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80화 (80/188)

# 80

태범은 아침 일찍 공항으로 나와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외 연수로 갔었던 필리핀에 이어 두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태범은 창가 자리에 앉아 잠시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창밖 풍경을 바라보자니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게 더욱 실감 나고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리고 이륙하고 보이는 지상의 풍경은 태범에게 예술적 영감이 되고 있었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고 오직 비행기를 타야만 볼 수 있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태범은 그렇게 이륙 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왕첸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독립적으로 사업을 해볼까?’

이제 슬슬 회계사를 이어서 다음 행보를 정해야만 했다.

인지도와 능력이 충분히 채워진 상황 이를 등에 업고 부를 이루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생각이었다.

‘돈이 움직이는 곳을 찾아야 해…….’

태범은 그렇게 앞날에 생각에 빠져 있다가 어느새 본인도 모르게 생각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1시간밖에 안 지났어?’

잠에서 깬 태범은 경악했다.

체감상 잠은 6시간쯤 잔 것 같지만 시계를 보니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10시간 이상은 가야만 런던에 도착이었다.

비행기 첫 이륙할 때만 잠깐 좋았지 좁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장시간 동안 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몰입할 거리가 필요했다.

태범은 가방에서 펜과 노트를 꺼낸 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륙하던 순간 공항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공항의 모습, 활주로와 관제탑 모든 게 뇌리에 깊게 박혀있었고 대충 낙서하듯 노트 위에서 펜을 움직였다.

몰입은 시간을 빠르게 만들었다. 태범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림을 그렸다.

옆자리 노인도 긴 여행이 지루한지 태범을 힐끗 보며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태범이 잠시 펜을 놓고 눈을 비비는 타이밍에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림 잘 그리시네요.”

백발의 머리에 금테의 돋보기안경을 쓴 백인 노인, 그는 능숙한 영국발음으로 태범의 그림에 칭찬을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한동안 태범의 그림 노트를 바라보더니 본인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노인이 보는 건 두꺼운 수학책이었다. 사실 어디 가서 나이 많은 어르신이 수학책을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보기 드문 장면에 태범은 펜을 내려놓고 시선은 노인의 책으로 이동했다.

이제는 반대로 태범이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내는 상황이 왔다. 그렇게 노인의 열띤 독서를 바라보다가 태범이 말을 걸었다.

“미적분 문제네요.”

“네, 가끔 시간 날 때 이렇게 수학 문제를 풀곤 한답니다. 나도 나이가 먹으니까, 뇌를 자주 안 써주면 금방 늙어버리거든요.”

“아직 정정하신 것 같은데요.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그걸 보는 것만 해도 대단하신 거죠.”

“정정하긴요. 이제는 그냥 머릿속에 담긴 기억들을 안 잊으려고 이 노인네가 간신히 버티고만 있는 거죠.”

아니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노인에게서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이 느껴졌다.

태범은 나이가 들면 이 노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이가 들어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젊은이는 수학 좀 하나 보죠?”

노인은 본인을 관심 있게 보던 태범에게 물었다.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취미삼아 하는 정도죠.”

“허허. 그래요? 그럼 이것 좀 한 번 풀어보시겠어요?”

“그럼 한번 보겠습니다.”

심심하던 찰나였다. 어차피 비행기 안에서 시간 때울 게 필요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태범은 노인이 건넨 수학책을 건네받았다. 무슨 수학책이 백과사전을 보는 것처럼 묵직한 게 엄청난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든 게 영어로 적혀있으니 낯설게 보이긴 했지만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태범은 금세 테이블 위에 올려진 수학책에 빠져들며 몰입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특이하네요?”

살짝 생각이 필요한 문제였고 태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문제풀이를 이어나갔다.

노인은 돋보기안경을 올려 쓰며 노트 위 태범의 풀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풀이가 완성될수록 노인의 입에는 옅은 감탄사가 나왔다.

“내게 풀이 좀 설명해줄 수 있나요?”

노인은 감탄하며 태범에게 이것저것 수학과 관련된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노인의 감탄과 호응에 신이 난 태범은 노인의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답을 해주었다.

태범은 어떠한 질문에도 모두 답변을 내놓았다, 그런 태범의 모습에 노인은 태범의 직업이 궁금해졌다.

“수학 쪽을 전공했나본데,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을 하시는지?”

“한국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 회계사.. 역시 숫자와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이시군요.”

태범의 직업을 듣고서는 그제야 태범의 수학 실력이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범 역시 노인의 직업이 궁금해졌고, 이때다 싶어 질문을 건넸다.

“할아버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시는지?

“런던 대학교에서 컴퓨터 관련해서 학생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 그럼 교수님?”

“네, 맞습니다.”

태범 역시 노인의 직업을 들으니 그가 학습에 열을 내고 있었던 행동이 납득이 갔다.

학생도 아니고 나이 좀 있으신 분이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모습은 흔치 않겠지만 런던 대학의 교수님이라니 충분히 그럴만했다.

태범과 노인은 비행기에 타고 있는 내내 대화를 나눴다. 수학 이야기부터 시작해 컴퓨터 관련된 이야기까지, 대화는 전혀 막힘없이 진행됐고 그 덕에 지루하지 않은 비행기 여행이 되고 있었다.

* * *

“태범!! 태범!!”

입국장에서 나온 태범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본인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캐서린이다. 이게 얼마 만인가, 그녀의 얼굴을 보자 태범은 반사적으로 환한 미소가 띠어졌다. 입이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보고 싶었어.”

캐서린은 태범을 보자마자 와락 껴안았다. 평소라면 주변 시선에 부끄러워할 태범이었지만 오늘은 그 어떤 때 보다 그녀의 품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보니까 더 예뻐진 것 같은데?”

“뭐? 흐흐. 오빠도 더 잘생겨진 것 같은데?”

한국에 있을 땐 이런 오글거리는 말 태범에게 상상도 못 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피곤하지? 거의 12시간 걸렸을 텐데.”

“아니, 전혀.”

“지금은 모르지만 시차 때문에 갑자기 피곤해질 거야.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어.”

오늘은 캐서린의 집에서 하루 머물기로 했다.

캐서린의 부모님은 태범이 먼 한국에서 캐서린을 만나기 위해 영국에 온다고 하니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그렇게 캐서린이 아버지에게 빌린 차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와. 건물 예쁘다.”

캐서린의 집은 런던 외곽에 위치한 빨간색 벽돌로 쌓인 단독주택이었다.

정말 영국에 왔다고 느껴지는 게 동화 속에서 나올 법한 굴뚝 달린 집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있었다.

캐서린의 집에 들어갔을 때 반겨주는 사람은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태범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캐서린 부모는 태범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어요.”

“자네가 태범이구만, 반갑네.”

캐서린의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부르기에 동안의 외모였다. 하지만 태범을 놀라게 한 건 캐서린의 아버지였다.

서양인들이 체격이 크다곤 하지만, 무슨 팔뚝이 얼굴만 하다. 민머리에 옷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근육, 태범이 어릴 적 TV에서 즐겨봤던 미국 프로레슬러 더 롹을 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캐서린의 털털함과 강한 성격은 그녀의 아버지를 닮은 듯 보였다.

“캐서린이 아버님 닮으셨나 보네요. 몸이 엄청 좋으세요.”

“하하. 남자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자네는 덩치 좀 키워야 할 것 같은데…….”

슬림한 체형에 속하는 태범은 근육이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캐서린에 아버지는 옷에 가려진 태범의 진가를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아빠, 태범 씨가 이래봬도 힘은 엄청 쌔. 한국에 있을 때 나라 운동했었는데 그때 보고 놀랐다니까.”

태범을 얕보는 듯한 아버지의 말에 캐서린은 반박을 했다.

태범을 운동의 세계로 이끈 것 캐서린이었다. 운동의 ‘운’자도 모르던 태범을 헬스장에 데리고 운동을 시작하게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캐서린은 엄청난 성장을 보였던 태범의 운동 능력을 봐왔다.

“그래? 그럼 우리 딸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 좀 해볼까?”

캐서린의 아버지는 음흉한 표정으로 태범을 바라봤다.

뭘 하려는 걸까, 식탁 테이블 앞으로 가더니 태범에게 손짓을 보냈다.

“팔씨름 한번 하지!”

“팔씨름이요?”

“왜? 자신 없나?”

오자마자 팔씨름이라니 캐서린의 아버지는 괴짜 같은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쁠 건 없었다. 사실 이렇게 유쾌한 아버지상이 태범이 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니 말이다.

태범은 셔츠의 소매를 걷고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며 자세를 취했다.

걷어진 소매에서 전완근이 불끈하고 튀어나오는데 캐서린의 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근육 좀 있네?”

하지만 캐서린의 아버지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우리 아빠가 좀 짓궂은 면이 있으니까 이해 좀 해줘.”

캐서린이 웃으며 태범에게 한마디 한 뒤, 가운데 서서 둘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럼 시작할게요. 시작!”

캐서린이 시작을 알리는 순간 두 남성의 팔 근육은 홍해 갈라지듯 갈라졌다. 손등에는 핏대가 서며 둘 모두 이를 악물고 서로의 팔을 넘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으…….”

옅은 신음이 캐서린 아버지 입에서 세어 나왔다.

서로 간 한 치의 변화도 없이 팔은 90도로 세워져 어디한쪽으로 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똑같은 힘이 충돌한 상황 승패는 누가 힘을 오래 버티는가에 달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다.

‘슬슬 넘겨볼까.’

사실 모든 주도권은 태범이 쥐고 있었다.

스캐너를 통해 얻은 이소룡의 힘은 순간적인 파워를 내는데 능했고 이는 팔씨름에서 상대적으로 더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태범은 예의상 지금까지 버텨준 것이었다. 이제 슬슬 넘길 때가 왔다.

“억!”

캐서린의 아버지는 괴성과 함께 함께 손등이 바닥에 닿았다.

비등비등한 힘겨루기에 유지되던 상황에 갑자기 태범의 팔에서 폭발적인 힘이 발산됐고 그대로 승부는 끝나게 된 것이다.

“아빠 어때?”

태범의 승리를 본 캐서린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캐서린의 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감탄을 내뱉더니 엄지손가락을 펴며 말했다.

“합격!”

그렇게 팔씨름 하나로 캐서린의 아버지에게 합격점을 받았다. 유쾌한 집안이었다.

잠깐의 소동이 끝나고 태범은 오늘 하루 묵을 방에 들어가 짐을 풀며 캐서린과 대화를 나눴다.

캐서린 집에서 이렇게 같이 마주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밑에 가족이 있으니 그 감정을 꾹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아. 맞다! 나 비행기 타면서 런던 대학 컴퓨터 공학 교수님 봤다.”

떨어져 있는 동안 뭐 하고 지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비행기에서 봤던 교수님이 떠올랐다. 캐서린과 같은 학교, 학과이니 혹시나 알고 있을까 물었다.

“누구?”

“이름은 안 물어봐서 모르겠고 흰머리에 나이가 많으시고 좀 점잖게 생기셨는데…….”

“몰라, 흰머리에 나이 많은 사람이 한 둘이어야지…….”

“잠깐만.”

태범은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책상 위에 놓인 펜을 집고 노트를 한 장 찢었다. 그러고는 특징만 간단히 잡아, 기억 속 노인의 얼굴 크로키(인체를 빠르게 그리는 것)를 시작했다.

5분도 걸리지 않고 그림 한 장이 완성됐다. 그림을 본 캐서린은 단박에 교수의 이름을 댔다.

“어? 이분 존 스미스 교수님 인데?”

“존 스미스?”

“응, 이분 엄청 유명하신 분이야.”

알고 보니 비행기에서 만났던 노인은 영국의 유명한 수학자이자 컴퓨터 공학자인 존 스미스였다.

그저 교수라고 알았던 것과는 다르게 엄청난 이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컴퓨터 분야에 가장 권위 있는 책의 저자이자 알고리즘 분석을 창조했고 이론 컴퓨터의 대가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태범이 그런 분에게 수학 문제를 가르친 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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