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미술 작품은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보면 왕밍밍 작가님의 작품은 감성적이세요.”
“잘 아시네요. 저는 머리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마음으로 그리려고 노력하거든요. 이렇게 설명하면 뭐냐고들 물어보시는데 태범 작가님은 절 잘 이해하시는 것 같아요.”
태범과 왕밍밍은 작품 앞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왕밍밍의 작품은 대부분 유화 작품으로 사회의 문제를 시사하는 작품이 주를 이뤘다.
환경 문제, 인권 문제, 정치적인 문제까지 그녀의 작품은 서슴없이 세상 문제에 대해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태범 작가님은 그림 그릴 때 어떤 생각으로 그리세요?”
“음…… 저는 창조를 하려고 하죠.”
“창조요?”
“네, 어떤 유행이나 기법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세상이 유일한 작품을 만들려고 애써요.”
왕밍밍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태범의 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실 것 같더라고요. 태범 작가님 그림은 뭔가 지금껏 그림과는 달랐어요. 색감이나 모든 게 오묘한 게 현실과 비현실을 뛰어넘는 그림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가요? 그렇게 느끼셨으면 다행이네요. 그게 제가 바라던 느낌이었거든요.”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태범도 잠깐 본인이 왕첸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걸 잊을 정도였다.
“저희 아버지를 보러 오셨다고 했죠?”
왕첸에 대한 말을 먼저 꺼낸 건 왕밍밍이었다.
왕밍밍은 태범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었고 태범을 신뢰한 왕밍밍은 마음을 열었다.
“네, 왕밍밍 아버님을 만나러 왔죠.”
“그럼 제가 연락해드릴게요. 저 때문에 굳이 시간 쓸 필요 없으세요.”
“정말 그래 줄 수 있나요? 사실 너무 실례되는 일인 것 같아서…….”
“얼마나 급했으면 여기까지 찾아왔겠어요. 이해해요.”
정말 다행이었다.
왕밍밍은 마음이 넓고 생각이 깊은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의 성격 곧이곧대로 작품 안에 나타나고 있었다.
“제가 연락처를 드릴 테니 편할 때 연락하세요.”
태범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왕밍밍에게 건넸다.
“네, 꼭 연락드릴게요.”
미소로 대답하는 왕밍밍의 얼굴을 보고 태범은 확신을 느꼈다.
분명 왕첸과의 만남은 성사될 것이다.
* * *
태범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왕밍밍과 헤어지고 그날 저녁 바로 연락이 온 것이다.
왕첸에게 직접 온 연락은 아니었지만 왕밍밍을 통해 왕첸과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을 거라고 왕밍밍의 부탁에 마지못해 나올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코 왕첸은 자신의 딸까지 이용하는 사람을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자칫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는 악질로 보일 수도 있었다.
태범은 이런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태범은 왕첸과의 만남에서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만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먼저 왕첸과 약속을 잡아준 왕밍밍에게 선물해 줄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에게 감사의 의미로 작은 선물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중국인들은 무슨 그림을 좋아할까?’
‘아니지. 왕밍밍은 틀에 박힌 걸 좋아하지 않던 것 같던데…….’
잠깐의 고민을 했지만 생각이 깊어져봤자 작품을 방해하는 잡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것저것 따지다지기 보다는 마음을 비우고 태범은 붓질을 시작했다.
* * *
주말이 되었고 3명의 회계사는 쉬는 날을 반납하고 왕첸과 만나기 위해 호텔에 왔다.
약속 장소인 호텔 회의실에 오니 한 남자가 회계사들을 맞이해줬다.
처음에 그가 왕첸인가 싶어 긴장한 채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지만 알고 보니 왕첸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곧 내려오시니 여기서 기다리시죠.”
“아! 네, 천천히 내려오셔도 됩니다.”
다들 긴장된 마음을 가지고 의자에 앉아 왕첸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특히 이번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김용수는 부담감이 컸는지 이마에 땀이 흥건히 맺혀있었다. 손수건으로 닦아내는데도 계속 흐르는 땀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털컥.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키에 뚱뚱한 몸매, 그리고 왼쪽 눈에 왕 점.
두꺼비!
앨론 뮤직 대표가 말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한눈에 봐도 그가 왕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회계사들은 왕첸이 들어오자 하나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흠…….”
왕첸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자리에 앉았다. 회계사들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자리에 앉은 왕첸은 인상을 쓰며 영어로 말을 꺼냈다.
“우리랑 일은 끝난 것 같은데. 왜 또 만나자고 하시는 거죠?”
“오해를 풀고 싶어서 왔습니다. 저희가 보낸 가치 평가 보고서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걸 설명해드리고 싶었는데 연락이 안 돼서 이렇게라도 찾아왔습니다.”
“아니, 그건 이제 내가 알 바 아니고, 왜 내 딸 전시회까지 찾아와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연락을 끊었으면 그냥 그렇게 아시지. 이렇게 사람을 귀찮게 합니까?”
왕첸은 구겨진 인상은 좀처럼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불만을 털어놓았다.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으나, 이렇게 직접 듣는 불만은 회계사들에게 당황스럽기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김용수는 안절부절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만 닦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김진태 차장은 왕첸의 불만에 맞서며 말을 꺼냈다.
“따님 분을 이용했던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해를 풀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왕첸 씨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방법이 그뿐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연락을 안 받으면 그냥 끝난 거로 알고 계시지 그걸 또…….”
왕첸은 고개를 저으며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김진태 차장은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제가 모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 번만 제 설명 들어주시죠.”
“됐습니다. 봐봤자 수정본 보여주실 거 아닙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습니다. 저는 당신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습니다.”
김진태 차장의 간절한 부탁에도 왕첸의 태도는 단호했다.
새로 작성된 보고서를 보여주며 설명을 하려 하지만 왕첸은 대화하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끝났다.
김진태 차장과 강용수의 마음속에는 오직 이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확고한 결심을 내린 듯한 왕첸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왕첸은 그대로 회의실을 떠나려 했다.
그 때 태범은 왕첸을 향해 중국어로 말했다.
“앨론 뮤직 투자하시면 100% 수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 목숨을 걸고 장담합니다.”
여태껏 영어로 대화하다가 회계사 중 한 명인 태범의 입에서 나온 중국어는 왕첸의 호기심을 불러왔다.
게다가 100% 수익을 보장한다니 사기꾼 같은 소리이긴 하지만 회계사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에 그냥 흘려듣기는 어려웠다.
왕첸은 다시 자리로 돌아오더니 의자에 앉았다.
“당신 회계사를 걸고, 그 말 장담할 수 있습니까?”
“네, 장담합니다. 그렇다고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설명만 해드릴 테니 선택은 왕첸 씨 당신의 몫입니다.”
왕첸은 태범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김진태 차장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요? 그럼 한번 보죠. 대신 뱉은 말에 대한 책임은 꼭 지셔야 할 겁니다.”
왕첸이 태범을 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조그마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정이다.
갑자기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태범과 왕첸의 강렬한 눈빛 교환까지 김진태 차장은 이 상황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태범은 서류 가방 속에서 보고서를 꺼내며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러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앨론 뮤직에 관한 미래 가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앨론 뮤직은 현재 대한민국 음악 감상 앱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설마 이걸 가지고 그렇게 확신했던 겁니까?”
“아니요. 뒷장을 보시죠.”
태범이 서류 뒷장을 넘기자 숫자로 가득한 종이가 나왔다.
마치 대학 수학 공식을 적어놓은 듯한 숫자들이 있었고 그 밑에는 설명이 있었다.
“제가 개발한 재무 모델링과 가치 평가 기법입니다.”
설명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공식에 태범은 친절하게 하나씩 설명에 나섰다.
현 재무 상태에 따른 미래 수익성을 정확히 나타냈고 단지 재무적 부분뿐 만아니라 앨론 뮤직의 사업적 기술적인 부분까지 고려해서 가치를 평가했다.
그리고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시너지와 미래 추가 수익을 측정했고 과거의 기록뿐만 아니라 미래를 나타내는 예측 모형을 만들어 보여줬다.
“설명해드린 공식을 토대로 만든 예측 모형을 보면 이번 투자는 분명히 성공하실 겁니다.”
“아…….”
태범의 설명에 왕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더니 지금은 선생님을 바라보는 전교 1등의 눈처럼 시선을 고정시킨 채 태범의 설명에 빠져들었다.
“어때요, 생각이 좀 달라지셨나요? 강요는 하지 않겠다만 좋은 선택을 하셨으면 좋겠네요.”
오랜 시간 설명이 이어졌고 마지막 태범은 선택의 몫을 모두 왕첸에게 넘겼다.
태범은 전혀 초조하거나 매달리지 않았고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될 대로 되라는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왕첸은 턱을 괴고 시선을 아래로 고정시키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왕첸이 고민하고 있는 건 분명 좋은 징조였다
낙심에 빠져있던 김진태 차장과 용수는 잃었던 기대감은 되찾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보고서를 몇 번이나 끼적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왕첸은 회계사들에게 영어로 말했다.
“좋습니다. 회계사님의 설명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회사 내부에서 이야기를 하고 바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왕첸은 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태범의 설명에 납득하고 있었고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분명 좋은 선택을 하신 걸 겁니다.”
김진태 차장은 잃었던 웃음을 되찾고 왕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왕첸은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시선은 오직 태범에게 있었다.
태범을 지그시 바라보던 왕첸이 말했다.
“제가 지금까지 투자자로서 일하면서 당신이 보여준 재무 모델링과 평가 기법은 처음 봅니다. 회계사님이 독자적으로 개발하신 건가요?”
“네, 개인적으로 만든 기법입니다. 제가 회계사 되기 전부터 가치 투자에 관심이 있어서 그때부터 고안한 기법입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이걸 저한테 주셨으면 지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요. 제가 이걸 받고 설명을 들었으면 투자를 결정했을 겁니다. 허허.”
왕첸이 저런 말을 하니 태범 역시 자신의 평가 기법을 그냥 보고서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랬다면 이런 수고를 안 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긴 일. 어쨌든 좋은 결과가 있으니 태범은 이걸로 만족했다.
“좋습니다. 제가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저기 명함 좀 하나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태범은 회의실을 나가려던 왕첸을 잠시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책상 밑에 세워진 그림 한 점을 들리며 말했다.
“이것 좀 왕밍밍 씨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까요? 어쨌든 이렇게 자리를 만들어 준 게 밍밍 씨이니 감사의 의미로…….”
“무슨 그림이죠?”
“대단한 건 아니고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아! 딸한테 들었습니다.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신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왕첸은 미소를 보이며 태범의 그림을 받아 들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끝에 와서 회계사들과 왕첸은 대화를 좋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렇게 왕첸과 만남을 끝내고 회계사 3인방은 호텔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기분은 180도 완전히 달랐다. 찬 공기마저 회계사들에게 상쾌하게 느껴졌다.
밖에 나온 김진태 차장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말을 했다.
“왕첸이 아까 자리를 벅찰 때 얼마나 심장 떨렸는줄 알아? 태범 씨 덕분에 살았어.”
“별 말씀을요.”
“태범 씨가 아까 왕첸에게 보여준 거 회사에 가서 한 번 더 설명해 줄 수 있어?”
“네, 가서 설명해 드릴게요.”
“분명 다른 회계사도 태범 씨의 설명을 들으면 놀라워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