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금융당국에서 투자자문에 대한 사업 허가가 났고 드디어 태범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책상 위에 사업자 등록증을 태범은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법인명: TB투자자문.
대표자: 강태범.
‘이제 시작인가?’
이제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을 위해 일한다는 기분이 드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는 모든 책임을 등에 지고 앞으로 사업체를 이끌어가야 할 사업가가 된 것이었다.
가장 말단에 있던 신입 회계사가 아닌, 맨 앞에 서서 회사를 이끌어가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회사라 해봤자 태범 혼자 밖에 없는 1인 기업이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태범은 본인이 큰일을 한 거라고 믿었다.
“태범아, 고생이 많다.”
사업을 시작하고 첫날, 사무실에는 가족들이 찾아왔다.
아버지의 손에는 검은 봉투가 들려있었고 봉투에 비치는 실루엣만 봐도 뭔지 알 수 있었다.
‘돼지 머리.’
고사를 지내면 액운이 사라지고 신이 앞으로의 일을 도와준다며 아버지는 토속신앙을 굳게 믿고 있었다.
차를 살 때나 뭔가 큰일을 하기 전에는 항상 고사를 지내곤 했었다.
아버지와 반대로 태범은 신앙이나 미신 같은 비현실적인 것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 건 잘 믿지 않았고 오직 과학을 맹신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스캐너의 믿지 못할 능력을 경험한 이후 세상은 눈앞에 보이고 본인이 알고 있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태범아, 이런 회사에서 화환을 왜 보낸 거냐?”
사무실을 구경하던 아버지는 화환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알만한 기업들의 이름이 적힌 화환이 사무실 밖 복도와 안까지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 해봐야 친구나 아는 지인이 보낼 거라 생각했지만 태범의 사업 소식을 들은 기업 관계자들이 화환을 보낸 것이었다.
“보내주신 분들 모두 내게 회계사로 일할 때 맡았던 고객사 관계자들이야.”
“그래? 근데 고객사 쪽에서 회계사한테 이런 화환도 보내니?”
“뭐…… 같이 일하다 보니 가까워지고 그러면 보내 줄 수도 있는 거지.”
아버지의 반응은 적절한 반응이었다. 사실 기업들이 일개 신입 회계사에게 관심을 줄 이유는 없었다.
대단한 권력이나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냥 일반 회사원과 다를 바 없는 수준의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에게 화환이라니 턱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회라는 전쟁터에 뒹굴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사람을 볼 줄 알았다.
태범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이들은 하나같이 태범의 눈에 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곳의 화환이 그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형, 형 잘되면 나 여기서 같이 일해도 돼?”
“네가 도움이 된다면야. 회사에 도움만 되면 누가 들어와도 상관없지.”
태인이는 형을 새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치킨 한 조각 가지고 서로 먹겠다며 싸웠던 형이었는데 지금은 의젓한 사회인이 다 되었으니 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늬만 성인이지 속은 어린애였었다.
동생과 장난치다가 엄마한테 등짝 스매시를 당하곤 했으나 이제는 그때의 태범이 아니었다.
태범의 인생은 스캐너의 능력을 발견한 기점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형이 잘 되면 당연히 동생을 챙겨주겠지. 형제끼리는 누구보다 가깝게 지내야 해. 세상에 피붙이보다 가까운 건 없는 거야.”
아버지는 준비해온 고사 용품들을 꺼내며 형제애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나중에 가봐라. 아빠, 엄마 다 돌아가시며 남는 건 형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거다.”
사실 지겹게 들을 이야기이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라곤 매번 비슷한 레퍼토리였으니 태범이 할 거라곤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이런 거 귀찮게 안 해도 되는데…….”
“에이. 이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지. 항상 무엇이든 시작할 때 고사를 지내야 하는 거야. 다 태범이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아버지는 상을 펴더니 그 위에 돼지 머리와 떡을 올렸다.
웃고 있는 돼지 머리를 보자니 기분이 좋다보다는 괜히 소름이 끼쳤다.
돼지의 음흉한 미소는 ‘너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찌됐건 태범은 아버지와 같이 웃는 돼지 머리 앞에 서서 절을 올렸다.
‘사업 잘 되게 해주세요.’
이왕 하는 거 태범도 속으로 잘되길 빌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저 돼지 머리마저 스캐너처럼 뭔가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눈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게 스캐너로 증명된 이상, 그저 허투루 생각할 수가 없었다.
“태범아, 엄마랑 아빠가 이렇게 빌었으니 앞으로 잘 될 거야.”
그날 어머니의 격려와 환한 미소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 * *
사업이 개시되고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곳은 홍콩에 있는 왕첸이었다.
그는 태범의 첫 고객이 되길 약속했었고 기다렸다는 듯 사업 개시 날에 맞춰 태범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태범 씨.”
“감사합니다.”
“긴장되지 않으세요? 그래도 태범 씨의 첫 사업인데 회사 다닐 때랑은 기분이 다를걸요?”
“긴장되기보다는 설레네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생길 것 같거든요.”
“하하. 맞아요. 태범 씨는 겁이 없는 사람이었죠. 잠깐 그걸 잊고 있었네요.”
“겁이 없다뇨. 사실 저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겁날 때가 많아요. 왕첸 씨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는데요 뭐.”
“정말요? 그때 완전 당돌해 보였는데, 그게 연기였어요? 태범 씨 연기자 하셔도 되겠는데요?”
“그때 왕첸 씨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하긴 제 성격이 보통입니까? 제가 한 성깔을 하니 말이죠.”
“아, 그런 뜻은 아니고 왕첸 씨의 눈이 예리하다 보니까. 그거 설득하려고 제가 머리를 꽤나 굴렸죠.”
“이게 다 펀드 매니저 하면서 생긴 성격이죠. 저도 예전에는 성격이 물렁물렁해서 대충 융통성 있게 행동했는데 이 세계는 그렇게 하면 가차 없이 추락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제 직업을 위해 성격을 바꾼 케이스죠.”
“그러게요. 저도 일을 하다 보니 성격이 바뀌는 것 같네요.”
“그럼 잘하고 계시는 겁니다. 변화에 맞춰 바뀔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죠.”
태범은 스캔한 인물들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닮아가고 있었다. 그 사람의 능력에는 어느 정도 성격이 흡수되어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능력을 사용하다 보니 성격이 변화했다.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며 한마디도 못 했던 겁 많은 태범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23년 동안 쌓인 성격에 무대 공포증까지 변화하지 못할 것 같던 성격들은 한순간에 바뀌게 되었다.
”자 이제 사업도 시작했으니, 슬슬 준비하셔야죠?”
“이미 준비는 마쳤습니다. 계약만 하시면 될 것 같네요.”
* * *
왕첸와 계약을 마치고 그는 태범에게 본인의 자산 내역 일부를 공개했다.
역시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답게 돈을 쓸어 담듯 벌고 있었다.
일단 태범에게 공개한 일부 자산만 해도 300억이 넘었다. 그가 말하길 이는 극히 일부라 하는 데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가늠이 안 됐다.
물론 세계적으로 잘 나가는 사모 펀드, 헤지 펀드 매니저 같은 경우는 1년에 수천억에서 수조까지 벌어들인다 하니 그와 비교하면 왕첸도 새 발의 피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펀드 매니저 사이에서 잘나가는 편이니 분명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의 투자 자문을 맞는다는 건 하나의 영광이었다.
[고객: 왕첸.]
[투자 포지션: 리스크 베팅.]
투자 자문은 고객이 원하는 포지션에 따라 관리가 된다.
그저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자산을 보존하는데 만족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공격적인 투자로 돈을 불리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후자에 가까워질수록 리스크는 온전히 고객이 감당해야만 했다.
일의 난이도를 보자면 당연히 후자가 강하겠지만 대신 자문이 성공적으로만 이뤄진다면 고객과 자문사 모두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high risk high return)의 방식이 그대로 작용된다고 보면 됐다.
왕첸은 리스크를 감수한 투자를 원했다.
역시 사모펀드 매니저답게 위험을 감수할 줄 알았다.
사모 펀드라 하면 대규모 자금을 가지고 저평가된 기업에 자본 참여를 하는 걸 말한다.
규모가 크다 보니 펀드만으로 기업을 인수하기까지 하는데 이들의 목적은 오직 펀드의 이익 추구에 있기에 공격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성격이 왕첸이 원하는 투자에 반영된 걸로 보였다.
띠리링. 띠리링.
왕첸의 투자 계획서를 작성 하던 중, 스마트 폰에 벨이 울렸다.
발신자명에는 ‘악플러’ 라고 찍혀있다.
내기도 끝나고 더 이상 카페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사람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오니 의문이었다.
찝찝하기 하지만 그래도 이유가 있으니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태범은 스마트 폰 액정 위에 손가락을 옆으로 밀며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이시죠?”
“안녕하세요. 저 그때 그…… 내기했던 사람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다 끝난 것 같은데 저한테 또 볼일이 있나요?”
“제가 사람을 몰라 봬서 죄송했습니다. 커피숍에 처음 만났을 때 낯이 익어서 누군가 싶었는데, 강태범 회계사님이셨네요.”
“아…… 네.”
“회계사님인 거 아셨으면 내기 같은 거 안 했을 텐데, 괜히 바쁘신 분 귀찮게 해드린 것 같아 죄송하네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남자는 태범을 잔뜩 띄어주며 사과를 연발하고 있었다.
이미 다 끝난 일에 굳이 전화까지 해서 또 다시 사과를 할 이유는 없었다. 분명 의도가 있어 보였다.
“아닙니다. 다 끝난 일인데요. 근데 뭐 할 말이라도?”
“아…… 저기.”
남자는 뜸을 들였다. 곤란한 말을 하려는 같았다.
“말씀하세요.”
“혹시 저도 회계사님. 아니, 대표님. 저도 자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태범은 지금 전화하는 사람이 얼마 전 자기 글에 댓글을 단 사람이 맞는가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람이 이렇게 바뀌는 것에 대해 당황스러울 뿐이다.
자기 잘난 맛에 그렇게 댓글을 달던 분이 내 고객을 자처하고 있으니 말이다.
“본인이 잘나가는 투자자라고 하셨는데 직접 투자하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제가 그때는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 그런가요. 뭐, 어쨌든 지금이라도 저에 대해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지금은 혼자 일하고 있어서 고객을 더 이상 받을 수가 없네요. 일이 밀려서 말이죠.”
“정말요? 혹시 저까지만 이라도 안 될까요?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맡은 일도 바빠서 다른 고객을 추가적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대표님, 정말 안 될까요? 저번에 있던 일 때문에 그러시면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통화를 끈질기게 이어가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거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요. 근데 지금 제가 정말 바쁘거든요. 죄송하지만 전화는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네요.”
안 그래도 몸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데 입씨름 할 시간은 없었다. 태범은 전화를 끊고 다시 왕첸의 투자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 * *
[창의성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99%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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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100% 진행되었습니다.]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레오나르도 다빈치 능력]-미술 감각(100%)-창의성(100%)
[워렌버핏 능력]-시장 통찰력(100%)-기업 분석력(100%)-도전 정신(100%)
[폰 노이만 능력]-수리 이해력(100%)-언어 이해력(100%)-암기력(100%)
[이소룡 능력]-힘(100%)-유연성(100%)
“으…… 아!!”
짜릿하다.
항상 그래왔듯 전율과 함께 태범은 능력의 100%를 각인시켰다.
이제 집에 혼자 살다 보니 마음껏 신음을 뱉을 수 있었다. 100%가 각인 되는 순간 몸에 강한 고통이 밀려오는데, 지금껏 입을 꾹 다물며 버텨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원하게 소리를 내질렀다.
창의성이 100%가 되는 순간 독립적으로 위치해 있던 생각들이 연결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각 부분의 생각들이 지금까지 비포장도로로 연결돼있었다면 이제는 고속도로로 연결된 셈이었다.
각각의 생각들이 서로 연결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해내고 있었다.
‘이 생각대로라면 분명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야.’
지금껏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 생각들은 태범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