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84화 (84/188)

# 84

“다음에는 내가 한국으로 갈 게.”

“그렇다고 너무 무리해서 오지는 말고 이제 하나의 사업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잖아. 나도 스낵 피쳐의 주주인 거 알지? 내가 두 눈 뜨고 지켜본다!”

“오호 그러셔?”

공항 출국장, 이제 떠나면 캐서린과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른다. 태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런 말을 건넸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저려오는 게 벌써 그녀가 그리워지는 것만 같았다.

“자. 일로 와 봐.”

태범은 양팔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캐서린은 알아서 태범의 품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잠시나마 출국 전까지 포옹을 하며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그리고 태범은 이 모든 감정을 머릿속에 저장시키기 시작했다.

암기력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외워 기억할 수 있었다. 어차피 머릿속으로 들어가 남는 건 똑같으니 말이다.

“그럼 조심히 가.”

출국장을 나갈 때까지 몇 번이나 고개를 돌리며 캐서린을 바라보며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 * *

“스캐너야 형 왔다. 잘 있었냐?”

집에 돌아온 태범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스캐너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이었다.

혹시 알까, 말을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스캐너가 일으킨 일 자체가 상식을 뛰어넘는 마법 같은 일이었다.

그러니 스캐너가 말을 알아먹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그저 조금 놀랄 뿐이다.

다음으로는 스캐너의 안위를 살폈다.

태범의 보물 1호 스캐너,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까 확인 또 확인했다.

혹시나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놈이 와서 훔쳐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물론 스캐너를 훔쳐가는 이상한 도둑놈은 없겠지만 말이다.

모든 확인이 마무리되고 최종적으로 성능 테스트에 들어갔다.

스캔!

매번 해왔던 일이지만 스캔 버튼을 누를 때마다 기대가 됐다.

퍼센트는 아주 조금씩 오르긴 하지만 미세하게라도 몸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나름 약 1년간 스캐너를 사용함으로써 스캐너 전문가가 된 태범이었다.

[창의성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65%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66% 진행되었습니다.]

이렇게 스캐너의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야 짐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가방 안은 캐서린이 준 각종 선물로 가득 차 있었고 영국에 갈 때보다 가방은 2배로 빵빵해져 있었다. 모든 짐을 정리하고 집을 비웠던 흔적을 지우기에 나섰다.

역시 혼자 사는 집이라 잠깐 집을 비워도 흔적이 크게 남았다.

싱크대에는 어느새 거미 친구가 자리를 잡고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버리려고 내버려뒀던 검은 봉투 속 사과는 즙이 되어 썩어있었다.

확실히 혼자 사는 건 쉬운 게 아니었다. 여태껏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가 해줬기에 이를 바로 감당하기에는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나가는 주부 능력이라도 스캔해야 하는 건가?’

태범은 문제가 보일 때마다 스캐너의 능력을 떠올렸다. 문제의 발생은 추가적인 능력을 선택하는데 큰 지침이 돼줬기 때문이다.

“끝났다”

정리를 마무리하고 태범은 침대 위로 철퍼덕하며 누웠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은 뒤 눈을 감고 밀려오는 피곤을 온 몸으로 받아냈다.

잠시 쉬려고 누웠지만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왕첸한테 무슨 말을 할까’

‘왕첸의 말대로 펀드 매니저로 시작해볼까? 아니면 내 사업을 시작할까?’

‘이제 슬슬 나를 키워야 해.’

태범은 앞날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고민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스캐너가 모든 능력을 줄 수 있을지라도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돼있다.

요즘 시대를 100세 시대라 부른다. 물론 그것도 최대한 건강하게 산 사람에게 통용되는 것이다.

어쨌든 100세를 기준으로 보면 태범에게 남은 시간은 75년쯤 된다. 태범이 할 일은 일생을 거쳐 쌓아 올린 인물들의 능력을 이 75년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욕심이라면 욕심일 수 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한 모든 걸 해보고 싶었다.

* * *

“태범 회계사님!!”

저 멀리서 태범의 친구 희준은 장난스런 말투로 태범을 불렀다. 오늘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희준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불알친구라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 보기 힘들어졌다. 괜히 학교 친구, 사회 친구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바쁜 세상은 친구도 잊게 할 만큼 빠르게 돌아가니 말이다.

그나마 희준은 태범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명이니, 이렇게 시간을 낸 것이었다.

“잘 있었냐. 공부는 잘 되고?”

“제가 열심히 해봤자 회계사님만큼 하겠습니까? 허허.”

“너, 한 번만 회계사님 하면 오늘 네가 쏴라.”

“네! 알겠습니다!”

희준은 반가움을 장난으로 표현했다.

태범과 희준은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돈을 버는 태범이 한턱내기로 했고 희주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고기가 나오기도 전 희준은 소주를 까더니 서로의 잔에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서로의 잔을 부딪치며 안부를 시작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래, 요즘 잘 지내고 있었냐?”

“그냥 매일 똑같지. 이력서 넣고, 공부하고, 이력서 넣고, 공부하고…… 매일 똑같은 일상이야.”

희준은 이제 졸업반 취업 준비생이었다. 취업 준비생은 인생에 또 다른 고비였다. 대학으로 가기 위해 수능이라는 고비를 넘겨야 한다면 이제는 사회에 나가기 위한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그래도 조금만 참으면 좋은 날이 있겠지.”

“과연 그럴까, 내 주위에만 봐도 백수가 널렸는데 다들 처음에는 너처럼 생각했겠지. 근데 사회가 말처럼 쉽냐. 태범이 너야 재능이 있으니까 아무 걱정 없겠지만 나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쉽지 않지.”

희준은 앞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이기도 했다. 실업자만 100만 명이 넘는 시대이니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아무래도 힘들 테니 말이다.

태범은 희망적인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잘못하면 자기 자랑 하는 꼴이 돼버리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긴 하지.”

“진짜 자기소개서만 하루에 몇 개 쓰는 줄 아냐? 많이 쓰면 3~4개는 쓰는데 매일 쓰다 보니까 내가 소설을 쓰는 건지 이력서를 쓰는 건지 헷갈리다니까.”

“와. 그 정도야?”

“태범이 너는 이력서 한 번 밖에 안 넣어봤지? 일반 회사들 경쟁률 봐라. 기본 수백 대 일이야. 진짜 뒤진다니까.”

희준은 자신의 어려운 심경을 토로했다. 술이 들어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 가며 열변을 토해냈다.

희준은 태범에게 한참을 하소연하다가 어느 정도 화가 풀렸는지 이제는 태범의 사정을 묻기 시작했다.

“그래, 너는 요즘 어떤데? 물론 잘 되고 있겠지. 요즘 인기 좋더만.”

물론 희준은 본인의 질문에 태범의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

잘 나가는 회계사에 지금 당장 컴퓨터에 ‘강태범’ 이름만 적어도 기사가 쫘르르 나온다. 희준의 입장에서 바라본 태범은 그 어느 때보다 잘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태범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나 회계사 그만둘까 생각 중인데…… 어떻게 생각해?”

“뭐? 그걸 왜 그만둬! 회계사 된 지 얼마나 됐다고.”

희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큰 목소리로 반발했다.

“아니, 다른 걸 해보고 싶어서.”

“뭘 해보고 싶은데? 지금 회계사로 잘 나가고 있잖아. 너 설마…… 화가 하려고 하냐? 요즘 SNS에서 그림으로 잘 나간다고 그런 거야?”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뭔데?”

“아니, 나도 직접 내 손으로 뭔가를 이뤄보고 싶더라고. 결국 누구 밑에 들어가 있으면 월급쟁이밖에 더 되겠어?”

“와…… 월급쟁이 무시하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뭔가 더 큰 꿈을 꾸고 싶다고 할까나, 좀 더 도전적인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왠지 지금 아니면 못할 것만 같거든.”

사실 태범이 희준이 앞에서 이 발언을 한다는 자체가 조심스러웠다. 취직하고 싶어서 고생하는 친구 앞에서 퇴사를 생각한다는 건 언감생심이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배부른 놈이라고 생각할까 희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는 갔다.

하지만 각자 사정이 있는 법, 물론 능력을 발휘하면 회사에 남더라도 윗자리까지 올라갈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린다. 스캐너로 능력을 얻을 수는 있어도 시간은 얻을 수 없다. 시간만은 오직 내 힘으로 관리해야 할 문제였다.

이미 회계사로서 이름도 알렸고 많은 경험도 해봤다. 이정도로 충분했다. 이제는 한 단계 위로 올라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래, 그럼 회계사 그만두고 정확히 뭐 하려고? 장사? 사업?”

“응, 사업.”

이번에 영국에서 캐서린과 친구들을 보며 많은 걸 깨달았다. 열정의 불씨가 옮긴 것일까, 그들의 열정은 태범의 심적 변화를 촉진시키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아깝지 않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갔는데 벌써 나오려고? 부모님은 뭐라 안 하셔?”

“아깝긴…… 애초에 오래 있을 생각 없었어.”

아직 부모님에게 말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한 난리 떠실 게 분명했다. 회계사 합격에서 그렇게 좋아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회사를 그만둔다하면 얼마나 놀라실까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태범의 확고한 모습에 희준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네 능력이면 뭐든 잘 되겠지.”

생각해보니 보통 사람도 아니고, 천재라고 불리는 태범이었다. 희준은 그걸 깨달았는지 태범의 말에 납득하고 있었다.

“난 그냥 공대나 갈 걸 그랬어. 왜 그때는 몰랐을까.”

희준은 과거 본인의 선택을 후회했다. 희준은 영어 영문학과로 하필 취업이 어렵다는 문과에 속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현재 자신은 과거의 선택으로 쌓아진 결과이다. 지나간 과거는 되돌 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태범이 역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과 생각으로 현재를 선택하려 것이었다.

희준의 후회에 태범은 아무런 대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러자 희준은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나 왠지 졸업하고 백수 될 것 같은데. 네 잘되면 나 좀 받아주라.”

희준의 말에 태범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야. 내가 현수랑 있을 때 말했지? 우리같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고. 우리라는 게 뭐냐? 다 같은 하나를 의미하는 거 아니냐?”

“그런 나 버리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널 왜 버리냐. 잘 되면 서로 돕는 거지 뭐. 너도 마찬가지다. 잘되면 나 도와줘야하는 거 알지?”

“당연하지!”

태범과 희준은 다시 한번 우정을 다짐하며, 약속했다.

* * *

“태범아. 집은 웬일이냐?”

태범이 아무 연락 없이 집에 들어오자 어머니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내 집인데 꼭 일이 있어야 와야 해?”

“그래, 밥 먹었니?”

“응, 먹고 왔어. 요 근처에서 친구 좀 만나느라 잠깐 집에 들린 거야.”

오늘 태범이 집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부모님에게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씀드리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어차피 태범의 마음은 확고하게 결정돼 있지만 부모님에게 말씀이라도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 사실은 회사 그만두려고 그거 말해주고 싶어서 온 거야.”

“뭐? 회사를? 왜?”

설거지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놀란 나머지, 고무장갑을 낀 채 태범에게 다가왔다.

“다른 일이 해보고 싶어서.”

“에이. 그냥 회사 다니는 게 어때? 사업 그런 거 잘 못 하면 크게 망한다. 내가 아는 엄마 남편도 회사 퇴직하고 치킨집 차렸다가 손해만 보고 그만 뒀잖니. 그냥 꾸준히 월급 받고 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어머니도 태범의 말에 극도로 반대했다. 사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장에 수익만큼 좋은 게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태범은 본인의 능력으로 안정보다는 도전을 선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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