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저희는 대한민국 회계법인 1위 기업으로 절대 신뢰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오해로 생긴 문제입니다.”
태범은 방에서 미리 준비한 대본을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왕첸과의 만남을 대비한 작업이었다.
무작정 만나는 것보다 미리 할 말을 생각해두고 만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모든 말은 중국어로 이뤄졌다.
대규모 사모 펀드를 운영할 정도의 사람이면 분명 영어를 사용할 텐데 태범은 중국어를 사용함으로써 친근함과 신뢰감을 주고 싶었다.
중국어쯤이야 폰 노이만의 언어 이해력(100%)과 암기력(100%)이 있다면 큰 어려움은 없었다.
게다가 왕첸이 어떤 질문을 할지 예상하고, 답변을 준비했다.
분명 의심을 많이 하고 있을 텐데 모든 오해를 지울 수 있도록 철저한 대답이 필요했다.
태범은 본인의 기업 분석력(100%)으로 앨론 뮤직에 대한 모든 답변을 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 * *
다음날 또 다시 태범은 포함한 회계사 3인방은 전시회에 찾아갔다.
오늘은 확실히 왕첸을 만나겠다는 마음이었다.
다들 긴장은 되는지 전시회를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표정이 굳어있었다.
“태범 씨 가방에 뭘 넣었기에 그렇게 두꺼워?”
태범의 한쪽 손에는 두툼하게 채워진 서류 가방이 들려있었다.
가방으로서 한계치를 넘을까 말까 할 정도로 빵빵했고 이는 김진태 차장에 눈에 띄었다.
“앨론 뮤직에 관해 조사한 자료들인데 평가서에는 없는 내용이라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어요.”
“앨론 뮤직 자료?”
“네, 좀 주관적인 내용이라 평가서에는 넣지 못했는데 투자에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에요.”
“그래? 뭐 준비성은 좋아. 근데 말을 조심해서 해. 이런 대규모 자금을 굴리는 펀드 매니저들은 자존심이 쌔서 살짝 기분만 상해도 돌아설 수 있어.”
“네, 조심하겠습니다.”
3명의 회계사는 들어가기 전 마음을 바로잡고 전시회장으로 입장했다.
정장을 곱게 빼입은 남성 3명, 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있는데 누가 봐도 미술을 감상하러 온 것보다는 다른 의도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애써 작품을 감상하는 척하며 주위를 살폈다.
“어 또 오셨네요!”
어제 봤던 큐레이터가 오늘도 그대로 있었다.
태범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어제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봤던 거 다시 보러 왔어요.”
“그래요? 여기 작품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웬만하면 다시 보러 오지는 않을 텐데.”
“평소 보기 힘든 작품들이잖아요. 이번에 못 보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거고…….”
“아, 그래요? 여기 이분들은 동료분들이에요?”
“네, 같은 회계법인에 다니시는 분이에요.”
“아! 회계법인…….”
회계법인에서 왔다는 말에 큐레이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틀 연속 3명의 회계사가 똑같이 미술관에 방문한다는 건 낯선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평일 업무 시간에 말이다.
김진태 차장과 김용수는 예술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태범의 옆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척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저기 왕밍밍 작가님은 언제 오시는지 아세요? 작품에 대해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데…….”
“혹시 작가님 만나고 싶어서 오신 거예요?”
“아…… 뭐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정확한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오늘 가족분하고 방문할 거예요.”
큐레이터 입에서 가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회계사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의 입으로 향했다. 어쩌면 정말 왕첸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가족이요? 왕밍밍 작가님 홍콩 분 아니신가요?”
태범은 왕밍밍의 아버지 왕첸이 한국에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기위해 모르는 척하며 물어봤다.
“네, 홍콩분이시죠. 그런데 이번 전시회 때문에 작가님하고 가족분들 한국에 오신 걸로 알고 있거든요.”
“아. 정말요? 그럼 오늘 기다리더라도 한번 만나 뵙고 가야겠네요.”
“시간 되시면 그렇게 해보세요. 제가 태범 작가님 소개시켜 드릴게요.”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작가님한테 물어볼 게 많았거든요.”
이 여자는 태범의 절실한 팬이 분명했다.
어제는 사인을 요청하더니 오늘은 태범을 돕기 위해 팔 걷고 나서려 하고 있다.
태범은 다시 한번 인기를 실감했다.
“어! 세상에 신기한 일이에 나온 작가분 아니세요?”
옆을 지나가던 한 남자가 태범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다가왔다.
“네, 맞습니다.”
“맞네. 맞아. 기억력 엄청 좋으신 분이잖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저기 혹시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주실 수 있으세요?”
“죄송합니다. 여기 미술관이라 사진은 좀…….”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태범을 알아보고 있었다.
작가.
이곳에서 태범은 회계사보다는 미술작가였다.
세상에 신기한 일이에서 보여준 능력에 대한 충격은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오, 작가님 다 되셨네.”
김진태 차장이 태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잠깐이지만 앨론 뮤직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태범의 인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3명의 회계사는 왕첸을 만나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렸다.
이제는 대놓고 사람 만나러 왔다는 걸 티내며 작품을 거들떠보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언제 오나, 오늘 오는 건 맞나, 자리에 가만히 앉아 드는 생각은 이것뿐이었다.
3명의 회계사들 모두 여기저기 눈을 돌리며 왕첸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태범 작가님, 왕밍밍 작가님 오셨거든요?”
“네? 정말요!”
큐레이터가 태범에게 다가오더니 왕밍밍이 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시간이 꽤 지나고 오후가 되서야, 듣는 기쁜 소식이었다.
“어디에 계시죠?”
“미술관 입구에서 직원분이랑 이야기 하고 계세요.”
“혹시 혼자 오셨나요?”
“네, 혼자 오신 것 같은데.”
혼자라는 말에 회계사들은 아쉬워했다.
목적은 왕첸과의 만남인데 그가 안 오면 모든 게 말짱 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왕밍밍과 대화라도 나눠보자는 심장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큐레이터는 손으로 가리킨 전시회장 입구에 있는 왕밍밍을 가리켰다.
세련된 블라우스와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 그녀는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가님, 여기 강태범 작가님이라고 유명하신 분이 있는데 작가님을 한번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강태범 작가? 그게 누구시죠?”
“저분…… 한국에 유명한 프로그램에 나오신 미술 작가님이세요.”
큐레이터가 왕밍밍에게 태범을 미술 작가로 소개했다.
서로 거침없이 영어를 내뱉으며 대화를 나누는데 딱 봐도 배운 사람들 이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안녕하세요. 강태범이라고 합니다.”
태범은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인사 정도는 정확한 발음으로 말할 수 있었고 영어보다는 그녀의 모국어로 대화하는 게 더 친근감을 줄 것만 같았다.
“어! 중국어를 할 줄 아시네요?”
“네, 제가 중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중국어를 좀 배워뒀습니다.”
“아, 그러세요? 근데 저를 어떻게 아시고…….”
“여기서 작품을 보고 알았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만드셨던데요.”
“아…… 감사합니다.”
갑작스런 태범의 등장에 살짝 당황한 눈치였지만 눈치 빠른 큐레이터는 모든 걸 설명했다.
스마트 폰을 꺼내 태범이 무슨 작품을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기를 끌었는지 모든 걸 말이다.
처음에는 그저 그런 눈으로 바라보던 왕밍밍의 눈에는 점점 호기심이 생기고 있었다.
“정말 이걸 한 번 보고 그리신 거예요?”
“네, 그때 시간이 없어서 다 그리진 못했는데 언제 한번 시간 나면 서울 전체를 그려보고 싶네요.”
“아니, 작가님 같은 분 처음 봐요. 이걸 어떻게 그리셨대요?”
왕밍밍 믿을 수 없다는 듯 스마트 폰 속 태범의 작품을 몇 번이나 바라봤다.
완벽한 미술 작품은 물론 천재적인 기억력이라는 능력, 이 두 가지를 가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신이 두 사람에게 나눠서 줘야 할 능력을 실수로 한 사람에게 몰아준 느낌이었다.
단 한 번의 TV 방송으로 시청자들을 놀래게 만들었는데 실제로 작가를 앞에서 보는 왕밍밍은 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미술 작가로 활동하시는 거예요? 작가님 정도면 이름이 알려져야 할 텐데 이쪽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됐나 봐요?”
“네, 방송 출연으로 우연히 제 작품을 알리게 된 거지 사실 본업은 미술 작가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 하시는데요?”
“회계사입니다.”
“회계사요?”
어느새 왕밍밍의 관심은 본인의 전시회가 아닌 태범에게 있었다.
단지 조그마한 스마트 폰으로 태범의 작품 몇 가지를 봤을 뿐인데 왕밍밍은 태범의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왜 회계사를 하고 계세요. 이 정도 그림 실력이면 세계적인 작가가 되시는 건 금방일 거예요. 제가 이쪽 계통에 수십 년을 일하고 있지만, 작가님같이 특이한 재능을 가지신 분은 없었거든요.”
“사실 미술은 취미생활이라..”
“취미…… 취미로 하기에는 재능이 너무 아깝네요.”
취미라는 말에 왕밍밍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 능력을 단지 취미로 사용한다는 게 미술 작가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밍밍은 태범의 능력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생각했다.
“태범 씨, 말했어?”
김진태 차장이 태범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건드리더니 물었다.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차장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판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인사만 나눴어요. 이제 말하려고요.”
“그래, 조심히 말해 봐.”
혹시 나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처럼 보일까, 왕밍밍에게 자연스럽게 대해야만 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 이분들은?”
왕밍밍은 뒤에 있는 진태와 용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회사에서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십니다.”
“회계사분들도 미술 작품에 관심이 많이 있나 봐요?”
“사실 그게…….”
태범은 약간 뜸을 들이며 최대한 고민하는 척했다.
“왜 그러세요?”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무슨…….”
“사실 저희가 여기 온 이유는 왕밍밍 작가님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서였거든요.”
“저희 아버지를요?”
태범은 왕밍밍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앨론 뮤직에 대한 일부터 시작해 무슨 일을 하고 왜 이곳에 찾아왔는지 말이다.
태범이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데 왕밍밍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범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었다.
사실 민폐가 아닐까 걱정은 했지만 생각보다 왕밍밍은 호의적이었다.
이는 방금 전 쌓은 태범의 작가 이미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머리에 태범은 회계사보다는 훌륭한 미술 작가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작가님을 이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오해를 풀 방법이 없다면 이렇게라도 해야죠.”
“그럼 아버님은?”
“저희 아버지는 오늘 안 오세요.”
“아…… 그래요.”
아쉽지만 오늘도 허탕이었다.
태범은 이 사실을 선임에게 전하자 김진태 차장 역시 허탈한 듯 코를 찡그리며 아쉬워했다.
정말 눈알이 빠지도록 앉아서 기다렸는데 당연히 허탈할 수밖에…….
오늘도 이렇게 아무 성과 없이 자리를 떠야만 했다.
“차장님, 저 왕밍밍 작가랑 잠시 대화 좀 나누고 가도 될까요?”
“왜 무슨 일인데?”
“왕밍밍 씨랑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좀 나누고 싶어서요.”
태범은 차장에게 말을 하면서 눈을 찡긋거리며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무슨 뜻인지 알았을 거라 믿었다. 차장 역시 태범의 마음이 전달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왕밍밍 작가님 작품 잘 감상했습니다. 사실 일 하러 온 거였지만 보다 보니 작가님 작품에 관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요? 그럼 혹시 제 작품들 좀 평가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 물론이죠.”
이때다 싶었다. 오히려 왕밍밍이 먼저 부탁을 하고 있었다.
태범은 이 좋은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왕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왕밍밍과의 관계는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연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