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집에 돌아온 태범은 책상 앞에 앉아 사직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직서 작성을 마무리하고 봉투 위에는 최대한 깔끔하게 사직서라는 글씨를 적었다.
작성을 마친 태범은 봉투 위의 사직서라는 글씨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옳은 선택일까?’
분명 마음을 바로잡고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사직서를 적고 나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요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회사에 붙어 있으려 하겠지만 태범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스캐너가 준 능력들이 때가 되었다며 귀에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태범은 인물들의 시간을 초월한 거랑 다름없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능력들을 단숨에 가지는 것이기에 태범은 남들과 다르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셈이었다.
그만큼 행동도 빨라야만 했다. 능력은 100씩 오르는데 행동을 1로 할 수는 없다. 능력에 비례하게 추진력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 게 옳은 것이다.
‘됐어! 이미 결정한 거, 너무 고민하지 말자!’
결국 태범은 사직서 봉투를 서류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내일 회사에 가져갈 가방이었다.
생각하면 끝이 없다. 내일 반드시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하며, 더 이상 아무 생각하지 않았다.
* * *
상정회계법인 본사 앞.
출근길 태범은 건물에 들어가기 전 잠시 건물을 올려다봤다.
‘벌써 1년이네. 세월 참 빨라…….’
긴장된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이 건물에 온 게 엊그제 갔지만 벌써 1년이 돼갔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태범은 많은 우여곡절과 경험 그리고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분명 많은 걸 경험하게 해준 곳은 분명했다.
“어! 태범 씨 왔어?”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에 보는 회사 직원들은 태범을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휴가복귀를 알리는 태범을 보고는 김진태 차장이 크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태범의 얼굴만 보면 앨론 뮤직 사건의 위기 절정 때 구세주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고, 그때만 생각하면 자동 미소가 지어지는 김진태 차장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그의 미소를 보자니 태범은 가방 속에 들어있는 사직서를 차마 꺼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휴가 끝나고 바로 사직서를 내는 건 쉽지가 않았다. 뭔가 죄짓는 기분이다.
“그래 푹 쉬고 왔어? 그동안 태범 씨 없어서 얼마나 허전했는데…….”
“네,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 일도 마무리도 잘 됐고 푹 쉬고 왔겠지. 고생 많았어.”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곳만 한 곳이 어디 있겠어. 일이 힘들어도 그렇지 쉴 땐 확실히 쉬게 해주잖아?”
“네, 그렇죠.”
“태범 씨, 뭐 안 좋은 일 있었어?”
역시 사회 물 좀 더 먹었다고 눈치 하나는 빨랐다. 김진태 차장은 태범의 불편한 표정을 읽어내고 있었다.
‘아마 쉽게 받아 주지 않겠지.’
사직서를 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분명 처음에는 반려를 하거나 설득하려 할 것이다. 상정회계법인의 에이스를 이렇게 버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직서를 차장에게 내놓기에는 많은 마음속 벽이 있지만 태범에게는 이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 바로 워렌버핏의 능력 중 하나인 도전 정신이었다.
뭔가를 크게 결정할 때는 항상 반대급부가 있는 법이다. 이걸 얼마나 극복하고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는지가 성공의 관건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태범은 용기 있게 입을 떼며 말했다.
“저기 차장님 할 말이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 있어?”
“휴가 끝나고 이런 말하기 죄송하지만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분명 김진태 차장은 태범의 말을 똑바로 들었지만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물었다.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뭐! 왜!”
“사정상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다른 일을 하려고…….”
“혹시 다른 회사에 스카우트라도 된 거야? 그런 거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스카우트는 여러 번 요청이 왔습니다. 하지만 모두 거절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디 밑으로 들어갈 생각 없고요. 그냥 저 혼자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다른 일? 회계사를 아예 그만두겠다는 거야?”
“네, 갑작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안 돼, 못 해줘. 내가 이 사직서를 대표님한테 어떻게 결제 받아? 대표님이 태범 씨를 얼마나 아끼고 있는 줄 알아?”
김진태 차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사직서를 다시 태범에게 건네려 했다. 하지만 태범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후…… 내가 이런 말은 직접 안 하려 했는데 대표님이 태범 씨를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한 걸 들었거든 태범 씨 정말 지금처럼만 잘해주면 금방 승진을 물론 파트너 회계사 자리까지 오를 거야.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줄래?”
김진태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태범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태범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죄송합니다.”
태범 확고한 대답에 김진태 차장은 더욱 큰 한숨만 내뱉었다. 한숨이 얼마나 컸으면 칸막이로 가려진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모두 이쪽으로 쏠렸다.
다들 안 듣는척하지만 모두가 태범의 퇴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겁니까?”
김진태 차장의 질문에 태범은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모두 들은 김진태 차장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태범의 완벽한 계획에 납득된 나머지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던 것이다.
* * *
“아니! 내가 잘못 받은 건 아니겠죠?”
김진태 차장에게 사직서를 결제요청을 받자마자 태범을 호출한 이재진 대표였다.
항상 점잖던 이재진 대표는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해 있었다. 그의 손에는 태범의 사직서가 들려있고 인상 가득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할 일이 생겨서 이렇게 나가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태범이 할 말은 그저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물론 회사를 본인 발로 나간다는 게 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안타까워하는 이들을 보니 미안할 뿐이었다.
“아니, 김 차장한테 들어보니까, 사업을 한다고?”
“네, 다른 일을 하려고 합니다. 투자 쪽으로 사업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아니, 사회에 나온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게 간단할까요? 아무리 이름을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해도 남 밑에서 일하는 것과 사업은 다릅니다.”
“저도 잘 압니다. 그만큼 준비를 확실히 해야겠죠.”
사업를 직접하고 있는 이재진 대표로서 사업의 어려움을 태범에게 설명했다. 사업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는 것이고 각종 어려움이 따를 것이라며 겁을 줬다.
하지만 태범의 결정에는 조그마한 변화도 없었다.
“지금 회계사로서 이름도 알리고 성장하는 추세인데 이거 너무 아깝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제가 회계사를 하면서 얻은 명예는 일만 잘된다면 계속 이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나중에 와서 다시 받아달라고 하면 그때는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후회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일단 제 자신의 능력을 믿고 해보는 거죠.”
대표의 반 협박(?)에도 태범은 굴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붙잡으려는 대표의 모습이 보이지만 태범의 자신감만큼은 이겨낼 수 없었다.
결국 대표는 손에 든 사직서를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놨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정말 아쉽네요.”
“저도 아쉽지만 상정회계법인과는 여기까지 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사를 직접 운영해보면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실 겁니다. 저도 태범 씨가 잘되길 빌겠지만 앞으로 현실이 무엇인지 잘 알게 될 겁니다. 그 속에서 살아남고 좋은 모습으로 다시 봤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인연이 된다면 다시 뵙겠습니다.”
“그럼 가보세요.”
대표와의 만남을 끝으로 상정회계법인과의 인연은 끝이 났다.
태범은 한 단계 더 올라가기 위해 등에 진 짐을 풀고 새로운 짐을 얹은 셈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을 위해 움직이기만 하면 됐다.
* * *
태범은 왕첸에게 답변을 전달하기 위해 연락했다.
왕첸은 이미 한국을 떠나 본인의 홍콩 회사로 간 상황이었고 대화는 전화로밖에 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걸 놓은 상황이었다. 마음의 각오는 돼 있었고, 오직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게 누굽니까! 태범 씨 아닙니까.”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럼요. 저야 잘 지내요. 시간이 꽤 걸리기에 제 제안을 거부한 줄 알았습니다.”
“아, 제가 잠시 휴가차 영국에 가 있었거든요. 천천히 쉬면서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간 건데 연락이 늦었다면 죄송합니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중요한 결정인데 천천히 생각해야죠.”
왕첸은 들뜬 목소리로 태범을 반갑게 맞았다. 그의 목소리 톤만 들어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가 휴가 기간 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아! 네네.”
“죄송하지만 왕첸 씨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아무래도 다시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계법인을 그만둔 의미가 없거든요.”
왕첸의 들뜬 목소리는 금방 흥분된 목소리로 바뀌며 당황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회사 그만두셨습니까?”
“네, 어제부로 그만뒀습니다.”
“그럼 도대체 뭘 하시려고?”
“제가 독립적으로 사업을 이뤄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단 투자 자문으로 말이죠.”
“투자 자문이요?”
“네, 일단 바로 상품을 바로 운용하는 것보다는 자문으로 제 능력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흠…… 자문이라. 그냥 제 밑으로 들어와서 펀드를 크게 굴리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규모면이나 경험에 있어서 더 좋을 텐데 말이죠.”
모두가 태범을 본인의 밑에 두고 싶어 했다. 그들은 태범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거위는 하늘로 날고 싶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제 것을 가지고 시작하고 싶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왕첸 씨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 스케일이 작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미래에는 그 이상을 넘어 설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범은 직설적으로 말을 꽂아 넣었다.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는 마인드는 태범에게 큰 추진력이 되고 있었다.
“자문사를 설립한다는 거겠네요? 흠…… 자본도 얼마 들지 않고 괜찮긴 하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제 고객이 되어주시면 어떻습니까?”
태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왕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왕첸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펀드매니저한테 고객이 돼달라니…… 하하.”
왕첸은 어이가 없는 듯 웃음을 지었다.
투자자들의 자금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가 또 다른 투자 자문사의 고객이 된다는 건 사실 이상한 구조였다.
“하하. 재밌네요. 재밌어. 태범 씨는 도저히 예상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요.”
“어떻습니까? 저번 앨론 뮤직 때, 그 이상으로 제 투자 기법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수료는 그냥 수익금의 일부만 받겠습니다. 수익이 나지 않으시면 어떠한 돈도 일체 받지 않겠습니다.”
“재밌겠군요. 재밌어. 그래요 좋습니다. 그 자신감이 정말 근거가 있는 자신감인지 한번 확인해보고 싶네요. 태범 씨의 자문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