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모 펀드의 가입할 투자자들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사모 펀드는 비공개로 소수의 투자자를 모집한 뒤 자금을 운용하는 걸 말했다.
그러다 보니 무작정 투자자를 모집하는 것보다는 거물급 투자자들을 선별해 이들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했다.
현재 태범이 단박에 떠오르는 거물급 인물을 떠올리자면 두 명이 있었다.
왕첸과 앨론 뮤직의 임호진 대표였다.
일단 왕첸은 본인이 사모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 펀드 매니저이기 때문에 그를 직접 투자에 참여시키기에는 어려웠다.
그러면 남은 인물은 임호진 대표.
왕첸의 사모 펀드 어빌리티에서 투자를 얻어내 성공을 이룬 인물.
나이도 젊고 추진력과 과감함을 겸비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투자자로 참여시키기에 충분해 보였다.
태범은 임호진 대표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그 즉시 그와 연락을 취했다.
* * *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정도 가지고 뭘요. 회계사님, 아니지. 이제 대표님이시죠? 대표님 덕에 저희 회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요. 한 번쯤은 찾아 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태범과 마주 보고 있는 남자. 그는 앨론 뮤직의 대표 임호진이었다.
청바지에 셔츠 차림을 한 그에게 여전히 IT기업의 자유로운 문화가 느껴졌다.
앨론 뮤직은 왕첸의 사모 펀드로부터 투자를 받아내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고 그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태범이었다.
하마터면 투자가 물거품이 될 수 있는 상황에 태범의 능력은 마치 그에게 구세주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지금은 ‘키키오’ 라는 중견 기업에 기존 가치의 3배 이상에 매각되었으며 그는 여전히 경영을 맡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떠오르는 청년 투자자로 20-30대들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나의 이제 고작 37살이었다.
태범 역시 젊은 나이에 성공을 이룬 그를 한 명의 경영자로서 존경하고,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일이 잘됐다 하니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야말로 대박 아니었습니까?”
“대박이긴 했죠. 하하. 감사합니다.”
호진은 앨론 뮤직의 좋은 결과를 환한 미소로 답했다.
두 대표의 만남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왕첸 씨랑은 연락을 하시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네, 덕분에 좋은 인연을 만들었죠.”
“세상 참 신기하네요. 아무것도 아닐 것 같았던 만남에서 이제는 깊은 인연이 돼버렸으니 말이에요.”
모든 게 좋은 결과로 이뤄졌으니 왕첸, 태범, 호진 이 세 명 모두 좋은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만약 일이 틀어져서 투자가 실패가 됐다면 이 세 사람이 지금과 같은 인연을 갖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태범과 호진은 이런 인연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제가 이번에 사모 펀드를 운용한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여기 직원한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전 태범 씨가 회계사를 그만둘지 알고 있었습니다.”
“아, 그래요?”
“태범 씨가 회계사로 있을 때 업무상 저랑 만났을 때 있지 않았습니까?”
“네.”
“그때 말하는 걸 보면 야망이 아주 커 보였거든요. 보통 신입이라 하면 선배들 옆에서 기죽어 있을 텐데, 태범 씨는 너무도 당당했어요. 제가 그런 성격을 잘 알거든요.”
호진은 태범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태범과 호진은 흡사한 면이 많았으니 말이다.
일단 젊은 나이 때 성공을 이뤘다는 것부터 시작해 도전을 위해 모험을 감수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것까지 사업가로서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태범은 본인의 통찰력을 뽐내는 호진에 맞장구를 쳐주며 펀드 관련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제가 이번에 운용할 사모 펀드인데 천천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태범이 임호진을 가장 먼저 만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 키키오에게 앨론 뮤직을 매각하면서 임호진은 천문학적인 돈을 얻게 됐는데 이게 모두 1,000억 원대의 유동자금으로 남아있었다.
즉 당장 움직일 수 있는 1,000억대의 자금이 있다는 의미였는데 태범은 이를 본인의 사모 펀드 투자로 유인하려는 생각이었다.
1,000억 중 1%만 해도 10억이다. 최소한 어느 정도는 태범에게 보답할 거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태범은 호진에게 예상되는 투자 기업 목록을 보여주며 하나씩 설명에 나섰다.
공학적인 내용까지 모두 설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에 설명을 최소한으로 간추려 투자 대상 기업의 유망성을 평가해 보여주었다.
“정말 이 기업들이 앞으로 유망한 기업이라는 거죠?”
“네, 그렇죠. 저희가 투자만 제대로 해줘서 자금만 뒷받침되면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기업들입니다.”
호진은 미간을 모으며 투자 기업 목록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태범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대며 경청하고 있었다.
“태범 씨, 완전히 완전 기업 족집게 아니에요?”
“족집게가 돼야 투자에 성공하죠. 안 그러면 돈만 갖다 바치고 자선 사업가 꼴이 되겠죠.”
“이거 투자 회사가 아니라 무당을 하셔도 되겠는데요?”
호진은 너스레를 떨며 태범을 치켜세웠다.
이는 태범의 설명에 만족한다는 표현이었다.
“어떠세요? 생각 있으세요? 저희는 좀 공격적으로 투자를 할 거라서 여유가 되는 정도만 넣으시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좀. 리스크가 크긴 하지만 태범 씨, 능력에 투자한다는 셈 치고 한번 해보죠.”
사모 펀드의 첫 번째 투자자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시작부터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보아 이번 사모 펀드의 앞날이 밝아 보였다.
펀드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치고 기업 운영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호진의 입에서 흥미로운 제안이 나왔다.
“태범 씨, 혹시 사람 좀 소개받을 생각 있어요?”
“사람이요?”
호진은 태범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더니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제가 아는 분 중에 큰 손이 있거든요. 혹시 명동에 백 여사라고 들어 보셨어요?”
“백 여사님이요? 처음 듣는데요.”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르 긴하죠. 이분이 과거 사채 왕으로 불리던 백 회장의 딸이시거든요.”
“사채 왕이요?”
“네, 사채 왕.”
호진에 입에서 사채 왕이니 하는 영화 속 캐릭터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호기심이 생겼다.
태범은 2년 전 마약 왕을 다룬 미국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왠지 그때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이과 형 천재의 이미지를 가진 호진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태범은 반짝이 눈으로 호진을 바라봤다.
그런 태범의 호기심을 인지한 호진은 본인이 꺼내려 했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돈이 따라 오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붙더라고요. 뭐 별의별 거머리 같은 사람들도 붙고 평소 만나기 힘든 높으신 분들도 알아서 만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가 우연치 않게 알게 된 분인데요.”
“아…….”
“백 여사라고 현금을 많이 보유한 부자로 유명한 분이죠.”
호진의 설명에 의하면 백 여사는 과거 명동에 사채 사업을 하던 백규환의 딸이라고 한다.
백규환은 가전제품 수리 사업을 통해 마련한 종잣돈으로 사채시장에 뛰어들었는데 그 결과 80년대까지 사채업을 했던 그의 돈을 거쳐 가지 않았던 재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전화 한 통에 재벌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니 말이다.
하지만 제1 금융 시장이 발달하며 사채시장은 무너지고 그는 혜명 그룹이라는 기업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분의 딸인 백 여사가 투자처를 찾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여사님 성격이면 태범 씨에게 관심 있어 할 것 같던데요.”
“아! 그러면 연락처나 만남 좀 주선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제가 따로 그쪽에 연락해놓을게요. 혹시나 그쪽에서 관심이 있으면 연락이 갈 텐데 소식이 없으면 그냥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그렇게 부탁할게요.”
* * *
[중국의 전자 기업 야오밍이 뉴욕시장 상장으로 첫날 시가 총액 약 4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44조 원의 금액을 달성했다고 합니다. 이는 전자상거래 기업인 중국의 아라비안에 이어 2번째 규모라고 합니다.]
요즘 뉴욕 증권 시장에서는 새로운 이슈 하나가 터졌다.
바로 중국의 대표 전자기업 야오밍의 기업 공개였다.
4년 전 중국의 전자상거래 기업 아라비안이 미국 증시에서 최고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고 그러한 기대에 연이어 이번에는 전자 기업 야오밍이 성공적인 기업공개를 이뤘다.
야오밍은 중저가의 제품으로 성능을 유지하며 가성비의 제품을 많이 찍어내며 인기를 얻은 케이스였다.
타 기업의 전자 제품보다는 우수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카드를 이용한 것이 성공 원인이었다.
그러한 성공에 힘입어 자본력이 좋아지자 지금은 나름 기술력을 갖추고 연구 개발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10년도 안 된 기업치고는 엄청난 성장이었다.
“이야…… 대표님, 저게 우리가 찾아야 하는 기업 아닙니까?”
휴게실에서 같이 커피 한잔을 즐기고 있던 윤효성이 TV 속 경제 뉴스를 보며 떠들었다.
“그러게요. 제가 8년 전에 이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으면 저 돈이 저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을 걸요?”
“저런 기업 하나만 제대로 잡아도 정말 대박일 텐데요.”
“너무 부러워하지는 마세요. 앞으로도 저런 기업은 얼마든지 나옵니다.”
이제 태범에게 자신감은 그냥 뼈에 붙은 살과 같았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온몸이 자신감으로 지배된 상황으로 이는 본인 능력에 대한 확신이자 스캐너에 대한 믿음이었다.
“맞는 말이십니다. 저따위 중국 기업 하나에 부러워하면 안 되죠.”
감정은 전염되는 법이었다.
내가 웃으면 옆 사람도 웃듯 자신감 역시 주변으로 전해졌다.
마치 회사의 모토가 ‘자신감’이 되어버린 듯 회사 직원들은 하나 같이 태범과 같은 자신감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 * *
앨론 뮤직 임호진 대표가 TB 자산 운용의 사모 펀드에 투자했다는 소식은 큰손들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큰손이라 하면 기업 회장의 부인, 건물주, 정재계 인물과 같이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을 말했는데 이들은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
큰 손끼리는 서로 연결된 네트워크가 존재했으며 주로 돈을 어떻게 굴릴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그런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앨론 뮤직 대표 호진의 소개로 백 여사라는 사람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백 여사와의 첫 약속은 그녀가 보낸 사람과의 대화로부터 시작됐다.
그녀가 보낸 사람이 태범의 사무실로 찾아왔고 백 여사를 대신한 손발의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반갑습니다. 임호진 대표님한테 연락은 받으셨죠?”
“네, 백 여사님이 사람을 보내신다고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백 여사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윤우열입니다.”
머리카락 한 톨 없는 민머리의 남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뼈가 굵어 보이는 게 힘 좀 쓰는 사람처럼 생겼다.
괜히 그녀의 아버지가 사채 시장에서 놀았다니 남자를 보는 태범은 불순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왠지 점잖게 일하기보다는 주먹이 먼저 나갈 것처럼 생긴 외모였다.
“저한테 모두 설명해주시면 제가 백 여사님에게 전달해드릴 겁니다.”
“네, 그럼 저희가 운용하는 사모 펀드에 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태범은 남자에게 펀드 관련한 계획을 설명했고 곧 이 남자에 대한 생각이 모두 오해와 편견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백 여사가 보낸 남자는 지적인 사람이었고 투자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다.
마치 금융사의 유능한 직원을 보는 듯 했다.
남자는 설명 하나조차 흘려듣지 않고, 예리한 질문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마디로 태범의 설명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여사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