 태범을 향해 손짓을 하며 칭찬을 건넸다.
예전이라면 충고와 조언을 하기 바빴을 교수였지만 이제는 태범의 칭찬을 늘어놓는데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는 태범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보여주는 교수의 모습이었다.
“태범아, 나도 주식 투자 좀 해보고 싶은데 그쪽에서 자문 좀 받을 수 있을까?”
“아, 언제든 오세요. 안 그래도 고객들이 많이 찾아와서 직원을 늘리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오시면 불편함 없이 자문해드릴 거예요.”
“그래? 그럼 그래야겠네. 요즘 예금이니 적금이니 해서 가지고 있어봤자 손해만 보는 것 같더라고, 물가는 왕창 오르는데 이자는 쥐꼬리만 하게 주니까. 이거 완전 돈 가지고 있는 게 손해라니까!”
“그렇죠. 많은 사람들은 일만 해서 돈을 벌면 되는 줄 아는데, 사실 가장 중요한 건 돈으로 돈을 버는 방법이죠. 그리고 그걸 도와주는 게 저희 회사고요.”
돈이 돈을 버는 사회.
이제는 일해서 돈 버는 시대는 한 물간지 오래였다.
힘들게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한 시대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은 불로소득을 어떻게 증대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주로 부를 이루게 된다. 그런 이 시대는 태범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 아주 적합했다.
강태범의 시대인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교수와 태범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슬슬 가볼까?”
교수는 손목시계를 한번 쓱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하더니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제 본격적인 이벤트가 열릴 시간이 된 것이다. 태범이 학교에 온 이유.
태범도 교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실을 나서며 본관 총장실로 향했다.
“어? 강태범 아니야?”
“어. 진짜네.”
태범이 캠퍼스 안을 가로지를 때마다 학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연예인 병은 아니고 정말 학생들은 태범을 알아보고 있었다. 학생들의 옆을 지나면 ‘어!’ 하면서 고개를 꺾고는 태범을 바라봤다.
어느새 학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버린 태범은 모교에서 유명인사가 돼버린 것이다.
“와. 나 학교다니면서 실물 처음 봐.”
“저 나이 때 저렇게 성공하다니 진짜 부럽네. 강태범 저 사람 완전 자수성가잖아.”
“머리가 똑똑하니까 성공한 거지. 우리 같은 사람이 창업 해봐라. 바로 망하지. 아휴. 부럽긴 부럽다.”
태범은 옆을 지나가는 학생들로부터 부러움의 말과 시선이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길을 걷고 있지만, 속으로는 많은 관심에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태범은 그렇게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한 블록 정도 건너에 있는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있는 총장실에 올라갔다.
총장님과의 만남은 이로써 두 번째 였다.
두 번 모두 성공을 알리기 위해 온 자리였다.
첫 번째는 회계사 수석 합격으로 총장과 기념사진을 찍으러 왔었다. 이번에는 사회에서 성공을 이룬 보상을 조금 나눠 주려 왔다.
“어서 와요, 강태범 대표님.”
“안녕하세요, 총장님.”
새하얀 머리에 나이 많은 총장은 밝게 미소를 지으며 태범은 반갑게 맞이해 줬다.
둘이 악수를 나눈 뒤 총장이 공손하게 손으로 자리를 가리키며 안내했다.
이전에는 ‘학생’ 이라는 호칭과 말을 편하게 했던 총장이었지만 지금은 ’강태범 대표님’ 라는 호칭에 상전 모시듯 깍듯이 대했다.
말투와 행동의 미세한 차이부터 변화된 대우를 느낄 수 있었다.
태범과 총장 그리고 김영석 교수는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총장 비서로 보이는 여성이 화려한 자기 찻잔에 담긴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총장이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잎차입니다. 몸 안의 노폐물을 제거해주고 정신을 맑게 도와주죠.”
“네, 잘 마시겠습니다.”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 전 소파에 앉아있던 셋은 뜨거운 차를 한번 입에 댄 이후에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찍 성공하셔서 우리 학교에 기부하는 사람은 대표님이 처음일 겁니다. 허허.”
“저도 영광입니다. 저도 제가 빠른 시간에 이런 자리에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운이 좋았나 봐요.”
“그 나이 때면 한창 취업 준비를 할 때인데 벌써 모든 걸 이루셨네요. 대단합니다.”
총장은 감사함을 칭찬으로 대신하는 듯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태범은 이를 미소로 받아줬다.
“총장님, 강태범 대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고시반에 추천한 것도 그걸 느꼈기 때문이거든요. 앞으로도 지금 보다 더 잘 될 사람입니다…….”
“허허. 김 교수가 사람 보는 눈은 좋은가 보군요.”
이 기회를 놓칠세라 김영석 교수도 본인의 사람 보는 눈을 총장에게 어필했다.
교수 입장에서 대학 총장은 최고의 직장상사 아니겠는가. 교수도 나름대로의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학교에 기부할 생각을 다 하셨습니까? 1억이면 분명 적은 돈이 아닌데 말이죠.”
총장은 태범의 눈을 은근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총장님도 알다시피 제가 투자 일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사실 저는 ‘기부’보다는 ‘투자’를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생각하면 1억이 아니라 10억이라도 별로 아깝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허허허. 확실히 성공한 사람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것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군요. 어쩜 그런 생각을 하셨습니까?”
“제가 하는 일이 다 이런 건데요. 뭐. 그냥 직업병에 가까운 생각이죠.”
“직업병이라고요? 그 훌륭한 생각이 어떻게 병이겠습니까? 그게 병이면 저도 한번 그 병에 걸린 환자가 되어보고 싶군요. 허허허.”
“하하하.”
총장의 농담과 함께 세 명의 화기애애한 웃음이 총장실 안을 가득 채웠다.
“총장님, 준비 다 됐습니다.”
찻잔에 차가 모두 비어질 때쯤, 총장의 비서가 강태범의 이름과 장학금 1억이 적힌 팻말을 들고 나타났다.
“어허. 그럼 우리 기념사진 한 번 찍을까요?”
대망의 포토타임이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의 커다란 마크가 보이는 벽면 쪽으로 다가갔다.
총장실에 있는 일종의 포토 존이었다.
먼저 총장과 태범은 포토 존에 서서 팻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총장과 일대일로 한번 찍고 그리고 김영석 교수와도 함께 찍었다.
그렇게 인증 사진을 남기고 태범은 학교의 장학금 기증자로서 얼굴을 알리게 된 것이다.
“학교에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을 찍고 한 번 더 고마움을 나타내는 총장에게 태범은 제안을 하나 했다.
“총장님, 제가 앞으로 저희 회사와 학교를 연계시켜 교육이나 취업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대표님, 회사에서 직접이요?”
“네, 이 학교에는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회사랑 손을 잡는 다면 그 잠재력을 깨울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떠세요?”
“아이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저희야 완전 환영이죠. 오늘 선물을 두 가지나 주고 가시려나 보네요?”
총장은 갑작스러운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태범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줬다.
요즘 대학이 학문을 위하기보다는 취업을 위한 학교라고 할 만큼 취업률에 목숨을 거는데 기업과의 연계는 학교로서 무조건 감사할 일이었다.
총장은 선물로서 태범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지만 태범은 선물을 건넨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인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