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역시 왕첸도 보통 사람은 아니네.’
왕첸의 투자 목록을 보던 태범은 다시 한번 왕첸의 능력에 감탄했다.
아무리 자신에게 자문을 받는 고객이라도 어찌 됐건 그는 유능한 펀드 매니저였다.
자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태범이 가리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투자를 하고 있었다.
왕첸은 개별 주식 옵션에 투자를 하고 있었다.
미 금리 인상 발표에도 불구하고 여파를 견뎌낼 종목을 선정, 그 주식의 풋 옵션을 매도하는 것이다.
종목의 선정은 태범의 자문을 토대로 왕첸이 선택한 것이었다.
풋 옵션은 미래에 특정 주식을 팔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만약 미래에 주가가 상승한다 하더라도 풋 옵션을 가지고 있는 투자자는 미리 체결한 금액으로 주식을 매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다.
태범에 일러준 방식으로 왕첸은 풋 옵션의 종목을 선택, 이를 매도했다.
태범은 시간이 날 때마다 금리와 관련된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
[금리 인상은 예정대로 이뤄 질 것.]
[다우지수 폭락, 금리 인상 속도 조정 필요]
[백악관 ‘올해 3차례 기준 금리 예상’]
세계 증시의 하락을 대비해 사람들은 풋 옵션을 매수하는 상황이었다.
주식을 매도할 수 있는 권한을 풋 옵션이라 하는데 금리가 인상되는 시점에서 증시가 떨어질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풋 옵션의 프리미엄이 상승하고 있는 상황. 오히려 풋 옵션을 매도하며 역 배팅을 하고 있는 왕첸에게는 기회였다.
* * *
“오셨습니까.”
오늘 아침 역시 윤희성의 인사를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는 그의 목소리가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또 오셨네요. 도대체 언제까지 오실 겁니까?”
“대표님하고 같이 일할 때까지요?”
희성의 말에 태범은 헛기침을 하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사무실로 들어가려 했다.
“잠깐만요! 대표님.”
희성이 할 말이 있었나 보다. 등을 돌린 태범을 잡아 세웠다.
“하…… 왜 그러시는데요.”
“대표님, 항상 보니까 아침을 못 챙겨 드시는 것 같은데 이거 드시고 하시죠.”
윤희성이 건넨 건 소풍 갈 때나 들고 갈 만한 도시락 통이었다.
“이걸 왜 저한테 주죠.”
“아침마다 빵만 드시잖아요. 건강을 위해서라도 빵보다는 밥이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에이, 괜찮아요. 그냥 제 식사 준비할 때 양만 조금 늘려서 대표님 것도 같이한 것뿐이라서요. 안 힘들어요.”
“다음부터 이러시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전 아침을 간단하게 먹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네, 죄송합니다. 이건 아까우니까 드세요.”
희성이 건넨 도시락을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태범은 하는 수 없이 그가 건넨 도시락을 받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도시락을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태범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 온 빵을 꺼내 입에 물며 고객의 자산을 점검했다.
왕첸 뿐만 아니라 회계사를 하면서 연결된 사람들을 고객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태범에 대한 명성이 입으로 전해지며 직접 만나 인연이 된 사람과 그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이 고객으로 몰려왔다.
한동안은 일에 치여 살아야 할 것 같았다.
* * *
‘벌써 2시가 넘었네.’
일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지나버렸다.
태범은 시계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소파로 걸어갔다.
점심이면 주로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지만 오늘은 희성에게 받았던 도시락이 있었다.
‘그래도 신경 써서 만들었을 텐데 안 먹긴 좀 그렇지.’
사실 먹기에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자니 정성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들어 길래. 도시락이 네 칸이나 되는 거지?’
태범은 도시락을 열어보는 데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연인에게 정성스레 싸준 음식을 보는 것 같았다.
밑반찬은 물론 고기에 후식으로 과일까지 이정도면 분명 신경 써서 준비한 게 분명했다.
희성은 본인 아침 식사 준비하는 겸 같이 준비한 거라 하지만 그건 거짓말로 보였다.
누가 아침을 이렇게 먹을까 이건 계획적인 도시락이었다.
‘부담감을 주려는 작전인가…….’
이제는 하다못해 음식으로 뇌물을 주고 있었다. 분명히 의도된 것이지만 아까워 서라도 먹어야만 했다.
태범은 소파에 앉아 희성이 싸준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진짜 직접 한 건가?’
생각보다 음식은 맛있었다. 시간이 지나 국이 식어서 좀 아쉽긴 했지만 불고기와 야채 볶음, 장조림, 무침 등의 반찬은 간이 잘 배어있었다.
혼자 사는 윤희성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아마도 반찬 가게에서 사 온 건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이다.
오랜만에 먹는 식사다운 식사였다.
“태범아, 일 잘 되고 있어?”
“어! 효준이 형. 3시쯤에 온다더니 일찍 왔네.”
식사를 하던 도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상정회계법인 대표의 아들 효준이었다.
항상 그에게는 대표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따라다녔고 태범 역시 그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였다.
“어쩌다 보니 일이 빨리 끝나서…… 넌 이제 점심 먹냐?”
“혼자 일하는데 그냥 아무 때나 먹어. 형, 빨리 올 줄 알았으면 미리 먹어두는 건데.”
점심시간이 다 지나 2시를 가리키는 시간, 태범은 아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효준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도시락 반찬을 보고는 놀라워했다.
혼자 먹는 점심치고는 음식이 수려했기 때문이다.
“이야…… 도시락도 싸가지고 다녀? 너 혼자 살지 않아?”
“이거? 이거 내가 싼 거 아니야.”
“그럼? 혹시 여자 친구?”
효준은 음흉하게 태범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태범은 금세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여자 친구 영국에 있는 거 형도 알잖아.”
“아니, 뭐 혹시 모르는 거니까. 하긴 태범이, 네가 누굴 배신할 사람은 아니지. 그럼 어머님이 싸주신 건가?”
“그게 말이지…….”
태범은 윤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이야기를 듣는 효준은 흥미가 있는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듣기에 열중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는 웃음을 빵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태범이 너도 참 재밌게 산다.”
“재미라기보다는 굴곡이 많은 거지.”
“그러니까 굴곡 많은 인생이 재밌는 거야. 사람들은 매일 쳇바퀴 돌 듯 같은 인생에 얼마나 불만을 가지는데…….”
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효준의 말도 크게 틀린 건 아니었다.
스캐너의 능력을 알기 전까지 만해도 태범 역시 쳇바퀴에 돌 듯 인생을 살았었다.
학교와 집을 반복하는 생활, 항상 불평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몸속에는 여러 명의 인생이 쌓아 올린 능력들이 담겨있으니 그 능력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인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형은 요즘 아무 일 없어?”
태범에게 상정회계법인은 고향 같은 곳이라 퇴사를 했어도 마음속 한편에는 추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쪽 소식이 궁금해졌다.
“똑같지. 아! 그건 있다. 요즘 감사 업무가 다른 법인으로 많이 빠지고 있거든.”
“왜? 설마 나 때문에?”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영월 식품 분식 회계 이후로 감사 의뢰가 많이 줄어들었어. 기업들이 다 숨기 있는 게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건 좀 미안긴 하네.”
회계사로서 분식 회계를 잡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영업 측면에서는 회계 법인에 악영향으로 작용됐다. 어찌 됐건 회계 법인이 피해를 입었다 하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효준은 손바닥을 격하게 흔들며 말했다.
“당연히 회계사가 할 일인데 뭐, 대신에 좋은 점도 생겼는데?”
“뭐?”
“대신 재무 자문 본부가 요즘 바쁘거든. 태범이 너 때문에 그런 것도 있고 회사에서 이쪽으로 밀고 나가려는 모양이야.”
“그거 잘됐네. 수익은 자문 쪽에서 많이 나오잖아?”
“그렇지. 감사는 아무래도 일만 힘들고 수익이 잘 안 나오니까, 사실 요즘 본업과 부업이 바뀐 셈이 돼버렸어.”
태범과 한동안 궁금해 왔던 전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혹시 추천해줄 만한 주식 좀 있어?”
태범을 만나면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 효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때쯤 효준은 주식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이 질문을 지겹게 들었던지라 태범은 여유롭게 대처했다.
“난 주식을 직접적으로 추천해주기보다는 조언을 해주는 입장이라서…… 함부로 말을 해줄 수가 없네.”
“에이. 그래도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하나쯤은 있을 거 아니야?”
“요즘 증시도 하락하는데 내가 어떻게 추천을 해줘. 괜히 함부로 말했다가 욕 들을라…….”
“설마 공짜는 없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괜히 선의로 추천했다가 안 좋은 결과가 나와 봐. 그게 다 내 책임이지. 형도 자문을 해보면 알 거야.”
“그래? 태범아. 그러면 나도 너처럼 이쪽 계열에서 일해 보면 어떨까?”
“뭐?”
효준의 뜬금없는 말에 태범은 어리둥절했다.
주식 추천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려던 것 같은데 효준의 발언은 누가 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후계자 수업이라도 받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효준이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한다니 말이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형네 회사 다녀야지.”
“뭔 우리 회사야. 나도 하고 싶은 거 해야지.”
“그래도 형은 대표님 아들이잖아.”
“하…… 그렇게 부르지 마. 나도 이제 아버지 품에서 벗어날 때 됐잖니.”
“아…… 알았어.”
최근 효준에게서 느끼는 거지만 그의 생각에 큰 변화가 생긴 듯 보였다.
그의 아버지인 상정회계법인 대표와 트러블이라도 생긴 건지, 효준은 아버지에게서 거리를 두려 했다.
효준과 첫 만남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표라는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하려 했었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태범이 널 보고 많이 생각했거든 나도 너처럼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내가 저번에도 너한테 말해줬잖아.”
“형, 그래도 아버지랑 같이 일하는 게 낫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대표님인데…….”
태범은 현실적으로 바라보며 효준에게 조언을 했다. 하지만 효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성인이 돼서 사춘기라도 온 것인가 생각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아니, 난 애초에 회계사 될 생각 없었어. 이게 다 아버지 때문에 했던 거지. 하지만 이제 생각이 달라졌어. 이제부터라도 내 인생을 살고 싶어. 태범이 너처럼.”
효준은 이미 결심한 듯 보였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확고한 모습이 태범 본인을 보는 듯 보였다.
마치 태범이 회계사를 그만둘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태범은 효준의 마음에 동질감을 느꼈고, 더 이상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태범아, 나 금방 정리하고 나올게. 기다려.”
잠시 머쓱한 미소를 짓던 효준은 의미심장한 말을 한 채 자리에서 떴다.
* * *
[공격적 투기를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24%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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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25% 진행되었습니다.]
‘공격적 투기’는 돈의 불확실성을 포착하는 능력이었다.
돈을 공격적으로 다루다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움직이게 된다.
우리가 공을 바닥에 던지면 그게 몇 번이나 튕길지 어느 방향으로 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것처럼 돈도 마찬가지였다.
강하게 내던질수록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빠르게 움직인다.
태범은 그 움직임을 포착해내고 있었다.
공격적 투기를 이용해 불확실성에서 노출된 시장에서 수익을 창출해 내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6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실시됐다.
1.25~1.50%에서 1.50~1.75%로 0.25% 포인트가 상승한 것이다.
이번 미국의 금리 인상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이뤄졌다.
인상이 결정되는 순간 많은 국가의 주가 포인트가 하락세를 보이며 많은 투자자들을 울렸다.
하지만 이 순간 웃는 자들이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왕첸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