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금요일 저녁.
슥.슥. 타타타탁.
고요한 방안의 종이 넘기는 소리와 타자치는 소리는 태범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퇴근 후 태범은 방에 들에서 기업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론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논문과 관련 자료가 널브러져 있었고 컴퓨터 화면에는 기업의 재무 정보가 나타나 있었다.
본인이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모두 사용하며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모두 접근해 나섰다.
재무적 접근을 중심으로 사람의 심리와 그 외 기술적 부분까지 기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영역을 포괄적으로 관찰했다.
이소룡 능력을 제외한 워렌버핏, 다빈치, 폰 노이만의 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태범아, 방송한다!”
태범의 몰입을 깬 것 어머니의 우렁찬 목소리였다.
어머니의 부름에 태범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힘겹게 촬영했던 ‘세상이 신기한 일이’ 오늘 방송하는 날이었다.
가족들은 TV앞 소파에 앉아 방송을 기다리고 있었고, 본인이 TV에 나온다는 것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연예인들이야 TV에 나오는 게 직업이라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일반사람들 입장에서는 평생 동안 TV 한번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흥미롭고 기대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응, 언니 지금 SBO 틀어봐.”
어머니는 이모와 통화를 하며 가족의 방송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집안에 경사라도 난 듯 어머니는 친척들에게 태범과 본인의 방송 출연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방송 시작하기 전 어머니는 한 번 더 연락을 돌리며 방송을 알렸다.
“지금 시작한다. 전화 끊을 게.”
음료수 광고를 마지막으로 드디어 세상에 신기한 일이가 시작했다.
하루에 3개의 이야기가 나오며 처음에 MC들이 오늘의 소재를 간추려 설명, 예고해주었다.
오토바이 타는 강아지, 늙은 노모를 돌보는 할아버지 그리고 마법 같은 미술 실력.
오늘은 3가지 주제로 방송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역시 하이라이트답게 태범의 소재는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었다.
온 가족은 기대감에 가득 찬 상황에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나온 소재는 오토바이 타는 강아지.
강아지가 오토바이 타는 걸 좋아해 주인이 오토바이를 타고 어딘가를 나설 때마다 같이 올라타 드라이브를 즐기는 강아지였다.
재미있긴 하지만 별 신기함은 없었다. 그저 어딘가 있을 만한 특이한 강아지 정도…….
두 번째 소재는 늙은 노모를 돌보는 할아버지.
이런 소재 같은 경우는 신기함보다는 감동적인 스토리를 이끌어 내며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한 소재였다.
나이가 칠십이나 먹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어머니인 90대의 할머니를 돌본다.
할머니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부터 시작해 할아버지의 병간호하는 모습 그리고 주변의 평판까지 방송은 할아버지를 최고의 효자로 만들고 있었다.
방송에서 스토리의 힘은 강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 태범의 소재가 방송을 시작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TV를 보던 가족들은 태범의 소재가 나오자 자리를 고쳐 앉고 TV 속으로 빨려갈 듯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에 신기한 벽이 있다는데 정말인가요?]
[네, 아주 신기한 벽이 있습니다. 벽이 살아서 눈앞에 움직이는데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첫 장면은 PD가 복지관의 벽화를 찾아가는 장면이었다.
눈앞에 살아있는 벽,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가져다주기 위해 할아버지는 과장된 표현을 하고 있었다.
“풋. 저 할아버지 연기 잘하네.”
모르고 보는 것과 알고 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
할아버지가 대본을 보고 연기한다고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어서 할아버지는 PD를 이끌고 벽화로 안내했다.
그리고 태범이 그렸던 벽화가 TV 화면에 나타나는 순간 잠시 화면이 멈추더니 MC들이 서 있는 장면으로 화면 전환이 일어났다.
[와. 저게 뭐예요?]
[저런 게 왜 복지관에 있는 거죠?]
MC들은 마치 처음 본 척, 미사여구와 함께 벽화에 대해 극찬을 했다.
“와. 태범아 저거 정말 네가 그린 거야?”
어머니가 태범을 팔을 톡톡 치며 물었다.
가족들 역시 태범의 벽화를 스마트 폰 속 조그마한 액정으로 본 것뿐이었지 이렇게 영상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확실히 화면과 화질의 차이는 같은 그림이라도 다르게 만들었다.
가족들은 역시 화면 속 MC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벽화에 감동을 받은 듯 보였다.
“엄마, 나온다!”
복지관에 이어 나온 곳은 태범의 집이었다.
PD가 입소문을 듣고 자연스럽게 태범의 집으로 찾아온 설정이었다.
[여기에 벽화 그림으로 유명한 분이 산다는데, 맞나요?]
[네, 맞아요.]
집 문이 열리고 가장 먼저 화면에 나타난 건 어머니였다.
제작진이 즉흥적으로 방문한 콘셉트로 어머니도 나름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하하하. 엄마,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얘? 귀신처럼 나왔어.”
어머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그 장면이 TV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태인은 TV 속 어머니의 모습을 보더니 크게 웃으며 물었다.
‘눈치 없는 자식.’
태범은 태인을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머니도 나름 TV에 나오는 본인의 모습을 기대하고 본 것일 텐데, 저렇게 비웃어 버리다니 지금이라도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지만 참았다.
“어머나. 내가 저렇게 화장을 했나?”
본인이 한 화장에 어머니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마치 중국의 강시처럼 피부가 하얗게 되었고 입술은 아주 강렬한 붉은 색으로 거울을 통해 보는 본인의 모습과 TV의 모습은 많이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카메라와 TV가 많이 발달된 까닭인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욱 선명하게 장면을 담아내고 있다.
다음은 아버지의 인터뷰가 나왔다.
아버지는 TV에 본인의 모습이 나오는 게 쑥스러운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태범 씨의 벽화가 요즘 SNS에서 화제인 거 알고 계셨어요?]
[허허, 저도 직장 동료가 보여줘서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이 그렸다고 믿지 못했는데 물어보니까 본인이 그렸다고 하는데 저 또한 놀라웠습니다.]
아버지는 평소보다 한껏 낮춘 목소리에 중후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 듯 보였다.
다들 방송에 신경 안 쓰는 척하지만 다들 TV 출연에 대한 기대감과 긴장감이 더해져 평소의 모습이랑은 다르게 나왔다.
가족의 인터뷰가 끝나고 주인공인 태범이 화면에 나타났다.
화면에는 책상에 앉아 수많은 서류 속에 파묻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이는 회계사로써 전문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연출이었다. 회사의 뜻대로 이런 장면은 하나쯤 있을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해 태범이 부탁해 넣은 장면이었다.
[이 사진의 벽화를 그리신 분이 맞으십니까?]
[네, 제가 그렸습니다.]
촬영할 때의 본인의 모습을 이렇게 TV화면으로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쩌다가 저런 그림을 복지관에 그리시게 된 거예요?]
벽화에 대한 PD의 질문 그리고 태범의 대답이 이어지고, 직접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천사와 악마의 만찬.’
지금 TV에 나오는 저 그림은 거실 벽 가족 사진 옆에 걸려있다.
이어서 아무 설명 없이 헬기에 올라탄 태범의 모습이 나타났고 시청자들에게 기대감을 잔뜩 줄 만한 자막이 나타났다.
[헬기? 그림을 그린다면서 헬기는 왜 타신 거죠?]
아무 말 없이 헬기 창밖을 바라보는 태범, 그 후 장면은 다시 집안으로 전환됐다.
[헬기에 올라탔던 주인공! 과연 무엇을 하려는 건지?]
시청자들로 하여금 화면 속 태범이 뭘 하려는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장면들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궁금증에 채널을 돌릴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어서 태범이 캔버스 앞에 앉아, 서울의 모습을 담는 장면이 나왔다.
[놀라운 장면! 헬기에서 봤던 서울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주인공.]
놀라움을 표현하는 자막이 태범의 비상한 능력을 빛내주었다.
그렇게 6장의 그림을 마무리 짓고 캔버스가 하나로 합쳐지며 서울의 모습을 나타냈다.
[정말 놀라운 데요. 사실 그림 솜씨만 해도 이 프로그램에 나올 만 한데 완벽한 기억력까지 겸비했으니 분명 많은 시청자분들이 놀라실 거예요.]
[네, 맞아요. 이 방송이 나간 후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 줄 것 같은데 앞으로 재능을 살려 더 빛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네요.]
마지막으로 MC들은 오직 태범의 소재만을 거론하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렇게 기대했던 방송은 끝이 났다.
방송은 태범의 생각대로 진행됐고,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방송 이후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포털사이트 녹색창 인기 검색어 1위.
이는 SNS에서 인기 좀 끌었던 벽화랑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주로 대한민국에 이름 좀 알린다는 탑 스타 정도의 영향력을 가져야만 인기 검색어 1위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건 본인이 녹색창 인기 검색어 1위를 한 세상이었다.
“어떤데? 반응이 어때?”
인터넷을 잘 다룰 줄 못하는 어머니는 태범에게 사람들 반응을 물었다.
“엄마, 나 이러다 스타 되는 거 아닐까 몰라.”
“왜? 반응 좋아?”
“지금 세상에 신기한 일이 검색어 1위인데?”
“검색어 1위하면 좋은 거야?”
“녹색창이 우리나라 1등 사이트인데 거기서 검색어 1위를 한 거야.”
“정말이야?”
어머니는 놀란 듯 입을 재대로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친구와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반응을 물었다.
방송이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태범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미쳤다…….’
사람들이 호응이 이 정도 까지 일지는 몰랐다. 분명 흥행할 소재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 외로 반응이 너무 좋았다.
댓글은 온통 믿을 수 없는 걸 봤다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모든 걸 기억하는 남자, 기억력 천재, 천재 회계사, 방송 사기꾼(?)
단 한 번의 방송으로 댓글에는 태범을 부르는 많은 수식어가 붙었다.
그중의 사기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믿지 못할 내용이 TV에 나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형, 벌써 형에 대한 정보 쫙 떴는데?’
스마트 폰을 보던 태인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자주 들리던 커뮤니티 사이트에 온통 태범이 이야기였고 벌써 태범이 뭐 하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인지 글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태범의 스마트 폰이 불이 나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릴 적 친구들부터 시작해 평소에 친하지 않던 친구까지 그리고 학교 선후배와 교수님에게 전화, 문자를 받았다.
방송의 힘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태범에게는 직접 피부로 느껴지는 날이었다.
* * *
가장 먼저 TV에 나온 태범을 알아본 건 골목길 떡볶이 가게 아주머니였다.
“총각, TV에 나온 총각 맞지?”
아침 출근길, 항상 지나치던 떡볶이 가게의 아주머니가 태범에게 손짓을 보냈다.
“아…… 네.”
“맞구만 맞아! 내가 어제 TV 보자마자 딱 알았지. 얼마 전에 방송국 사람들이 이 골목으로 지나가더니 그 집으로 간 거였나 보네.”
“네, 맞을 거예요.”
“맞아, 총각 정말 본 게 다 기억나? 총각은 치매 걸릴 걱정 없겠네.”
“제가 지금 출근해봐야 돼서 이야기는 길게 못 할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자칫 붙잡혀서 수다 상대가 될 것만 같았다. 태범은 스마트 폰을 꺼내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괜히 아침부터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런지 지나가며 스치는 사람들마저 본인을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게 착각은 아니었다.
태범이 회사 건물로 들어서자 많은 직원들의 시선이 태범으로 향했다.
태범의 얼굴을 쓱 한번 보더니 서로 쑥덕이며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태범 씨, 연예인 다 됐네요?”
태범은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안영미와 만났다.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연예인인 까지는 아니죠.”
“그래도 크게 반박은 안 하시는 거 보니 유명해지신 걸 느끼고 계시나 봐요?”
“겨우 하루 지났는데요. 뭐.”
“에이! 이미 스타가 다 되셨던데요.”
안영미는 태범의 팔을 툭 치고는 웃으며 말했다.
“뭐 그래도 나쁘지는 않네요.”
사람들에 관심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은 쪽으로 알려졌으니 말이다.
“아참! 그리고 저번에 했던 말 고마워요. 덕분에 이렇게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게 됐네요.”
하마터면 안영미 역시 박철중 전무와 함께 구렁텅이 속으로 들어갈 뻔했다.
그녀 역시 박철중과 손을 잡고 일했기에 그와 관련된 분식 회계에 엮길 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태범이 미리 경고한 탓에 기말 감사가 완료되기 전 알아서 발을 뺐고 그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영미에게 태범은 직업적인 면에서 생명의 은인이었다.
“이제 본부가 달라서 자주 못 보네요. 그래도 언제 한번 감사의 의미로 식사 대접해 드리고 싶네요.”
“아! 괜찮아요. 그냥 시간 날 때 동기들끼리 만나서 같이 식사해요.”
안영미는 태범에게 식사를 제안했지만 굳이 대접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서로 본부가 다르고 재무 자문 본부 사무실 낮은 층에 위치했기에 태범은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렸다.
“네, 그럼 또 봐요!”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사이로 안영미는 손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괜히 남이 보면 연인으로 오해할까, 태범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태범 씨, 방송 잘 봤어요. 같이 일하면서도 태범 씨가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네요.”
사무실에 들어가니 기다렸다는 듯 동료들은 태범의 당장에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태범의 옆을 지나가던 재무 자문 본부의 권유진 대리가 발길을 멈추더니 칭찬을 건넸다.
“태범 씨가 방송에 출연했다고 들어서 방금 인터넷 다시 보기로 봤거든요.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정말 한번 보면 뭐든 기억이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