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73화 (73/188)

# 73

“뭐든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남들보다 암기력이 좋은 편이긴 하죠.”

“와…….”

여유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태범은 자신감을 비쳐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여 역겨워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태범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태범은 자리에 앉고 가방 속에서 서류 뭉텅이를 꺼냈다.

원대 그룹의 기업 인수 관련 투자 자문서였다.

인수 대상인 가상 화폐 거래소의 보안 취약점을 발견했고 이를 토대로 고객사가 최대한 이익을 볼 수 있도록 가치를 재평가했다.

“이사님, 원대 그룹 자문서 새로 작성했습니다.”

태범은 서류를 가지고 장혁 이사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 태범 씨, 방송 잘 봤어.”

“감사합니다.”

역시나 장혁 이사는 태범을 보자마자 방송 이야기를 꺼냈다. 회사에 온 건지 방송사에 온 건지 태범을 보는 사람마다 방송 이야기를 꺼냈다.

“여태껏 그런 능력을 숨기고 있던 거야? 이야!”

장혁 이사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태범을 경외의 눈빛으로 쳐다봤다.

“숨기기보다는 굳이 먼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에이 그런 게 있으면 자랑해도 돼. 봐봐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제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는지, 태범의 서류는 책상 위에 놓였지만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

오직 태범의 능력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태범 씨, 한 번 보면 다 외울 수 있다고 했지? 이거 한번 외워봐.”

장혁 이사가 서랍을 열더니 트럼프 카드를 꺼냈다. 뜬금없이 사무실에서 나온 카드에 태범은 당황스러웠다.

‘심심할 때 카드놀이라도 하셨나…….’

카드가 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장혁 이사가 건넨 카드를 받았다.

“TV에서 봤는데 기억력 좋은 사람들은 카드를 통째로 외우더라고 태범 씨도 할 수 있어?”

“그야…… 어려운 건 아닌데…….”

“어렵지 않다고? 이야! 알고 보니 숨기고 있던 게 많이 있었구먼.”

솔직히 카드 외우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태범이도 마찬가지로 폰 노이만의 암기력을 얻었을 때 능력을 시험해볼 삼아 카드를 외워본 적이 있었다.

암기력, 기억력 하면 떠오르는 게 카드 순서 외우기이니 말이다.

일렬의 숫자와 문양의 순서만 외우면 되는 것 이는 평소 공부할 때 책을 암기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태범은 카드 박스에서 카드를 꺼낸 뒤 한 장씩 보며 보기 시작했다.

거의 1초에 한 장씩 보는 수준, 한 번 본 카드를 책상 위에 순서대로 올려놨다.

“확인하시겠어요?”

“다 외운 거야?”

“네.”

“오…….”

1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장혁 이사는 감탄사를 내며 책상 위에 있는 카드를 집어 들었다.

“확인 해봐도 되지?”

“네, 순서대로 읊어드릴 게요. A다이아, 3클로버, 10하트, J하트, K클로버…….”

장혁 이사가 카드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태범은 카드의 문양을 말했다.

“A클로버, 4하트, 6하트, A스페이스..”

장혁 이사가 카드를 넘기는 속도보다 태범이 입 밖으로 말하는 카드가 더 빠를 지경이다.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카드를 읊었다.

“하하하하!”

눈앞에서 놀랍고 흥미로운 일이 벌어지자 장혁 이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실성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무슨 비법이라도 있어?”

장혁 이사는 본인도 태범처럼 카드를 한번 씩 쓱 보더니 잘 안되는지 태범에게 물었다.

“음…… 그런 건 없고요. 그냥 자연스럽게 외워지던데요.”

“결국 타고났다는 말이잖아? 태범 씨는 좋겠네. 그게 다 부모님한테 좋은 머리를 물려받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래서 저도 항상 부모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굳이 능력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자세한 건 설명할 수 없으니 그저 장혁 이사의 말에 대꾸를 해주며 넘어갈 뿐이었다.

“이사님, 제가 다른 방식의 가치 평가를 적용해봤는데 혹시 문제가 될까요?”

재롱 잔치는 여기서 마치고 태범은 업무적인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아! 그래, 내가 잠시 정신이 팔렸었네. 태범 씨 능력이 하도 궁금해서 말이야.”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드린 투자 자문서 한번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 어디 한번 볼까. 많이 바빴을 텐데 이걸 언제 다했대.”

장혁 이사는 태범의 말에 서류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음…… 보안 취약점에 따른 가치 평가? 이게 뭐지?”

서류를 살펴보던 장혁 이사는 낯선 단어를 보더니 태범에게 물었다.

“인수 대상 기업에 보안 취약점이 있는 것 같아서 의견을 작성해봤습니다. 추측이지만 원대 그룹에서 검토해 볼 만한 사항인 것 같아서요.”

“무슨 보안을 말하는 거지?”

“네트워크 시스템이요.”

“응? 그걸 태범 씨가 검토했다고?”

태범은 하나를 하라고 시키면 열 개를 하는 사람이었다.

광범위한 능력을 가졌다 보니 문제를 하나로 인식하지 않고 다각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다 보니 업무에서도 생각지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는데 지금 상황이 그러했다.

“크게 문제가 안 된다면 원대 그룹 측에서 이걸 봤으면 합니다.”

“좋아, 태범 씨니까 믿겠어. 태범 씨 자문서 검토해보고 웬만하면 원대 그룹 측에 넘겨주도록 할 게.”

“감사합니다.”

* * *

방송에 출연한지도 한 달이 지났다.

한 번 피었던 불꽃은 사그라질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슈가 있으면 한 번 붕 떴다가 금세 열기가 식기 마련이지만 태범의 능력에 대한 열기는 대한민국을 넘어 해외까지 번지고 있었다.

해외 영상사이트에 ‘세상에 신기한 일이‘의 태범의 영상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수많은 취재와 방송 제의도 있었고 심지어 광고 이야기 까지 나왔었다.

물론 모두 거절했다.

연예인이 아닌, 회계법인에 속한 회계사라는 타이틀을 가진 몸으로써 외부 활동을 함부로 할 수만은 없었다.

태범의 활동하는 자리는 여전히 이곳 상정회계법인의 17층 사무실이었다.

“대표님이 호출하십니다.”

“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대표님의 호출이 잦아졌다.

사실 삼정회계법인처럼 규모 있는 회사 내에서 대표와 말단 직원의 만남은 흔치 않은 일이다.

전체 직원 수만 자그마치 3천 명이 넘는다. 3천 명 중 끝과 끝이 만나는 셈이었다.

태범은 연락이 받자 바로 대표실로 올라갔다.

“태범 씨, 왔어?”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태범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태범이 대표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이 찢어질 정도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줬다.

“앉아.”

“네.”

태범과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처음에 왔을 때는 긴장도 됐고 대표라는 직책에 중압감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주 편안했다.

이 가죽 소파에 앉는 것도 집 거실에 놓인 소파처럼 익숙해졌다.

“이번에 원대 그룹에서 태범 씨를 얼마나 칭찬하고 나서는지 몰라.”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안적인 문제에 접근할 생각을 했어? 재무 관련 자문서도 만들기 쉽지 않았을 텐데.”

“원래 프로그래밍이나 네트워크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가상 화폐 거래소의 역사가 길지 않다 보니 비교 기업이 없어서 재무적인 접근으로는 평가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기술적으로 접근해봤는데 하다 보니 보안 취약점이 보였습니다.”

“역시 대단해. 어쩜 할 수 있는 게 그렇게 많아?”

대표는 태범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가 이렇게 태범을 칭찬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 재무 자문 본부에서 맡았던 원대 그룹의 가상 화폐 거래소 인수 건과 관련해서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태범이 제출한 자문서에는 인수 대상 기업의 보안 취약점이 포함돼있었고 그로 인해 예상보다 적은 가격에 기업 인수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보안에 대한 예방 대책에 큰 도움을 주기까지 원대 그룹의 사업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자네 덕분에 원대 그룹에서 나오는 업무가 우리 쪽으로 많이 넘어올 것 같아.”

회계법인의 본업은 회계 감사이지만 수익적 측면으로 볼 때 부업인 경영 자문, 세무의 비중이 더 높았다.

이로써 자문 부문에서 능력을 보이는 태범 덕분에 기업의 수익이 크게 증가할 거로 보였다.

자문 부문은 감사와 다르게 실력이 곧 영업이기 때문에 분석 능력이 가장 중요한 기업의 무기였다.

그렇게 때문에 회계법인에 알맞은 능력을 갖춘 태범은 상정회계법인 입장에서 굴러들어온 복덩어리인 셈이었다.

“앞으로 일이 많아질 거야. 최근 들어온 신규 업무가 자네 능력 보고 들어온 게 많거든, 힘들어도 고생 좀 해줬으면 좋겠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히려 일이 생긴 것에 대해 기뻤다.

태범은 월급이나 받고 뼈를 묻을 생각으로 회계법인에 들어온 게 아니었다.

원하는 건 경험이었다. 스캐너가 준 능력을 발휘하며 목표에 맞는 경험을 얻고 싶었다.

현재가 아닌 미래의 바탕이 될 수 있는 경험 말이다.

스캐너를 사용하면서 다짐했듯이 태범은 분명 최고를 향해 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 * *

드디어 오늘, 집에서 독립하는 날이었다.

언제까지 집에 눌러 살 수는 없었다.

새들도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둥지를 떠나게 된다.

태범 역시 집에서 나와 독립할 때가 됐음을 느꼈고, 지체 없이 집에서 나왔다.

혼자 살기 적당한 강남에 위치한 원룸이었다. 이제 출퇴근을 걸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태범은 아버지의 차량을 빌려 어머니와 이삿짐을 날랐다.

“김치는 여기 있고 웬만하면 사 먹지 말고 집에서 먹어. 바깥 음식 너무 먹으면 나중에 몸 안 좋아진다.”

어머니는 요리 용품, 세탁 용품 등 온갖 살림살이를 태범의 새집에 가져왔다.

아무리 능력 좋은 아들이라 할지라도, 살림살이 한 번 안 해 본 태범이 걱정 된 모양이었다.

대부분 혼자 살면 식사는 사 먹기만 한다니, 어머니는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며 반찬까지 냉장고에 넣어줬다.

“응, 알았어. 알았어.”

“항상 불조심하고! 이런 봉투는 분리수거 하는 거 알지?”

태범은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머니는 일일이 모든 걸 가르치려 하셨다.

“이제 됐어. 나머지는 내가 정리 할게.”

꽤 오랜 시간 어머니의 살림 교육을 듣고 나서야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텅 빈 방에 홀로 남게 되었다.

기분이 묘하긴 하지만 이제야말로 정말 집을 떠나 사회로 나온 기분이었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확인해야지.’

새집에서 확인할 가장 중요한 것은 컴퓨터와 스캐너였다.

혹시나 집이 바뀌었다고 작동이 안 될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먼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들어가 봤다.

└ 와! 개 부럽다.

└ 저 사람 회계사도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입니다. 진짜 천재인 듯.

└ 저런 능력이 있으면 왜 회계사를 하고 있죠? 그림만 팔아도 돈 좀 만질 텐데.

일단 컴퓨터는 문제없이 잘 돌아간다.

여전히 인터넷상에는 태범에 대한 글이 새로 갱신되어 기사와 댓글이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 세상은 능력 있는 자를 알아서 찾는 법이었다.

굳이 능력을 드러내려 애를 쓰지 않아도, 결국 사람들은 능력을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는 껍데기 수준에 불과했다

밝혀진 것뿐만 아니라 아직 많은 능력이 태범에게 있었고 앞으로 스캐너를 통해 얻을 능력에 대한 가능성도 무궁무진했다.

‘그래! 아직 놀라긴 이르지…….’

태범은 마음속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집에서 첫 스캔을 시도했다.

[스캔할 능력을 선택해주세요]

[레오나르도 다빈치 능력]

-통찰력 (0%)

-창의성 (35%)

-호기심 (0%)

-도전 정신 (0%)

-미술 감각 (99%)

다행이다. 스캐너 역시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스캐너가 능력을 주는 원리에 대해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혹시나 위치가 바꿨다고 스캔이 안 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스캐너는 장소불문, 그 자체로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미술 감각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99%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100% 진행되었습니다.]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레오나르도 다빈치 능력]-미술 감각(100%)-창의성(35%)

[워렌버핏 능력]-시장 통찰력(100%)-기업 분석력(100%)-도전 정신(100%)

[폰 노이만 능력]-수리 이해력(100%)-언어 이해력(100%)-암기력(100%)

[이소룡 능력]-힘(100%)-유연성(100%)

미술 감각이 100% 채워지는 순간, 태범은 또 다시 엄청난 전율을 느끼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