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네? 헬기요?”
그림과 헬기, 남이 보기에는 전혀 연관성 없는 두 단어였다.
하늘을 날며 그림을 그리겠다는 건지 PD는 태범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말씀드리기는 뭐하고, 저를 헬기에 태워주시고 서울 한 바퀴만 돌아주세요.”
“이유라도 알면 안 될까요?”
PD는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다. 마치 대단한 걸 보여줄 것처럼 헬기를 요구하니 말이다.
하지만 태범은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대본과 설정은 현실감을 떨어뜨린다. 태범은 방송 제작진조차 기대하고 놀랄만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즉흥적으로 생각지도 못한 걸 봤을 때 생생한 표정이 나오는 법이었다.
“아마 ‘세상에 신기한 일이’ 라는 프로그램 제목답게 그 어떤 것보다 신기할 걸 보게 되실 겁니다.”
“아…….”
도대체 뭘 보여주려 길래 저렇게 자신감을 가질까, PD는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괜히 알려달라며 재촉을 했다가 태범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감정을 속으로 꾹 참고 있었다.
“가능한 가요?”
“저희가 헬기를 사용하려면 사유가 필요한데 간단한 이유라도…….”
“분명 방송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태범은 확실치 않고 어물쩍한 대답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게 방송에 나간다면 큰 흥행을 일으킬 만한 소재는 분명했다.
프로그램 제목대로 세상에 신기한 일이니 말이다.
“그럼 제가 방송국에 연락해 두겠습니다. 운행 스케줄에 맞춰서 연락드리겠습니다.”
태범이 자세히 설명할 것 같지 않자 PD는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태범의 제안을 승낙하며 약속했다.
어쨌든 이 정도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입에서 나온 말이 허튼소리는 아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분명 제 제안을 받아들인 걸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입니다. 회계사님을 믿겠습니다.”
뭔지를 모르겠으나 태범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PD는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 오늘 하던 촬영은 마무리는 지으시죠.”
“네, 그럼 그리던 그림마저 그리겠습니다.”
태범은 다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 * *
서울 잠실 한강 공원 헬기장.
아직 자세한 건 모르고 있지만 제작진들은 태범이 원하는 데로 방송국 헬기를 준비시켜 놨다.
SBO 방송국의 마크가 찍힌 흰색 헬리콥터가 헬기장에 착륙해 있었다.
주변에는 몇 대의 카메라들이 자리를 잡고 태범의 모습을 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얼. 그 자체였다.
미리 짜인 대본, 설정도 없었고 제작진조차 태범이 뭘 하는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준비 다 되셨어요?”
“준비라 할 게 있나요. 몸만 올라가면 됩니다.”
“아, 그래요? 뭐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 건가 봐요.”
“네, 그냥 가면 됩니다.”
헬기에 올라타서 그림이라도 그릴 줄 알았던 PD의 생각은 틀렸다.
태범이 아무런 도구도 없이 맨몸으로 헬기를 타려 하자,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두. 두. 두. 두.
프로펠러가 돌아가며 강추위와 바람이 더해져 뭐든 얼려버릴 것만 같은 냉기가 쏟아졌다.
태범과 PD 그리고 카메라맨은 강한 바람을 맞으며 고개를 숙인 채 헬기에 올라탔다.
처음 타보는 헬기에 태범은 긴장과 흥분이 됐다.
비행기와 다르게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생동감 있으며 바로 옆에 보이는 지상의 모습은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헬기에서 발생하는 소음을 막아주는 귀마개를 쓰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태범이 할 일이라곤 헬기 위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저 다리 밑에 보이는 서울 도시를 보고 머릿속에 기억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다행이네요. 미세먼지도 없고 공기도 좋아서.”
요즘 중국에서 내려오는 미세먼지에 서울 전체가 모습을 감추곤 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오늘은 쾌청한 날씨에 먼지 하나 없이 서울 시내가 깨끗하게 보였다.
“그러네요. 아마도 신이 도와주는 걸 보니 징조가 좋은 것 같습니다.”
PD 역시 깨끗한 서울의 공기를 보니 기분이 좋아진 듯 보였다.
“자 그럼 저는 집중 좀 하겠습니다.”
웃고 대화를 하는 것도 잠시, 태범은 표정이 한순간에 바뀌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헬기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헬기가 어느 정도 상공으로 올라갔을 때 태범의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마치 하늘을 날며 지상의 먹잇감을 찾는 독수리처럼 태범은 눈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지상을 바라봤다.
미간을 찌푸리며 눈 깜빡임은 거의 없이 헬기 창밖을 바라보는 태범의 모습이 곧이곧대로 카메라에 담겼다.
헬기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도는 동안 태범은 그대로 얼어버린 듯 작은 미동도 없었다.
‘뭐지? 헬기 관광이라도 온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는 태범의 모양새에 PD는 의아해하는 동시에 의심을 하고 있었다.
기껏 대단한 것을 보여줄 것처럼 말하더니, 하는 거라곤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니 PD 입장에는 당연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일단 벌어진 일, 태범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긴 하지만 만약 정말 별거 아니라면 한마디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헬기가 서울을 한 바퀴 돌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헬기가 헬기장에 착륙하고 태범과 제작진들은 모두 지상으로 내려왔다.
“계속 창밖을 바라보시던데 방금 뭐 하신 거죠?”
“서울을 관찰했습니다. 멀리서 보니 아름답네요.”
“네?”
어이없게 돌아온 대답에 PD는 황당했다.
도대체 왜 헬기를 타자고 했던 건지 그리고 무엇을 한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대로 끝난 건가요?”
PD는 허탈한 감정에 굳은 표정을 지으며 태범에게 물었다.
“아니요.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진짜 재밌는 건 집에 가서 보여드리죠.”
* * *
다시 한번 집안은 제작진들로 북적였다.
집안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됐고 좁은 집안은 발 디딜 곳이 없었다.
TV에서 볼 때는 안 보이지만 하나의 영상이 만들어지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투입되고 있었다.
어머니는 또 다시 얼굴에 분칠하고 나타났고 오늘은 아버지까지 가세해 태범의 방송 녹화를 도와주고 있었다.
“동생도 현재 미대를 다니고 있고 이 아이도 마찬가지로 예술 감각을 타고 났습니다. 아마도 저희 집안이 이런 쪽으로 감각이 있는 모양입니다. 허허.”
아버지는 카메라 앞이 어색한지 웃는 듯 마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결국 몇 번이나 NG를 내며 같은 멘트를 반복하고 나서야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의 말이 편집되지 않고, TV에 나올 거란 보장은 없었다.
태인이는 여전히 TV나오길 거부하고 친구 집으로 피신해 있었다.
“다들 들어오세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태범은 제작진들을 방으로 불러들이며 다시 캔버스 앞에 섰다.
여전히 PD와 작가를 포함한 제작진들은 태범이 왜 헬기를 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 카메라 돌아갑니다.”
카메라에 빨간 불빛이 들어오며 태범을 비췄다.
PD는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태범에게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아까 전 헬기를 타고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고 오셨는데 뭘 하시려고 하는 거죠?”
“보시면 압니다!”
태범은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제작진들도 호기심 함께 긴장감을 가지고 태범을 지켜봤다.
이쯤에서 PD는 느끼고 있었다. 태범이 확실한 것만 보여준다면 방송은 100% 성공이라는 걸 말이다.
태범은 책상 위에 있는 귀마개를 귀에 꽂고 붓이 아닌 펜을 잡았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이전과는 다른 상황.
제작진은 눈을 크게 뜨고 태범의 행동을 지켜봤다.
태범이 펜을 집더니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태범은 다시 눈을 번쩍 뜨더니 캔버스 위에서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움직였다. 오히려 펜이라 그런지 붓을 사용할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그림을 나타내고 있었다.
“오! 저건?”
PD는 태범의 그림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건 잠실에 있는 헬기장이었다. 게다가 그 헬기는 SBO 방송국의 헬기 주변 또한 모든 게 같아 보였다.
태범은 어느새 그림 한 장을 뚝딱 만들어 냈다.
그리고 헬기장의 모습이 담긴 캔버스를 땅에다 내려놓더니 또 다른 새 캔버스를 올려놨다.
“다 한 건가요?”
PD의 질문에 태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마개를 끼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오직 태범의 신경은 머릿속 기억에 머물고 있을 뿐 그 어느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태범은 또 다시 펜을 들더니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헬기가 상공에 있을 때 바라보던 지상의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한강의 모습이 그려지기 시작하더니 그 주위에 있던 건물들과 각가지 구조물들이 캔버스 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
제작진들은 이제야 태범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태범은 헬기를 타며 바라봤던 서울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눈으로 단 한 번을 보고 말이다.
“이거 대박이다.”
태범의 모습을 본 PD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PD의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뛰고 있었다.
눈앞에서 믿기지 못할 장면이 일어나고 있다니 당연했다.
게다가 이건 꿩 먹고 알 먹는 상황이었다.
그저 그림 좀 잘 그리고 SNS에서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이기에 촬영을 온 것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예상치 못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그게 하필이면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할 능력이었으니 말이다.
해외에서 서번트 증후군을 앓던 아이가 이와 같은 능력을 보여준 건 있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처음이다.
그만큼 희귀한 능력으로 분명 누구나 놀랄 만한 것이었다.
또 다시 한 장의 그림이 완성됐다.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완성된 캔버스는 바닥에 내려놓고 또 다른 새 캔버스를 올렸다.
태범은 이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들 태범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자 숨을 죽이며 태범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나둘씩 방의 한쪽 벽면에는 태범이 그린 그림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창의성이 들어간 작업이 아니었기에 태범은 기계적으로 빠르게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작업은 깜깜한 저녁이 될 때까지 지속됐다.
다들 긴 시간의 녹화에 피곤들 할 만할 텐데 단 한 명도 딴 짓하지 않고 태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상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다 그리기에는 몇 날 며칠이 걸릴 것 같네요.”
드디어 태범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두 태범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을 옮겼다.
“으…….”
태범은 팔을 쭉 펴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암기력과 미술 능력을 동시에 써야 하는 작업이기에 피로가 금세 몰려왔다. 한 자세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니 지금 온몸의 근육이 뭉친 것만 같았다.
“자 제가 그렸던 그림들 모두 연결해보세요.”
“아…… 네!”
제작진들은 태범이 그린 캔버스를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총 6장이 되는 그림이었다.
제작진은 퍼즐 맞추듯 태범의 그림을 서로 연결하며 놓기 시작했다.
“와…….”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헬기 그림을 제외하고 거실 바닥에 놓인 5장의 그림은 마치 한 장의 그림인 마냥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은 높은 곳에서 바라본 서울의 일부 모습이었다. 건물과 도로 그리고 여러 건축물이 세밀히 묘사되어 있었다.
“위성사진 확인해봐.”
“네.”
정말 서울의 모습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작진들은 스마트폰으로 위성사진까지 검색해 그림과 비교해보고 있었다.
“똑같아요. 아니, 회계사님이 그린 게 더 확실한데요.”
제작진 중 한 명이 스마트폰 속 위성사진을 보며 말했다.
오히려 태범이 그린 그림이 세밀하고 정교했다.
위성사진이라 해봤자 지붕밖에 보이지 않지만 태범의 위성보다 더 가까이서 본 것을 그린 것이기에 건축물의 구조가 더욱 자세히 보였다.
“정말 대…… 대박입니다.”
이한욱 PD는 태범의 손을 두 손으로 붙잡더니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