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74화 (74/188)

# 74

신라 호텔 커피숍.

태범은 원대 그룹에서 나온 두 명의 경영기획팀 직원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그마치 한 잔에 18,000원 짜리 아메리카노다.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이런 고급스러운 곳까지 와서 개인적인 면담을 요청하는 걸 보니 분명 보통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았다.

“혹시 제 재무 자문에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니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오히려 태범 씨 덕에 인수 협상에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저희 회장님도 만족하시고 있고 이사회에서도 좋은 성과로 봐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무 자문이 문제가 있던 게 아닐까.

만나기 전까지 의도를 말하지 않던 원대 그룹 측 때문에 조바심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다행히도 태범이 우려했던 상황은 아닌 거로 보였다.

“그럼 뭐 때문에 저를 만나고 하신 건지?”

“이런 말씀하기가…… 좀 조심스러운데.”

경영기획팀의 팀장이라는 사람은 망설이며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이직할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이직이요?”

“네, 회계사님이 회계법인에 있기에는 아주 아까워 보여요. 조개 속 진주 같다 할까…… 저희랑 같이 일하면 제대로 빛을 보실 것 같아서 물어보는 겁니다.”

경영기획 팀장의 말에 태범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하…… 벌써 3번째네.’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만 벌써 3번째.

자잘한 기업과 헤드 헌터까지 포함하면 수없이 많은 곳에서 제의가 들어왔었다.

이제는 지겨울 정도였다.

물론 능력을 알아봐 주고 인정해준다는 의미에서 감사했지만 매번 거절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의 제의가 있어도 남 밑에서 일하는 건 상정회계법인 한곳으로 끝내고 싶었다.

“죄송하지만 아직은 생각이 없습니다. 회계사로서 경험도 부족하고 다른 기업에 들어가서 일을 하기에는 부족한 게 많습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태범 씨 능력이면 충분히 저희 회사에서 일하실 수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죠.”

원대 그룹 측에서 파격적인 제시를 하며 태범을 스카우트하려고 했다.

상상 이상의 연봉, 높은 직급, 각종 성과에 대한 인센티브까지 이들은 일명 태범 모시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들의 권유에도 태범은 단호했다.

“절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한데, 제가 아직 회계법인에서 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차라리 절 이용하고 싶으면 상정회계법인으로 일을 주시면 제가 처리할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태범은 스카우트를 역으로 이용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신입 회계사 주제에 영업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지만 주도권은 태범에게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태범의 능력을 쥐고 싶어 아우성이니 말이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거절을 하고 호텔 밖으로 나온 태범을 맞이하는 건 차가운 바깥바람이었다.

찬바람에 얼굴을 스치는데 정신이 번쩍 차려지며 엔도르핀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남에게 인정을 받는 것과 더불어 스캐너가 준 능력에 대한 만족감이 더해져 몸속 자신감은 100% 충전된 상황이었다.

그런 자신감은 마음을 넘어 쾌락의 상태까지 도달했고 웃음으로 나타났다.

“하하하!”

* * *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오. 그 유명한 강태범 회계사가 아니십니까!”

우리 대학교 회계학과 출신, 김용수.

태범을 보자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가워하고 있다.

책상에 앉아 그의 특강을 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같은 회사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범은 용수를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잘 지내셨어요? 같은 회사 다니면서 얼굴 볼일이 이렇게 없을 줄은 몰랐네요.”

같은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세무 본부였던 용수를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끔 식당에서 얼굴을 마주칠 정도였다. 하지만 웬일인지 용수가 세무 본부가 아닌 재무 자문 본부 사무실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태범 씨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얼굴 보기는 힘드네요. 가끔은 태범 씨가 전설 속 상상의 인물인 줄 알았다니까요”

소문으로는 존재하지만 실체는 없는 미지의 존재로 용수는 태범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 제가 먼저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바쁘면 그럴 수 있죠. 태범 씨가 보통 사람도 아니고 많이 바빴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는 자주 볼 거예요.”

“네? 선배님, 세무 본부 아니신가요?”

“이번에 자문으로 지원 왔어요. 얼마 전까지 감사에 지원 나갔다가, 이제는 자문 본부로 왔네요. 나도 아직은 회사가 시키면 군말하지 않고 해야 할 짬이라, 후…….”

용수는 하소연하듯 인중을 모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앨론 뮤직 투자건 관련해서 태범 씨랑 같이 일할 거예요.”

“아, 정말요? 잘됐네요. 선배님하고 한 번쯤은 같이 일하고 싶었거든요. 같은 학교 출신 이거 큰 인연이잖아요.”

학교 선배와 같이 일한다는 말에 태범은 기뻐했다.

아무리 학연 지연을 타파한다고 한들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소속감에 애정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긴 하죠. 우리 학교 출신이 거의 없다 보니 태범 씨 같은 사람이 같은 동문이라는 게 뿌듯하네요.”

“아! 선배님, 여기 제 명함입니다.”

고시반에서 특강을 마치고 받았던 김용수의 명함.

1년이 지난 지금 거꾸로 태범이 용수에게 회계사 명함을 건네고 있었다.

* * *

앨론 뮤직 본사의 한 회의실.

태범과 용수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김진태 차장이 고객사와 미팅을 위해 앨런 뮤직의 본사에 와있었다,

“반갑습니다. 임호진입니다.”

회계사들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남자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앨론 뮤직의 마크가 박힌 티셔츠를 30대 후반의 젊은 남자.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듯 머리가 헝클어져 제대로 정리가 되어있지 않고 심지어 슬리퍼를 신고 회계사들 앞에 나타났다.

그는 지나가던 거지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앨론 뮤직의 대표 임호진였다.

“안녕하세요.”

고객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는 회계사들은 그런 대표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그는 비렁뱅이처럼 보일지라도 나름 대한민국 청년 중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한국 대학교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카이스트에서 전산학 석사를 딴 엘리트 중에 엘리트 게다가 단 한 번의 창업으로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음악 앱을 만들었다.

TV에서만 보던 인물이 눈앞에 있으니 마치 연예인을 보는 듯했다.

“어. 어! 요즘 잘나가는 회계사 아닙니까?”

임호진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손가락으로 태범을 지목하며 말했다.

어조가 격양된 걸 보니 임호진 역시 태범을 보고 놀란 듯 보였다.

두 천재의 만남이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묘한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강태범 회계사입니다.”

“맞아. 맞아! 강태범 회계사. 인터넷에서 봤어요! 머리가 대단하시던데요.”

임호진의 태도에는 전혀 거리낌 없었다.

다리를 쩍 벌리더니 시작부터 자유분방하게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회계사님들 격식 그런 거 따지지 말고 편하게 있으세요. 저한테는 허례허식 버려도 됩니다.”

정장을 곱게 차려입고 반듯이 앉아있는 회계사들이 답답해 보였던 모양이다.

돈을 다루는 직업이기에 스마트한 이미지를 위해 정장을 고집하고 있지만 사실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던 건 사실이었다.

임호진의 말대로 태범 역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목에 잠긴 단추를 풀고 싶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나름 고객사에 온 건데 체면은 지키기로 했다.

“다들 제가 누군지는 아실 거예요. 뭐, 몰라도 상관은 없고요. 근데 그거만 알아주세요. 제가 기업 재무에는 사실 젬병이거든요. 프로그래밍만 할 줄 알지 경영은 내 체질이 아니더라고요.”

임호진 대표는 얼굴을 약간 찡그린 채 온갖 손짓을 하며 본인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그가 말하길 본인은 경영자보다는 엔지니어에 가까운 사람이라 한다.

물론 사업을 이끈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나 컴퓨터 천재 이미지치고는 살짝 어수룩해 보였다.

그를 보아하니 어쩌면 투자자 측에서 전문 경영인 고용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번 어빌리티(ability) 측에서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힘 좀 써주시죠.”

홍콩의 사모펀드(PEF)인 ‘어빌리티(ability)‘에서 한국의 음원 사이트인 앨론 뮤직에 투자 제안이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리고 투자 유치 협의 과정에서 어빌리티가 앨론 뮤직에 기업 가치 평가 보고서를 요구했다.

회계사가 할 일은 그 기업 가치 평가 보고서 작성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얼마나 중요한 투자이겠습니까?”

김진태 차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투자 유치는 기업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물론 기업의 돈이 넘쳐나서 투자 없이 사업을 확장 할 수도 있지만 사실상 이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결국 기업은 성장과 확장을 위해서 외부로부터 투자를 받아야 하는 선택에 놓이게 된다.

지금 글로벌 기업인 애플(apple) 도 초창기에 마이클 마쿨라부터 92,000달러를 투자받아 정식으로 애플 컴퓨터라는 이름을 걸 수 있었다.

현재 기업 가치만 6,500억 달러가 넘는 고글(gogle)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 엄청난 거대 기업이지만 처음에 10만 달러를 투자로 시작됐다.

이처럼 사업이 확장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돈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기업의 가치를 나타내야만 한다.

투자자는 자선가가 아니다.

결국 투자자도 미래의 수익을 보고 들어오는 것이기에 투자 기업에 가치가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앨론 뮤직의 기업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데 두 가지를 염두에 둬야만 했다.

1. 투자사가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 것.

2. 앨론 뮤직의 기업 가치를 가능한 최대로 높일 것.

객관적인 가치 정보를 전달하는 동시에 고객사인 앨론 뮤직의 가치를 최대한 눈에 띄게 나타내며 투자 유치를 성공시켜야만 했다.

“회계사님들 이번 건만 꼭 성공시켜주세요. 앨론 뮤직의 미래가 회계사님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임호진 대표는 주먹을 쥐더니 영화에서 나올 법한 멘트를 내뱉었다.

확실히 보통 사람과는 남달랐다. 그는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듯 보였다.

대표의 시선이 김진태 차장에서 시작해 태범의 눈에서 멈췄다. 그리고 한동안은 시선을 거두지 않고 태범의 눈을 바라봤다.

“네, 꼭 성공시켜드리겠습니다.”

태범은 임호진 대표의 눈빛에서 뭔지 모를 열의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런가 태범은 반사적으로 투지를 내보였다.

* * *

앨런 뮤직과 미팅이 있고 다음 날 업무를 지체 없이 바로 시작됐다.

유리 칸막이로 나눠진 조그마한 회의실 그 안에 원탁 테이블에는 태범과 용수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 책임자인 김진태 차장에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각자 노트북이 놓여있었고 기업 가치 평가를 위한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클라이언트에서 이번 프로젝트 엄청나게 신경 쓰고 있거든 우리가 확실히 해줘야 해.”

일을 시작하기 전 김진태 차장은 간략히 프로젝트의 개요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설명했다.

“투자사에서 가끔 개지랄 떨 때가 있어. 좀 깐깐한 애들은 별의별 것을 요구하는데 비위 맞추기가 참 힘들거든. 그러니까 투자자들하고 접촉할 때는 먼저 성향을 확인해!”

김진태 차장은 자신의 업무 경험을 빗대어 두 명의 후배 회계사들에게 충고했다.

일하다가 당한 게 많은 듯 침을 튀기면서까지 열을 내며 말을 내뱉었다.

“자! 내가 말한 것 명심하고 용수 씨는 자산을 평가하고 태범 씨는 시장을 분석 해. 서로 모르는 게 있으면 항상 물어보고!”

기업의 가치를 평가 하는 데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었다.

김진태 차장은 용수와 태범에게 다른 접근법을 제시했고 이렇게 업무가 시작되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걸 시작할 때면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성공된 결과물이 주는 정복감과 성취감.

태범은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서류에 손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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