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앨론 뮤직 본사로 향하는 회계사들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제의 원인은 김용수의 실수로 일어난 것이지만 어쨌든 책임자인 김진태 차장이 책임을 져야만 했다.
최종본을 한 번 더 검토해야만 했었는데 그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에 생긴 결과이기도 했다.
태범 역시 같은 프로젝트에 소속되었기에 책임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일단 뭐가 됐든 간에 죄송하다고 하고 투자자 측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봐.”
“네.”
태범이 운전하는 회사 차량 안에서는 해결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김진태 차장은 윽박에 가깝게 강한 어조로 말했고. 용수는 다소곳하게 앉아 차장의 말에 무조건 ‘네’하고 대답할 것밖에는 할 게 없었다.
‘기분 언짢네.’
선배가 본인 앞에서 저리 기죽어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군대에 있을 때 자기 선임이 다른 윗선임이게 갈굼을 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때 느낌이랄까.
얼른 이 상황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앨론 뮤직의 김호진 대표.
회계사들이 문을 열고 대표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산만하게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들어와요! 들어와.”
회계사들은 김호진 대표의 얼굴을 보며 분위기를 살피기 바빴다.
어이없는 실수로 투자를 말아먹게 생겼으니 대표의 심정은 분노와 함께 좌절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파에 앉은 회계사들은 좌불안석, 특히 김용수는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대책들 있습니까?”
대표는 쏘아붙이는 말투로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 자유롭고 한없이 여유를 지닌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대표는 한쪽 다리를 떨며 목소리 톤을 한없이 높였다. 그는 한눈에 봐도 초조해하고 있었다.
“일단 저희의 착오 때문에 일어난 일에 대해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김진태 차장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고, 뒤이어 김용수도 군기 잡힌 목소리로 사과했다.
회계사로서 자존심이 버려지는 순간이었다.
“사과는 됐고요. 방법을 말해보세요. 방법을.”
“저희가 실수한 걸 어빌리티 측에 알리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김진태 차장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아니, 지금 와서 고쳐도 그쪽이 그걸 믿어주지 않아요. 어빌리티 입장에서는 회계사님들이 작성한 게 실수인지, 고의인지 어떻게 압니까?”
가장 문제는 투자자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다.
자칫 보면 투자를 위해 기업 가치를 인위적으로 늘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실수였지만 마음속 진실을 끄집어내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대화를 하다 보면…….”
“그리고 지금 대화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지금 그쪽과 연락조차 안 되는 데 어떻게 대화를 합니까?”
“네? 연락이 안 됩니까?”
“네, 연락이 안 됩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연락을 피해더군요. 아우!”
단호한 투자자들의 행동에 화가 났는지 대표는 얼굴을 잔뜩 구기며 짜증을 냈다.
대표의 말에 김진태 차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 만나준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대표님, 그럼 혹시 그 투자자들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더 이상 아무런 대책을 대놓을 수 없는 분위기 그 사이를 비집고 태범을 대표에게 말을 걸었다.
“왜요? 직접 찾아가보게요?”
“그럴 수 있다면 그래야죠. 지금 다른 방법이 있겠습니까?”
태범은 거침없었다.
싸해진 분위기기 사이에 막내가 나선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대책은 없어 보였고 가만히 침묵을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찾아가서 됐으면 제가 진작 찾아갔을 겁니다.”
대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긴 저 성격에.’
김호진 대표의 거침없는 성격이면 분명 찾아가고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투자자를 만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사모 펀드 어빌리티에게 앨론 뮤직은 완전히 눈 밖에 난 모양이다.
“그럼 혹시 어빌리티에 대한 정보나, 추측할 수 있는 거라도…….”
태범은 꼬투리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계속 질문을 건넸다.
마치 탐정에 빙의가 된 것처럼 문제해결을 위해서 조그마한 단서라도 잡기 위해 말이다.
“아! 맞다.”
태범의 질문이 대표의 머리를 일깨울 것인가 대표는 뭔가가 떠오른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왕첸이라고 어빌리티 측 펀드 매니저가 있는데 그분의 딸이 대한민국에서 미술 전시회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초대장도 받았고요.”
“미술 전시회요?”
“네. 딸의 전시회에 방문한다고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
김호진 대표는 말을 하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본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고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다.
“아직 전시 시작도 안 했네요.”
대표가 미술 전시회 티켓을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틀 뒤에 시작하는 중국 현대 예술 전시회였다.
“어! 그러면 왕첸이라는 사람, 여기에서 만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순간 태범은 머릿속이 번쩍이는 기분이 들었다.
펀드 매니저 왕첸, 그와 만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음…… 그럴지도 모르죠.”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능성을 보였다.
“일단 다행이네요. 일단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봐야죠.”
다행히도 투자자를 만날 기회가 생기긴 했다.
물론 정식적인 만남은 아니지만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태범 씨, 그게 무작정 찾아간다고 되겠어? 오히려 그게 실례일 수도 있어.”
김진태 차장은 아직 확신이 안 드는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대표가 티켓을 보이는 순간부터 태범의 다음 행보는 정해졌다.
미술관에 찾아가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어떻게 해서든 어빌리티의 펀트매니저인 왕첸을 만나야만 했고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기 방법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 * *
“크으!”
태범의 한 손에는 캔 맥주가 들려있고 다른 한 손에는 마우스가 들려있다.
혼자 사는 집.
이제는 아무 눈치 보지 않고 본인 마음대로 온갖 것을 할 수 있었다.
맥주를 목에 넘기며 스캔을 한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태범은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시침이 12시를 가리키는 순간 모두 풀어 버렸다.
꿀꺽.
[창의성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44%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45% 진행되었습니다.]
나무줄기에서 잔가지들이 퍼져 나오듯이 뇌의 회로가 여러 갈래로 퍼진 것 같다.
창의성이 진행될수록 한 가지 생각은 두 가지로 그리고 다시 네 가지로 세포가 분열하듯 다양한 아이디어가 머리에 떠올랐다.
‘다빈치가 왜 그랬는지 알겠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생애 왜 그렇게 많은 직업을 가졌고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쳤는지 이해가 갔다.
머릿속에 터져 나오는 아이디어를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요구하는 아이디어와 이를 풀기 위한 욕구는 여러 개지만 하필 육체는 하나다.
그러니 어쩌겠나, 몸뚱이 하나로 모든 아이디어와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을 것이다.
태범도 현재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떠오르는 것도 너무 많다.
“크!”
시원한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들이마시며 생각을 바로잡고 이번 앨론 뮤직 투자 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떠올렸다.
‘흠…… 전시회라…….’
펀드 매니저 왕첸의 딸, 왕린린.
태범은 투자자를 만나기 위해 그의 딸 왕린린이 여는 미술 전시회를 찾아가기로 했다.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마지막 기회다.
[중국 현대 미술전.]
일주일간 서울 K엑스에서 열리는 미술전으로 중국의 유명한 미술 작가 3명의 작품이 전시된다. 그리고 3명의 작가 중 한 명이 왕린린이다.
판화, 유화, 설치 미술 등 다양한 미술 작품이 있다니 사실 태범에게는 일적인 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를 끄는 미술전이긴 했다.
미술에 있어서 태범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유명한 작가 중 한명이니 말이다.
물론 정식적인 직업은 아니지만 SNS나 TV방송을 통해 능력 있는 그림쟁이라고 알려진 태범은 나름 작가라고 불릴 만했다.
탈칵.
태범은 중국 현대 미술전을 예매하기 위해 예매창으로 들어갔다.
‘언제 나타날까…….’
문제가 있다면 전시회는 한 달간 열린다는 것이었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 기간 동안 왕첸을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흥신소에 맡기는 게 빠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분명 초반에 나타날 확률이 크겠지.’
태범은 나름 본인만의 추리를 해나갔다.
아마도 전시회가 열리고 처음이나 초반쯤에 작가가 모습을 드러낼 확률이 높다. 항상 처음은 중요한 법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본인의 축하해주기 위해 방문하는 것 일 텐데 왕첸 역시 그쯤에 나타날 확률이 높았다.
“흠…….”
태범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를 어떻게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해서 어떻게 설득을 할지 말이다.
그렇게 잠을 자기 전까지 침대에서 조차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잠과 함께 자연스럽게 꿈나라로 갔다.
* * *
“정말 이래도 되는 거야? 이러면 더 싫어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잖아요. 저희를 안 만나 준다는데 밥이 됐든 죽이 됐든 일단 대화를 나눠야 오해를 풀죠.”
다음날 태범과 용수 그리고 김진태 차장은 미술 전시회가 열리는 K엑스로 왔다.
용수는 혹시나 상황이 더 악화될까 걱정하고 있지만, 태범은 복잡한 생각보다는 행동을 하자는 주의였다.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모두 시도해야만 했다.
투자자가 만나주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면 된다.
어찌됐건 일단은 투자가 무산된 상황에 무슨 짓을 해도 잃은 건 없었다. 고민과 생각만 해봤자 행동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태범은 문제 해결을 위해 뭐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한 태범의 추진력은 모두 스캐너로 얻은 도전 정신(100%)에서 나오고 있었다.
“근데 왕첸이 정말 여기에 있을까? 언제 올지도 모르는 거잖아.”
용수가 물었다.
“언젠가 나타나겠죠. 이 정도 노력은 감수해야 해요.”
태범이 알고 있는 건 투자자 왕첸이 딸의 전시회에 방문한다는 것뿐이었다. 오직 그뿐, 시간이나 어디에 나타날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근데 왕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엘론 뮤직 대표한테 듣긴 했는데 말로 들어서 생각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네요.”
엘론 뮤직 대표가 말하길 왕첸은 작은 키에 살집이 있고 왼쪽 눈에 커다란 점이 있다고 한다.
닮을 꼴을 따지자면 두꺼비라는데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찾을지 긴가민가했다.
“잘 찾을 수 있을까?”
확실히 용수는 지금 이 상황을 염려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다 따지고 있는 게 완벽한 계획을 원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김용수의 심장은 콩알만해져있었다.
본인의 책임이 컸으니 아마도 모든 게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긴장된 상태일 것이다.
“감으로 찾아야죠.”
“감?”
태범의 대답에 용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용수는 태범에게 거창한 계획이라도 있는 줄 아는 모양이다.
물론 계획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는 운과 감을 믿어야만 했다.
태범에게 확실한 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왕첸과 만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용수 씨.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고!”
용수의 좌불안석인 모습이 싫었는지, 김진태 차장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차장의 말에 용수는 군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하며, 그렇게 세명의 회계사는 미리 예매한 티켓을 통해 전시관으로 입장했다.
“홍콩에서 유망한 작가라더니 그럴만하네요.”
전시관을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목판 작품이었다.
현대 문명의 폐해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목판의 거친 면을 통해 암울한 시대를 표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생각이 자유롭게 표현된 작품들을 보니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과 괴리가 느껴졌다.
역시 예술인들은 예술인 그 자체로 봐야만 했다.
태범은 작품을 구경하는 동시에 왕첸 그리고 왕밍밍을 찾기 시작했다.
작품을 보느라 그리고 사람을 찾느라 태범과 눈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어? 강태범 작가님 아니세요?”
“네?”
“맞으시죠? 세상에 신기한 일이에 나오신..”
전시관을 반쯤 돌았을 때 한 여성이 태범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여성은 본인을 이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소개했다.
역시 그녀는 미술계 사람답게 태범을 알아보고 있었다.
“네, 맞아요.”
“아! 그분 맞으시구나. 만나 봬서 영광이에요.”
마치 팬이 스타를 본 것처럼 큐레이터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태범을 바라봤다.
차라리 잘 된 상황이었다. 큐레이터라면 이번 전시의 스케줄을 모두 꿰고 있을 것이다.
“아…… 네, 반갑습니다.”
“중국 미술에도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네, 장르 따지지 않고 모두 보는 편이죠.”
“하긴 TV에서 작가님 작품 보면서 느꼈어요. 뭔가 일률적인 표현 방식보다는 순수하게 작가님의 창의성에서 나온 그림이라는 걸 말이에요.”
큐레이터는 태범을 잘 알고 있었다. 태범의 그림을 자세히 분석해서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감상평을 말하고 있었다.
“혹시 여기 작가님들은 전시관에 안 오시나요? 여기 왕밍밍 작가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그런데…….”
태범은 이때다 싶어 큐레이터에게 질문을 해봤다.
“왕밍밍 작가님은 내일 방문하세요. 오늘 오후에는 수징핑 작가님이 방문하시고요.”
“아. 내일이요.”
“그럼 가족 분들하고 같이 오시나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왕밍밍의 방문 일정을 알아냈다.
노력한 자에게 복이 온다고 그저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을 뿐인데 정보는 알아서 찾아왔다.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내일 다시 한번 방문 해야만 할 것으로 보였다.
“차장님, 오늘은 이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응?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회계사들은 작품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쯤에서 자리를 뜨기로 했다. 확실한 정보가 주어졌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면 될 뿐이다.
“저기 죄송한데 실례가 되지 않으면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사인이요?”
큐레이터가 본인의 수첩을 꺼내 보이더니 태범에게 사인을 요구했다.
“무슨 사인?”
서류나 계약서에 사인을 해봤어도 이렇게 개인적으로 사인을 요청받는 일은 처음이었다.
본인이 연예인도 아니고……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사인이야 어려운 건 아니었다. 그리고 태범은 평소 하던 사인을 그녀의 수첩 위에 휘갈겼다.
“감사합니다.”
사인을 받고 좋아하는 큐레이터의 모습에 태범의 입에는 괜히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이 또한 처음 겪는 묘한 기쁨이었으니 태범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네, 그럼 저희는 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세 명의 회계사는 내일을 위해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기로 하며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