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너, 말도 없이 나가면 어떻게 하냐. 나한테 언질이라도 줬어야지.”
상정회계법인 대표 아들 이효준, 그는 식당 문이 열리고 나타난 태범을 보자마자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오늘 태범은 효준과 식사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갑작스레 말없이 상정회계법인을 나간 태범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지 효준은 급하게 태범과 약속을 잡았다.
“나도 고민을 많이 한 거라 말할 틈이 없었네. 형한테라도 미리 말할 걸 그랬네.”
섭섭해하는 효준의 모습에 태범 역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 네가 우리 회사 나간다고 할 때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원래 생각을 하곤 있었는데 쉬면서 생각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더라고.”
“에이! 그래도 천천히 나가지. 난 네가 휴가 갔다 와서 갑자기 퇴사한다기에 무슨 일 생겼나 싶었지.”
효준은 태범의 퇴사에 대해 여러 감정을 쏟아냈다. 그에게 있어 섭섭하면서도 아쉬운 감정이 지배적이었다.
“밥은 내가 미리 주문해놨어. 여기 한정식 고급지게 나오니까 입맛에 맞을 거야.”
“난 뭐 아무거나 상관없이 잘 먹어.”
“그래, 내가 네 일 잘되라고 밥 사는 거니까,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하…….”
효준은 말끝에 한숨을 푹 쉬었다. 태범의 얼굴을 몇 번이나 흘겨보는 게 꽤나 아쉬운 모양이다. 효준은 물을 한 모금 들어 마신 뒤 말을 이어갔다.
“참. 아쉽다. 아쉬워. 너랑 더 일해보고 싶었는데. 우리가 지금이야 다른 본부에서 따로 일했던 거지 좀만 더 있었으면 쿵짝이 잘 맞는 콤비가 됐을걸.”
같이 일해본 거라곤 해외 연수 때 잠깐 같은 조로 일을 했던 거뿐이었다. 같은 감사 본부에 있을 때도 일이 대부분 갈렸는데 효준은 그걸 아쉬워했다.
“혹시나 네가 다른 회사로 스카우트 돼서 가는 거였으면 나 정말 섭섭할 뻔했잖아. 평소에 너 노리는 기업들 많았잖아.”
“그렇긴 한데 더 이상 남의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서 모두 거절했어. 이제는 내 길을 내가 직접 만들어 보고 싶었거든.”
그동안 별의별 제안이 들어온 건 사실이었다.
재무와 관련된 업무부터 시작해 미술작품을 사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한국 기억력 협회라는 곳에도 같이 일하자며 일이 들어왔었다. 게다가 헬기를 타고 기업의 본사 주변을 그려달라는 CF광고까지 있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분명 파격적인 조건이 달린 곳도 있었지만 태범이는 개척자 같은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본인이 직접 길을 일궈나가고 싶었다. 그게 바로 사업이었다.
태범의 말을 들을 효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난 네가 한편으로 부럽다.”
“뭐가?”
“넌 네가 하고 싶은 일, 전혀 망설임 없이 하는 것 같아. 넌 주변에서 뭐라 하든 네가 결정한 일은 무조건 하고 보잖아.”
“그거야. 난 내가 생각하는 게 항상 옳다고 믿으니까. 내 생각에 맞춰 쉽게 행동이 되더라고.”
“넌 보통 놈이 아니야. 영월식품 분식 회계 건도 그래, 다들 쉬쉬하는 거 너 혼자 가서 파괴시켰잖아. 파트너 회계사까지 날려버리고…… 참 배짱도 좋다니까.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태범에 대한 섭섭한 마음은 곧 칭찬 섞인 말로 변했다.
효준은 평소 생각했던 태범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고 말을 듣자하니 평소 태범에 대한 부러운 마음을 가진 듯 보였다.
“그냥 나 자신을 믿는 것밖에는 없어. 어차피 내 인생 내가 사는 거잖아. 우리가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어. 어차피 죽으면 영원히 잠들 텐데, 살아있는 동안의 짧은 인생! 남 때문에 소모되는 건 아깝잖아?”
효준의 질문에 태범은 소신껏 답변해줬다. 그리고 받은 칭찬 그대로 효준에게 돌려줬다.
“형도 대단한데 뭐. 남들이 하지 못하는 노력을 했잖아. 회계사 차석 들어 온 게 뭐 쉬운 것도 아니고 대학도 명문대에다가…… 형도 충분히 열심히 했고, 잘해오고 있잖아.”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근데 난 내 인생보다는 부모님의 인생을 살았지…….”
잘사는 집 자식이라고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가진 게 많고 받은 게 많을수록 그에 대한 책임은 커져만 갔다.
그렇기 때문에 효준의 모든 노력과 성과는 본인의 만족보다는 부모님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자식은 부모를 뛰어넘고 싶어 한다. 부모보다 못사는 세대, 요즘 청년 세대에게 불리는 말이기도 했고 이것이 청년들의 불행 중 하나의 원인이었다.
효준도 마찬가지로 부모를 뛰어넘고 싶었다. 하지만 성공한 아버지라는 커다란 벽은 너무도 높았고 더욱 노력하고 뛰어야만 했다.
그리고 나타난 태범이라는 또 다른 벽에 가로막히고 만 것이다.
“내가 여태껏 넘을 수 없는 벽은 없다고 생각했거든? 너도 알다시피 내가 2등을 수없이 해본 사람이잖아. 그래도 언젠가는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태범이 너는 아니었어.”
태범과의 첫 만남, 효준이 그렇게 태범을 싫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결국 효준은 벽을 넘기보다는 공생을 선택했고 태범과 가까워진 것이다.
“보면 볼수록 넌 내가 넘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고…… 무슨 양파도 아니고 능력이 까도, 까도 계속 나와.”
효준이 말하는 양파는 결국 스캐너를 말하는 것이었다.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양파 껍질처럼 태범의 스캐너도 계속해서 능력을 줬다.
스캐너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태범의 능력이 당연 신기 할만도 했다.
밥을 입에 넣고 있는 시간보다 대화하는 시간이 길었다. 긴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효준이 물었다.
“식사하고 시간 있으면 우리 술 한 잔 마실래? 우리 그때 같은 조였던 동기들 연락해서 한번 보자. 지금 비시즌이라 다들 여유 있는데.”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효준은 아직 할 말이 많은지 술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태범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내가 있다가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약속?”
“내가 말한 그 악플러, 그 사람이랑 만나서 담판 짓기로 했어.”
“뭐 현피라도 뜬다는 거야? 너 괜히 싸움에 휘말리면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 어떻게 하려고?”
악플러랑 만난다고 하니 이효준 역시 ‘현피’를 먼저 떠올렸다.
현피는 현실 PK의 줄인 말로 실제로 만나서 하는 싸움을 말했다.
대한민국의 인터넷 문화가 빠르게 발달되면서 현피 역시 많은 곳에서 일어지곤 했다.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인터넷에서 서로를 물어뜯다가, 감정을 참지 못하고 현실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태범은 미련한 짓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뭐,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줘 박고 싶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태범은 싸움에서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태범이 가진 힘 정도면 조금만 다듬으면 격투기 대회도 생각해볼 만했으니 말이다.
태범은 득과 실을 정확히 계산하고 따질 줄 알았다.
고작 분노라는 감정 하나 때문에 큰 대가를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가 조심해야 할 것이 주먹과 아랫도리다.
실제로 돈 많은 재벌 회장이라 할지라도 순간의 감정 때문에 법정에 서는 일이 흔히 있었다.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태범이기에 쓸모없는 감정으로 잘못된 행동을 할 일은 전혀 없었다.
“하하. 형 내가 어린애들처럼 주먹 싸움이나 하겠어?”
“하긴 그러겠지? 요즘 시대가 언젠데 현피니, 그럼 만나서 뭐 하려고?”
태범은 자신의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주먹이 아니라 이 입으로 쓰러트리려고.”
“입으로?”
“응, 이놈도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내가 만나자는 말에 바로 승낙하더라고…… 얼마나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기대 되거든. 이 정도 되는 사람이면 말빨 좀 되겠지?”
“너도 참 별의별짓 다한다.”
태범의 엉뚱한 면에 효준은 피식 웃었다.
식사동안 효준과 태범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한 끼의 점심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못했던 속마음부터 시작해 진실 된 마음을 전달 할 수 있었다.
오늘의 대화로 효준이 생각이 꽤나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악플러와 만나기로 한 곳은 동대문역 근처의 커피숍이었다.
사람이 아주 많이 다니는 커피숍으로 낯선 사람과 만나는데 안전한 곳이었다.
괜히 음침한 골목길에서 만났다가 뒤통수를 후려 막고 저세상에 갈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다. 항상 세상에는 이상한 놈들이 존재했으니 말이다.
약속 장소인 커피숍에 들어간 태범은 악플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연락처는 카페 쪽지로 교환한 상황이었다.
“여보세요. 저 카페에 도착했는데 오셨나요?”
“여기요!”
핸드폰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저 멀리 똑같이 핸드폰을 들고 손을 흔드는 한 남자가 보였다.
태범에게 악플을 달았던 그 남자다! 낯짝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두툼한 볼살에 앞으로 나온 똥배 그냥 푸근한 동네 형 외모였다.
“반갑습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역시나 인터넷 세계는 가상에 불과했던 것일까, 댓글만 보면 아주 양아치가 따로 없었는데, 지금은 만나자마자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정중한 그의 인사에 태범은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뭔 이유로 제 글에 그렇게 비난을 하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좋은 이유로 만든 자리는 아니었기에, 태범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부터 들어갔다.
“글을 아주 창의성 있게 잘 적으셨더라고요. 솔직히 시장 변동이 큰 혁신 기업에 가치 투자한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창의성만은 인정해드립니다.”
남자는 비아냥거리듯 칭찬을 했다. 나름 심리를 이용한 싸움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죠?”
“근데 투자는 창의성으로 하는 게 아니죠. 제가 글을 보고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글에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재무 상황과 기술적 부분을 철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그리고 전 그걸 보는 한 가지 부분을 설명해드린 건데 이 하나 가지고 모든 게 잘못됐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애초에 그럴 거면 단타로 하지 누가 장기 투자를 합니까. 현재 가치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시점에 장기 투자 같은 건 시간을 허송세월 낭비하는 거죠.”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기업 같은 경우나, 신산업에 뛰어드는 경우 주식의 변동이 큰 경우가 많았다.
항상 새로움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었고, 이 남자의 주장은 리스크를 장기투자로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결국 변동이 큰 혁신기업에 장기 투자는 말이 안 되며 단타만이 살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태범은 아무리 변동이 큰 기업이라 할지라도 투기가 아닌 투자의 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즉 가치 투자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전 투자의 방법에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단기든 장기든, 자기가 맞는 거에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도 말도 안 되는 말로 사람들은 현혹 시키면 안 되죠. 전 처음에 그쪽이 투자자 끌어 모으려고 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뭐 그런 쪽에서 일하는 건 아니죠?”
“뭐. 지금은 아니지만 곧 자문 쪽으로 일은 할 것 같네요.”
“쯧…… 역시.”
남자는 들릴 듯 말 듯 혀를 차며 태범을 오해하고 있었다.
“저도 당신이 하는 단기 투자 모두 해봤습니다. 근데 이 방법도 괜찮겠다 싶어서 가치 투자 카페에 올린 거지, 전혀 악의적인 건 없었습니다.”
“단타를 해보고도 그런 말을 썼다고요?”
“네, 누구한테는 더 나은 방법이 될 수 있으니까요.”
구질구질하게 다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왕 얼굴을 맞댄 거 태범을 오해를 풀기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는 태범의 말에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단타를 제대로 안 해보셨네. 그냥 캔들 차트만 보고 대충 감으로 하셨으니까 그렇지 제대로 하면 그쪽이 쓴 글이 잘못 됐다는 거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제가 단타를 제대로 안 해봤다고요? 하하. 그럼 저랑 한번 붙어보시는 건 어떠세요?”
말로 안통하면 행동으로 보이면 된다. 시각보다 사람을 믿게 하는 요소가 없으니 말이다. 태범은 이 남자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지는 사람이 카페에다가 거하게 사과문을 올리기로 하죠.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