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마치 기다렸다는 듯 좋은 소식은 연이어 들려왔다.
먼저 홍콩 사모펀드 어빌리티 측에서 앨론 뮤직에 대한 투자 건을 승인했다고 한다.
물론 모든 걸 회계사들의 성과라고 볼 수는 없지만 태범이 전달한 가치 평가 보고서가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어쨌든 어빌리티를 운용하는 왕첸의 마음을 돌린 건 태범이었다.
왕첸은 투자사 내부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앨론 뮤직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고 한다.
기존의 투자 금액을 넘어서 투자액만 수백억대의 자금이 움직일 것으로 보이며 앨론 뮤직은 거금의 투자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소식 하나 더.
회계사 1차 시험 합격자가 발표되는 날 태범은 학교 선배인 오현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스마트폰에 찍힌 오현택의 이름을 보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태범아, 나 회계사 1차 합격했다!”
“정말요? 축하해요. 형.”
역시나 생각대로였다.
고시반에서 오현택의 좌절된 모습을 본 지 벌써 1년, 포기하려던 모습이 여전히 기억에 선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오늘은 달랐다. 태범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현택의 흥분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참..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이게 다 너 덕분이야. 태범아.”
“형이 열심히 하신 거죠. 그게 왜 제 덕이에요.”
“아니야. 네가 준 노트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알아? 내가 그걸 보면서 지금까지 헛공부를 했다 싶었다니까.”
오현택은 모든 공을 태범에게 넘기고 있었다.
직접 공부를 하고 합격의 길을 걸은 사람은 오현택 본인이지만 태범의 노트는 그가 합격을 향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돼준 셈이었다. 결국 태범의 노트 속 문제가 현택을 합격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어쨌든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2차 때도 합격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래, 고맙다. 시간 나면 밥 한번 먹자. 내가 쏠게.”
* * *
태범에 대한 소문은 여러 기업으로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이미 천재성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 앨론 뮤직 투자를 성공시키며 정점을 찍었다.
“강태범 회계사, 이 사람 완전 천재잖아.”
“그러게 회계사인데 그림까지 그리던데 게다가 한 번 보면다 외워버린다며? 부럽다. 부러워. 누구는 코피 터지게 공부해서 이 자리에 왔는데.”
“너 그거 알아? 우리 회사에서 강태범 저 사람 스카우트하려다가 퇴짜 맞은 거.”
“그러겠지, 웬만해서 간에 기별도 안 차겠지. 근데 저 사람 언제까지 회계사 하려나?”
“아마도 금방 그만둘걸? 분명 여기저기서 제의 많이 받았을 텐데 조건 좋은 데로 이동하겠지.”
태범의 기사를 본 샘성 전자 직원들은 부러움 반, 놀라움 반으로 보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문이 커지면서 태범에 대한 정보는 덧붙여지며 점점 많은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했다.
회계사 수석 합격, 영월 식품 분식회계 고발 사건, 회계사들에게 절찬리에 팔리는 출판 서적의 저자 그리고 세상에 신기한 일이 출연에 마지막 앨론 뮤직 투자 성공까지…….
태범에 대한 많은 정보가 더해질수록 경제계 종사자들의 머릿속에는 ‘강태범’ 이름 석 자가 강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 * *
왕첸이 한국을 떠나기 전 태범을 보자며 연락이 왔었다.
오늘은 고기를 써는 날이었다.
왕첸과 또 다시 만난 곳은 그가 묶고 있었던 호텔의 고급 식당이었다.
“안녕하세요, 회계사님.”
왕첸은 태범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하는데 두꺼비처럼 생긴 얼굴이 이제는 순한 양으로 보일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태범 작가님.”
그리고 그곳에는 왕밍밍도 함께 있었다. 그녀에게 태범은 여전히 회계사가 아닌 작가였다.
여전히 잘사는 집 귀한 딸 같은 이미지의 왕밍밍은 태범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 그림 잘 받았어요. 지금 홍콩 집에 보냈는데 엄청 아름다운 그림이었어요. 제 동료 작가들도 태범 작가님 그림을 극찬하더라고요.”
“정말요? 좋게 받았다니 다행이네요. 혹시 마음에 안 들면 어떨까 걱정했거든요.”
“마음에 안 들다뇨, 전 집안 가보로 보관하려고 하는데요.”
“가…… 가보요?”
“네, 분명 태범 작가님 그림은 언젠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이 될 거에요. 제가 작품 보는 눈이 있거든요. 나중에 피카소나 반 고흐의 작품처럼 유명한 작품이 될지도 모르죠.”
“에이. 제가 무슨, 그냥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고 좋아해 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태범은 손을 저으며 애써 아닌 척하지만 속으로는 왕밍밍과 같은 생각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의 능력을 갖추고 그리는 그림인 이상 태범의 예술 가치는 앞으로 무궁무진했다.
식사가 나오고 고기를 썰던 왕첸도 왕밍밍에 이어 한마디를 보탰다.
“내 딸이 이래봬도 미술 작품 보는 눈은 뛰어나요. 내 딸의 안목 덕분에 제가 작품 경매로 한몫 챙기기도 했답니다. 하하.”
“아…… 그러세요. 밍밍 씨, 전시회에서 저도 느꼈습니다. 확실히 예술 감각이 뛰어나시던데요.”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는 법, 태범은 왕밍밍의 예술적 감각에 칭찬을 더했다.
“그러니 제 딸 말이 분명히 맞을 겁니다. 태범 씨, 작품이 후대에 수백, 수천억 하는 작품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허허.”
왕첸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태범은 그가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왕첸은 본인의 어쩔 수 없었던 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태범 씨도 돈, 그러니까 숫자를 다루면 잘 아실 거예요. 그 숫자 하나 차이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올지 말이죠.”
“네, 잘 알죠. 그것 때문에 저희가 잠깐 트러블이 생겼던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사실 회계사님들을 처음 만날 때 냉대하게 굴었던 건 미안했어요. 근데 어쩔 수 없었다는 걸 태범 씨가 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장첸은 후회스런 표정을 지으며 본인의 처지를 설명하더니, 부연설명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뭐, 회계사님들이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했던 거겠죠. 하지만 저희 입장에서는 약간의 오류만 보여도 사실 상대방을 신뢰하기가 힘들죠. 세상에 돈 냄새 맡고 달려드는 사기꾼이 하도 많아서요. 어쩔 수 없이 냉정하게 판단을 해야 하거든요.”
왕첸의 말에 태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왕첸 씨의 말에 100% 공감합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사항이긴 했죠.”
“어우. 그래도 회계사님이 이렇게 이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사실 속으로 욕을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제가 이제 욕먹는 데는 달인이 됐거든요. 허허.”
“제가 무슨 왕첸 씨를 욕합니까, 이렇게 잘 마무리됐으면 다 된 거죠 뭐.”
왕첸과 태범은 서로 가졌던 부정적 감정을 모두 풀고, 화기애애한 대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식사를 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마무리할 때 쯤, 왕첸은 이 자리의 목적을 드러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 투자사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나요? 솔직히 말해서 회계사로 있기에는 아까운 몸이신 것 같습니다. 회계사를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회계사로 일해서 몇 푼이나 되겠습니까?”
왕첸은 투자자답게 모든 성과를 돈으로 측정했다.
사실 회계사 같은 경우 결국 월급쟁이고 태범의 능력에 비해 많이 버는 건 아니었다.
태범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회계사로서 버는 돈보다 많은 돈을 벌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이 기간은 잠시 경험을 쌓는 발판일 뿐 종착지는 아니었다.
그 위대한 인물들의 능력을 가지고 회계사에서 끝을 낸다는 건 능력의 주인들에게 욕먹을 짓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태범은 왕첸의 말에 충분히 이해가 갔다.
태범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왕첸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저한테 생각할 시간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까지 들어온 스카우트 제의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왕첸의 제의는 귀가 솔깃했다.
태범이 관심을 두던 분야이기도 하고, 앞으로 가고 싶었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겠죠. 전 회계사님이 원한다면 전폭적으로 밀어줄 수 있습니다.”
“네, 그럼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네, 언제든 상관없으니 결정 나면 연락 주세요.”
이제는 왕첸과 태범의 입장이 서로 바뀌었다.
저번까지는 태범이 왕첸을 기다렸다면 이제는 반대로 왕첸이 태범을 기다리는 입장이 돼버렸다.
이를 지켜보던 왕밍밍이 뜬금없이 말을 내뱉었다.
“저는 작가님이 아예 미술 작가로 전향하셨으면 좋겠어요. 작가님은 그림을 그려야 멋진 이미지에요.”
그녀의 뚱딴지같은 소리에 태범과 왕첸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으며 웃어넘겼다.
“그럼 제안은 한 번 생각해보는 걸로 하고 앨론 뮤직 건에 대해서는 좋은 결과가 있기 바랍니다.”
“아, 그럼요. 좋은 결과가 있겠죠. 회계사님이 확신하지 않았습니까? 전 믿습니다.”
* * *
[캐서린: 도대체 얼마 만에 만나는 거지?]
[태범: 일 년 다 돼가지.]
[캐서린: 우와, 시간 진짜 안 갈 것 같더니, 벌써 이렇게 됐네.]
금요일 저녁, 태범은 침대에 누워 한가롭게 캐서린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들뜬 기대감 때문일까, 오늘만큼은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일 드디어 영국에서 캐서린과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회계법인의 업무가 여유로워지는 시기 5월이 다가오고 태범은 휴가를 내 영국으로 일주일간 해외여행을 결정했다.
거의 1년 동안 연이어 일만 해온 태범은 잠시나마 머리를 비울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이도 회계법인 같은 경우는 휴가에 대해 관대한 편이기 때문에 시즌기만 아니면 자유롭게 휴가를 낼 수 있었다.
[태범: 영국가면 자기 회사에 놀러가도 되지? 캐서린, 네가 창업했다니 궁금하네.]
[캐서린: 안 그래도 동료들한테 말해놨지!]
현재 대학 4학년인 캐서린은 같은 학교 학생이랑 창업을 한 상황이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사람답게 SNS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넘쳐나는 SNS 시장에 뛰어드는 건 과감한 도전이었다.
태범은 본인 여자 친구가 그러한 도전을 한다고 하니 흥미와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태범: 정말? 뭐라는데? 혹시나 민폐라도 끼치면 안 되니까.]
[캐서린: 괜찮아. 내가 태범 씨 한국에서 잘나가는 회계사 겸 프로그래머라고 소개했거든. 그러니까 빨리 데려오라던데? 태범 씨한테 조언 좀 받고 싶데.]
[태범: 회계사는 맞는데, 프로그래머는 아니지. 사람들 너무 기대하는 거 아니야?]
[캐서린: 내가 기대하라고 태범 씨 칭찬 많이 했는데?ㅋㅋ]
[태범: 어허…… 괜히 부담만 가네.]
[캐서린: 농담이야. 쉬러 오는 건데 편하게 와.]
캐서린과 대화를 마치고, 시계가 12시를 가리키자 태범은 책상 앞에 앉았다.
“스캐너야. 형이 영국에 갔다 올 테니 다음 주에 보자. 그때 동안 잘 있어라.”
태범은 혼잣말로 스캐너와 대화를 나눴다.
이제 스캐너는 없어서는 안 될,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생이 돼버렸다.
제조일자 2014년 02월 01일 스캐너는 태범의 동생이었다.
[창의성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60%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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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65%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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