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들어와요, 희성 씨.”
“네!”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요. 솔직히 하루 이틀 있다가 갈 줄 알았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요.”
윤희성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귀에 걸고 있었다.
“대표님이랑 같이 일하게 된다니 믿기지 않네요.”
태범도 희성과 같은 생각이었다.
한때 물어뜯을 것처럼 싸우던 사이에서 같이 일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으니 말이다. 세상에 이런 인연은 흔치 않을 것이다.
태범과 희성은 소파에 앉아 천천히 대화를 나눴다.
“제가 희성 씨에 대해 모르는 게 많아요. 서로에 대한 이야기 좀 해볼까요?”
“네, 저에 대한 건 모두 말씀드릴게요.”
태범이 윤희성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곤 오기를 지닌 전업 투자자라는 것뿐이다.
태범이 먼저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희성 씨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쨌든 저희 둘이 첫 만남은 좋은 게 아니었잖아요?”
“그렇죠. 제가 보통 까불었나요. 보통 사람이었으면 저한테 욕으로 대응했을 텐데 대표님은 끝까지 논리적으로 대응하셨죠.”
“그때 화가 난 걸 겨우 참긴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다 추억이죠. 그때 제가 욕으로 대응했으면 지금쯤 서로 고소하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제 성격에 그렇겠네요. 하하…… 그때는 제가 뭘 모르고 까불었던 것 같네요. 사실 그때 제 기분이 좋지 않을 때였거든요.”
윤희성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안 좋은 과거가 있는 듯 보였다.
“무슨 일 있었나요?”
“투자로 거하게 말아먹었죠.”
희성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태범은 더 이상 자세히 묻지 않았다. 투자 실패라는 말 한마디에 그의 심정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투자를 위해 사람의 심리를 연구하면서 투자에 담긴 희로애락을 모두를 간접적으로 느껴봤기 때문이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태범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희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에 상장 폐지한 셀리 약품. 제가 그쪽에 대한 정보를 잘못 듣고는 투자했다가 말아먹었거든요. 꽤 오랜 시간 투자했던 기업인데 그렇게 배신을 때려 버리니 제가 욱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잘하면 되죠.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하…… 그때는 왜 그랬는지 다 생각해보면 제가 미련…….”
“됐습니다. 그건 그만 이야기하죠.”
태범이 손바닥을 보이며 희성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장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닌 현재였다.
태범이 스캐너라는 동반자를 만나고 인생이 달라졌듯 희성도 태범을 만난 이후로 달라지면 되는 것이었다.
현재라는 중요한 기점으로 이제 앞으로 향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아…… 괜히 분위기만 다운시켰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이미 지나간 슬픈 과거, 떠올려봤자 되돌릴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앞으로 좋은 미래만 생각하시죠.”
괜히 시무룩해질라 태범은 빠르게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태범은 희성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에게 칭찬을 건넸다.
“희성 씨, 생각보다 목적의식이 강하시더라고요.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끈질기게 도전한다는 그 자체가 인상 깊었습니다.”
“과찬입니다. 전…… 그저 대표님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만 했었죠.”
“그렇다면 사람 잘 보셨습니다. 이제부터 저랑 같이 일하시면 실패란 없을 겁니다. 저만 잘 따라와 주세요.”
태범의 모습에 한 치 망설임 없이 자신감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희성은 그러한 태범의 모습에 무한한 신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 저는 뭐부터 하면 되나요?”
희성의 질문에 태범은 관자놀이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답했다.
“희성 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제 머릿속에 있는 걸 가져가는 일입니다.”
“머리요?”
“네, 제 손발이 돼주기보다는 머리가 돼줬으면 합니다. 고객들이 원하는 게 제 머릿속에 들었거든요.”
희성은 태범의 말을 그제야 이해했는지,
“아…….”
“그래서 그런데 한동안은 실무보다는 교육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전업 투자자로써 많이 알긴 하겠지만 새로 배울 게 많이 있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뭐든 알려주시기만 하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계약서부터 쓰죠.”
* * *
“아직 안됐어? 아빠가 빨리 나오래.”
“좀만 기다려.”
오늘은 태범 가족의 외식 날이었다.
요즘 일만 하느라 가족에게 소홀해진 것 같은 게 항상 마음에 걸리곤 했었다.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큰돈을 번 계기가 겹쳐 태범은 온 가족을 데리고 호텔에 있는 뷔페에 가기로 한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평소처럼 입고 가.”
“에이! 그래도 호텔 식당에 가는 건데 잘 차려입어야지.”
아버지와 동생 그리고 태범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딜 갈 때마다 항상 나중에 나오는 건 어머니였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외출 준비가 길어 이해할 만도 하지만 꼭 이럴 때면 아버지는 재촉을 하곤 했다.
“아들이 처음으로 밥 사주는 날인데 기분 좋게 하고 가야지.”
드디어 어머니가 등장, 아버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차로 올라탔다.
아버지 차량에 탄 가족들이 향한 곳은 유명 호텔의 뷔페식당이었다.
평소 외식을 해도 집 주변 고기집이나 갔었지 이렇게 다 같이 차를 타고 호텔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와…… 맛있겠다.”
뷔페에 들어온 태인이는 음식을 보며 감탄을 하며 이런 곳에 처음 와 본 티를 풀풀 풍겼다.
역시나 호텔의 뷔페답게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싸구려 뷔페처럼 가짓수만 채우고 형편없는 질의 음식이 아닌, 좋은 질의 음식이 정성껏 담겨 있었다.
태범의 가족들은 자리에 앉게 무섭게 접시를 들고는 음식을 담았다.
태범 역시 편의점 도시락이나 사무실 근처 맨날 같은 한식당에서 식사를 했으니 오늘의 만찬을 즐겨보자는 심정이었다.
“태범이가 이런 데도 데려 와주고, 어느새 이렇게 커버렸지.”
“그러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용돈이나 받아쓰던 대학생이 벌써 사회인이 다 돼서 말이야. 가끔 보면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
어머니와 아버지는 태범이 외식을 시켜주는 것에 보답이라도 하는 듯, 칭찬을 늘어놓았다.
부모님의 칭찬을 더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배가 빵빵하게 나올 때쯤 태범은 후식으로 케이크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접시에 케이크를 담던 중, 익숙한 얼굴이 태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성하연?”
“어! 강태범!”
태범이 스캐너를 사용하게끔 만든 장본인이자, 태범을 무시했던 그녀였다.
여전히 미모는 대단했고 팔다리가 길쭉한 게 모델의 자태를 감출 수는 없었다.
발표 사건 이후 단 한마디도 안 했고 서로를 피해 다녔기에 얼굴 마주치는 것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당황스럽긴 했다.
“태범이 널 여기서 만나네…….”
“그러게…….”
서로 어색한 기세를 감추지 못하고 얌전한 말투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네 소식 많이 들었어. 회계사 합격하고 회사 차렸다면서?”
“응, 그냥 작게 하고 있어. 너는 모델 일 잘 하고 있어?”
“어? 어…… 나야 뭐 똑같지.”
“그렇구나…….”
태범과 하연의 대화는 짧은 단답형으로 어색한 기류가 잔뜩 흐르고 있었다.
한 때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였지만, 마지막은 그 누구보다도 나쁘게 끝났으니 말이다.
“너 엄청 성공했더라. 학교에서 널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
“아직 성공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
“태범아, 연락해도 괜찮지? 내가 사과할 것도 있는 것 같아서…….”
어색한 분위기에 손을 먼저 내민 건 하연이었다.
마지막 태범을 무시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꺼림칙하긴 하지만 언제까지 과거에 붙잡혀 삐져있을 수만은 없었다.
태범은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제안을 쿨하게 받아드렸다.
“그래, 언제 한번 연락해.”
“알았어. 그럼 연락할 게.”
“응.”
잠깐의 어색한 만남을 뒤로하고, 태범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아이고. 잘 먹었다.”
“엄마, 나 배 터질 것 같아.”
오랜 시간 동안 식사한 태범의 가족들은 호텔을 나섰다.
아버지는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고 있고 태인은 빵빵하게 부른 배를 부여잡으며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와. 차 봐라. 이런 건 얼마 하냐?”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차량 옆에는 한 대의 슈퍼카가 서있었다.
자체가 온통 새빨갛고, 땅에 바짝 붙어있는 이 차량은 ‘빼라리 스파이더’였다.
태범이 인터넷을 통해 본 기억을 되살리며 가격을 찾아본 결과 4억이 넘는 차량이었다.
웬만한 집 한 채가 굴러가는 셈이었다.
“아빠도 이런 차 타고 싶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차를 관심 있게 보는 아버지에게 태범은 물었다.
“무슨 나이 먹고 이런 차를 타냐.”
“나이가 뭐가 어때서? 돈만 있으면 타는 거지.”
“그래도 아빠 나이면 좀 얌전한 거 타야지. 랄스로이스 같은 거?”
아버지의 입꼬리가 흔들리는 게 그저 농담 삼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범은 진지하게 아버지에게 한 마디를 건넸다.
“알았어. 좀만 기다려봐. 내가 그 차 타게 해줄 테니까…….”
“뭐? 허허허.”
태범의 말에 아버지는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비싼 걸 네가 어떻게 사줘. 아들이 그렇게 말이라도 해주니 고맙네.”
아버지는 단지 허황된 희망으로 생각한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태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슬쩍 흘려보냈다.
* * *
자취방에 돌아온 태범은 캐서린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들려줬다.
영국과 정반대의 시간을 지낸 한국에서 그녀와 통화를 하려면 저녁 시간 때밖에는 없었다.
“오빠는 일 잘 돼 가는 거지?”
“나야 잘 되지. 이번에 큰 거 하나 넘겼거든. 스낵 피쳐(snack picture)는?”
대화의 주된 관심사는 서로의 사업이었다.
캐서린과 태범, 둘 모두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일보다 공감 가는 이야기는 없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은 것 같아. 특히 고등학생 나이에서 비중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어.”
“잘됐네. 원래 SNS 사업에 성공하려면 학생들부터 잡아야 하는데 분명 좋은 징조야.”
“정말 그럴까? 학생층에서는 수익구조가 잘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긴 한데…….”
“뭘 걱정해. 이제 시작인 것 같은데. 젊은 층을 시작으로 탄력만 받으면 사용자 수 느는 건 금방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서비스에만 집중해.”
태범은 캐서린의 스낵 피쳐에서 성공에 대한 가망성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상상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업이다.
잘 만든 소프트웨어 하나면 재벌이 되는 것도 한순간인 세상이었다.
스낵 피쳐라고 그러하지 않다는 법은 없었다.
태범은 수많은 기업들을 분석해 왔고, 가치를 평가하면서 기업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통찰력으로 본 스낵 피쳐는 분명 가능성이 있었다.
“근데 서비스를 유지하려면 투자 유치가 필요한데 이게 좀 난관이네.”
캐서린은 사업에 대한 걱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스낵 피쳐는 아직 SNS 서비스만 제공할 뿐 수익 구조가 발달돼 있지 않았다.
현재는 사용자만 끌어오는데 집중하고 있지만 서비스를 유지하기 위해서 드는 비용은 오로지 자기자본에서 깎아 먹어야만 했다.
만약 투자가 추가적으로 이뤄지지 않으면 스낵 피쳐도 어려워지긴 마련이다.
아무리 아이디어와 사업성이 좋아도 결국 사업은 돈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투자 유치는 계속 노력하고 있는 거지?”
“응, 학교에서 도와줘서 사람들을 만나보곤 있는데, 좀 회의적이더라고.”
“쉽지는 않겠지. 요즘 SNS가 한 둘이어야 말이지. 그래도 분명 잘 될 거야. 내가 장담한다.”
“정말? 확신해?”
“그럼!”
캐서린과 전화통화를 마치고, 12시가 지나자 어느 때와 같이 스캐너를 실행시켰다.
이번에는 조지 소로스의 ‘공격적 투기’, 이 하나만을 올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점점 인물이 많아지다 보니 겹치는 능력이 있었고 굳이 이곳에 시간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공격적 투기를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35%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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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36% 진행되었습니다.]
스캔의 진행률이 오르는 순간 다음 투자 목표가 머리에 떠올랐다.
캐서린과 통화를 했던 사업적 내용이 ‘공격적 투기’와 겹쳐져 또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다.
‘그래! 이제는 기업이다.’
성장 가능성을 가득 품고 있는 신생 기업.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태범은 본인의 능력이면 충분히 미래의 새싹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