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정말? 태범 씨가 존 스미스 교수님한테 수학을 가리 켰다고? 되게 웃기다.”
“아니…… 문제가지고 고민하는 것 같아서, 내가 도와줬는데 설마 그런 분인 줄은 상상도 못 했네. 그냥 컴퓨터 공학 교수인 줄만 알았는데.”
캐서린에게 듣는 존 스미스 교수에 대한 이력은 참으로도 대단했다.
수학자로 시작해 필드상 후보까지 올랐던 사람이었고 컴퓨터 과학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튜링상을 수상한 경력을 포함해 여러 국가 과학 훈장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의 전설이었다.
지금은 런던대 명예 교수로 특정 연구에 관한 자문이나 특별 강의를 맡고 있다고 한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격이었다. 태범은 그때 본인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보니 괜히 민망해지며 헛웃음이 나왔다.
태범의 헛웃음에 캐서린도 덩달아 웃더니 본인과 존 스미스 교수 간의 인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존 스미스 교수님, 이번에 우리가 창업한 회사에 도움을 많이 주셨어.”
“그래?”
“응, 학교에도 지분이 있어서 교수님들이 자문에 참여 했었거든 존 스미스 교수님도 그중 한 분이고.”
캐서린과 2명의 친구는 학교의 지원을 받아 창업을 한 상황이었다.
런던 대학교에는 창업 지원단이 존재했고 심사를 거쳐 창업에 대한 투자와 자문을 지원했다.
수많은 엘리트들이 있는 학교에다가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는 인재들이 있는 곳에서 투자 지원을 받아 낸 건 대단한 성과였다.
아직 성공적인 창업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일단 학교의 지원을 받는 것부터가 큰 결실 중 하나였다.
기업의 이름은 스낵피쳐(snack picture)
사진을 위주로 하는 SNS 애플리케이션 이었고 사진을 올리고 공유하며 사용자 지정 시간에 맞춰 사라지는 시스템을 모토로 하고 있었다.
즉, 심심풀이로 과자를 먹듯, 사진 역시 한 번 보고 즐기는 느낌으로 기록보다는 순간의 즐거움에 콘텐츠를 두고 있는 앱이었다.
“자기야, 이거 한 번 봐줄 수 있어?”
캐서린이 노트북을 가지고 오더니, 태범에게 코딩된 프로그래밍 언어를 보여주었다.
“이게 그때 말했던 시스템이야?”
“응, 사용자가 지정한 타이머에 맞춰서 사진을 지우는 거야.”
캐서린의 노트북을 받아든 태범은 침대에 앉아 한참 동안 코딩 언어를 바라봤다.
알맞은 코딩 규칙에 따라 작성되었는지 확인했고 혹시 오류는 없는지 그리고 유지보수에 대한 편의성을 가졌는가를 확인했다.
일반 사람이라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이었지만 태범은 스피드하게 코드를 검토했다.
폰 노이만의 언어 이해력이 사람의 언어뿐만 아니라 기계의 언어에게도 같은 이해력으로 작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검은색 배경에 영어와 숫자로 된 새하얀 글씨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복잡한 수식 과정으로 느껴지겠지만 태범은 그저 친구와 대화하듯 컴퓨터랑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략적인 검토를 마친 후 태범은 캐서린에게 노트북을 다시 건네며 물었다.
“음…… 코딩은 잘 짜인 것 같은데 근데 사진 보안성 문제는 어떻게 됐어? 그것 때문에 고민 많았잖아.”
태범이 한국에 있을 때도 캐서린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었다.
캐서린은 개발 관련해서 어려움이 있으면 태범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으며 그 때문에 캐서린의 고충을 잘 알고 있었다.
“보안은 마무리됐어. 학교에서 기술 지원 해줘서 일단 주요 보안은 구축하긴 했는데 앞으로가 일이지. 보안은 항상 업데이트를 해야 하니까. 결국 꾸준한 기술 관리가 뒷받침돼야 하겠지.”
“오…… 캐서린, 말하는 게 CEO 느낌 좀 나는데?”
그저 대학생에 불과했던 캐서린이 이제는 말하는 본새에 경영자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은 창업 초창기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명 사업 성공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몰랐어? 나 CEO잖아!”
역시 캐서린 이었다. 태범의 장난스런 말에 지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 * *
다음날은 여행 일정의 테마는 축구였다.
이곳 근처에 프리미엄리그 터트넘 구장이 있다고 하니 축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한 번 쯤 가고 싶었던 곳이었다.
한창 박재성 선수가 전성기 시절, 온 국민이 그의 놀라운 축구 실력과 일명 국뽕이라 불리는 애국심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가 은퇴를 하고 그때 그 전율을 다시 느끼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요즘 그 애국심이 주는 전율의 기억을 살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터트넘에 손흥문이었다.
운이 좋게도 오늘 터트넘 홈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계획에는 없었지만 태범의 간절한 부탁에 캐서린과 경기장을 찾았다.
“손흥문!!”
경기 시작 전 몸을 풀고 있는 터트넘 선수들 사이에서 손흥문이 보였다.
손흥문 선발! 애국심의 힘은 대단했다. 세계적인 리그에서 한국 사람이 뛰고 있는 걸 보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게다가 직접 두 눈으로 이걸 보다니 TV로 볼 때와는 다른 감동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공은 선수들의 발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공이 손흥문의 발에 붙었을 때 태범은 입으로 소리를 내며 그를 바라봤다.
“아우!”
공격수인 손흥문이 아깝게 골 찬스를 놓칠 때마다 태범은 발을 구르며 아쉬워했다. 먼 영국까지 올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다. 태범은 직접 손흥문의 골을 보고 싶었다.
“자기 원래 축구 이렇게 좋아했어? 지금 완전 흥분했는데? 흐흐.”
캐서린은 태범의 열광적인 모습에 낯설기도 하면서 귀여워하고 있었다.
평소 축구를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었고 축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만큼은 세상 걱정 없는 어린아이처럼 축구를 관람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태범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국위 선양하는 선수이지 축구는 아니었다. 그저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손흥문!!”
상대에게 중거리 슛을 내준 터트넘 하지만 10분이 지나고 손흥문은 보란 듯이 슛을 넣었다. 그것도 상대방과 같은 중거리 슛으로 말이다.
공이 상대 그물망을 흔들자 홈이었던 터트넘 구장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곳저곳에서 손흥문의 이름이 불리 우는데 온 몸이 전율로 가득 찼다.
태범도 자리에서 펄쩍 뛰며 기쁨을 만끽했다.
‘손흥문의 골을 직접 볼 줄이야…….’
인종불문 수많은 사람들이 본인을 응원해주고 좋아해 준다는 건 감동적이었다.
손흥문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엄청난 노력을 했다고 들었다. 어릴 적부터 축구 선수 아버지로부터 혹독하고 철저한 교육을 받아온 손흥문은 노력으로 이 자리에까지 왔고 세계적인 축구 스타가 돼 있었다.
태범은 그런 손흥문을 보고 든 생각이 있었다.
오직 노력만으로 세계적인 자리에 올라와 저 정도 호응과 열광을 받고 있는데 스캐너가 준 능력과 노력이 합쳐진다면 그 힘은 어떠할지 말이다.
경기가 끝나고 태범은 사인을 받기 위해 경기장 밖에서 기다렸다. 선수들도 집은 가야 할 테니 분명 모습을 드러낼 거라 믿었다.
꽤 시간이 지나고 선수들이 경기장 밖으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헤러 케인!!”
“요렌테!”
선수들이 나오니 축구팬들이 소리를 지르며 악수를 청하거나 종이나 유니폼을 흔들며 사인을 요청했다.
“손흥문!”
역시 스타답게 펜 서비스도 좋았다. 펜스 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펜들에게 다가오더니 천천히 한 명씩 사인을 해주고 있었다.
이때가 기회다. 태범도 경기장 앞에서 산 흥문의 유니폼을 흔들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손흥문!”
손흥문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태범의 코앞에 섰다. 태범은 재빨리 유니폼과 펜을 건네며 사인을 요청했고 손흥문은 익숙하듯 거침없이 사인을 한 뒤 앞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코앞에서 빠르게 지나간 손흥문이었지만 무슨 일인지 그가 뒷걸음질을 하며 다시 태범 앞에 다가왔다.
“어! 당신 SNS에 올라온 사람 아니에요?”
손흥문이 태범을 알아봤다.
“네, 저 맞아요.”
“정말요? 반갑습니다. 저도 SNS에서 봤어요. SNS에서 저보다 유명하시던데요? 하하.”
손흥문은 태범과 짧게 악수를 하며 한마디 툭 남기고 발길을 옮겼다.
짧은 시간이지만 얼떨떨한 상황에 태범은 당황스러웠다.
‘지금 이 상황 뭐지?’
* * *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영국의 팝스타 콜드블레이 공연, 축구 관람 태범의 여행 목적은 편안한 휴식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빡빡한 스케줄로 여기저기 움직이며 다녔다.
세계적인 거물들이 많이 탄생한 국가다 보니 태범은 많은 걸 보고 능력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 스캐너가 준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어떤 방향으로 능력을 이끌어 나갈지 말이다.
이제 남은 날은 3일 태범은 처음 묵었던 캐서린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영국에서 볼 건 볼 만큼 봤고 이제 남은 시간은 캐서린과 함께 하고 싶었다.
오늘 캐서린이 일하고 있는 스낵 피쳐(snack picture)의 사무실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같이 일하는 캐서린의 친구들도 흔쾌히 방문을 허락한 상황.
태범은 캐서린이 어느 환경에서 일하는지 궁금했다.
워렌버핏의 기업 분석력을 가진 태범의 눈은 기업의 미래를 점치는 데 누구보다 정확했다.
여자 친구가 운영하는 기업인만큼 태범은 놀러 가기 보다는 샅샅이 분석하고 피드백을 줄 생각이었다.
캐서린의 사무실은 학교 근처 벽돌로 지어진 건물의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학교의 지원을 받는 만큼 지리적으로 대학과 가까이 위치한 공간에 사무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사무실에는 2명의 캐서린 친구 겸 동업자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캐서린 남자 친구 강태범 이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앤드류입니다.”
“안녕하세요. 마크 하인버그입니다.”
캐서린의 친구인 두 남자는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다. 전혀 꾸밈없이 그저 공부와 일을 좋아 할 것만 같은 공붓벌레 이미지. 오히려 이런 학생들에게 앞으로의 성공이 보였다.
오죽하면 빌 게이츠가 공붓벌레에게 잘하라고 했을까 학교에서는 그저 못 노는 아이들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회에 나오면 그들 밑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앤드류가 태범과 캐서린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캐서린이 태범 씨를 그렇게 자랑하던데요? 만날 태범, 태범 거리던데 도대체 캐서린을 어떻게 홀린 거예요?”
“정말요?”
“네, 태범 씨 한국 방송에서 그림 그려서 유명해지셨죠? 그리고 회계사로 일하면서 여러 가지 일도 있으셨고…….”
“그걸 어떻게 다 아신대요?”
“어떻게 알았겠어요, 캐서린이 다 말해줘서 알았죠. 캐서린 원래 저런 애 아니었는데 한국 같다오니 사랑꾼 다 돼버렸어요. 하하하.”
앤드류가 크게 소리 내며 웃자, 캐서린이 말을 끼어들었다.
“뭐, 내 남자 친구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캐서린은 애써 당당한 척 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얼굴색이 빨갛게 변한 걸 보니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럼 스낵 피쳐는 서비스 언제 해요?”
“이제 마지막 테스트 마치면 정식으로 서비스할 거예요.”
태범은 이들에게 스낵 피쳐와 관련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명 앞으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보였다.
투자만 잘 이뤄져 재무적인 안정만 된다면, 분명 기술과 콘텐츠는 사람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창업자들의 기술적 자부심은 대단했다. 특히 마크 하인버그는 이번 사업이 꼭 성공 할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고 이는 모두 그의 실력에서 나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그 완벽함 사이에도 허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한 달 안에 정식 서비스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지만 태범의 눈에는 염려스러운 부분이 보였다.
“캐서린한테 보안 구축이 마무리됐다고 들었거든요. 근데 제가 보기엔 아직 아닌 것 같은데…….”
태범이 걱정 어린 말을 꺼내자 마크 하인버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태범에게로 쏠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보안 문제는 이미 마무리됐고 저희는 이미지 작업만 남았는데요.”
“아니, 제 말이 무조건 맞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보안에 한 번 더 신경을 쓰면 어떨까 싶어서요.”
태범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마크 하인버그는 자신의 완벽성을 깨는 듯한 발언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태범 씨가 취약점 찾아보시겠어요? 저희가 보상으로 돈…… 아니, 주식을 드릴게요. 어때요?”
마크 하인버그는 호기롭게도 태범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